지난 5월 ‘레스터 시티’가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한 뒤 라니에리 감독이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모습. ⓒphoto 뉴시스
지난 5월 ‘레스터 시티’가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한 뒤 라니에리 감독이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모습. ⓒphoto 뉴시스

클라우디오 라니에리(Claudio Ranieri)의 두 번째 마법이 영국을 넘어 유럽 전체를 흥분시키고 있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의 레스터 시티를 이끌고 있는 라니에리 감독. 그는 2015~2016시즌 이름조차 생소했던 만년 하위팀 레스터 시티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1884년 창단된 후 2~3부 리그를 전전하던 팀이, 132년 만에 리그에서 우승하는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가 이번에는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 유벤투스와 바이에른 뮌헨 등이 맞붙는 유럽 클럽축구 최고의 무대인 챔피언스리그까지 뒤흔들고 있다. 챔피언스리그 32강 조별예선이 끝나기도 전인 지난 11월 22일, 레스터 시티가 일찌감치 조 1위로 16강 토너먼트 진출을 확정지었다. 팀 창단 후 132년 만에 처음 진출한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 11월 30일 현재 조별예선 성적 4승1무를 올리고 있다. 단 1패도 없다. 승점 13점을 쓸어담으며 포르투갈의 강팀 FC 포르투 등 같은 조의 다른 유럽 팀들을 압도하고 있다. 지난 시즌 잉글랜드를 휩쓸었던 라니에리 감독의 마법이 2016년 겨울, 이번에는 유럽 무대를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우승 확률 1%에 도전

챔피언스리그가 시작되기 전, 유럽 축구 관계자와 축구 도박사들 사이 레스터 시티의 평가는 매우 박했다. 유럽의 축구 도박사들이 내린 레스터 시티의 챔피언스리그 우승 확률은, 유럽 축구 4대 리그 중 하나로 불리는 EPL 우승팀임에도 불구하고 달랑 1%였다. 2015~2016시즌 EPL 우승 확률이 0.02%였던 것에 비하면 “양호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승 확률 1%는 “우승은커녕 사실상 예선 통과도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돌려 말한 것이다. 그랬던 레스터 시티가 조 1위로 16강 토너먼트에 오르며 이번에는 유럽 축구 전문가들과 도박사들을 또다시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사실 2015~2016시즌 EPL 우승 후, 레스터 시티의 전력이 급락했다. 우승 주역 중 하나이던 은골로 캉테가 이적료 3580만유로에 첼시 FC로 팀을 옮겼다. ‘제이미 바디와 리야드 마레즈, 은골로 캉테’로 이어지던 레스터 시티의 전술라인이 무너졌다. 제이미 바디와 리야드 마레즈는 빠르고 화려한 개인기로 무장한 화끈한 공격수다. 이들이 최전방에서 수비 부담 없이 안정적으로 공격에 집중할 수 있도록 2선에서 수비와 공격을 조율해준 것이 바로 은골로 캉테다. 한 경기 평균 11~12.5㎞를 뛰며(활동량) 상대를 괴롭혔다. 매 경기 4회 이상 강력한 태클을 성공시키며 상대 공격의 맥을 끊어냈다. 특히 바디와 마레즈까지 단순하지만 경기 흐름을 바꿔 버리는 키패스의 핵심 길목 역할을 하며 공격과 수비를 지휘하던 선수였다.

이탈리아 출신인 라니에리는 탄탄한 수비에 중점을 둔 ‘4-4-2’ 포백 라인과 2선에서 최전방 공격수를 직접 겨냥한 킥 앤드 러시(kick and rush)를 전술의 기본 뼈대로 사용한다. 이 단순하고 투박한 전술을 빠르고 정교하고 속도감 있는 축구로 끌어올린 것이 라니에리 감독이다. 그라운드 안에서 그의 의중을 가장 정확하게 실현시킨 것이 은골로 캉테였다. 그 캉테가 첼시 FC로 떠나며 레스터 시티의 공격과 수비의 연결고리가 사실상 끊어졌다는 게 시즌 전 평가였다. 거칠고 끈적이던 라니에리식 수비와 빠르고 정교하게 단 한 방으로 해결하던 킥 앤드 러시의 강력한 공격력을 보여줄 플레이메이커가 올 시즌 그라운드에서 사라진 것이다.

은골로 캉테가 사라지며 실제 레스터시티의 수비는 흔들리고 있다. 공격 역시 제이미 바디와 리야드 마레즈의 파괴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클라우디오 라니에리는, 시즌 초만큼은 EPL이 아닌 챔피언스리그에 팀의 모든 것을 투입하는 선택을 했다. 레스터 시티는 전형적인 스몰마켓 팀이다. 은골로 캉테만 한 스타급 선수 영입에 많은 돈을 쓰지 않는다. 전술 활용도가 높은 선수를 충분히 사들이지도 않는다.

첼시, 리버풀, 아스널, 맨체스터 시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 등 빅마켓 팀들은 올 시즌에도 세계적인 스타 선수들을 대거 사들였다. 이들과 리그 우승을 다투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또 지난 시즌 우승을 만들어낸 라니에리식 전술과 용병술에 대해 EPL팀들이 ‘현미경 분석’을 마쳤다. EPL팀들이 라니에리식 포백 수비와 킥 앤드 러시 공격을 깰 대비책을 마련한 게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EPL보다 훨씬 큰 무대인 챔피언스리그에 나설 수 있는 선택권을 쥐고 있는 라니에리 감독이 굳이 시즌 초부터 EPL에서 힘을 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EPL에서 4팀이 나갈 수 있는 챔피언스리그에 스몰마켓 팀인 레스터 시티가 향후에도 다시 출전권을 거머쥘 수 있다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레스터 시티가 챔피언스리그에 다시 나가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절대적이다.

캉테 없이도 강한 라니에리의 전략

EPL보다 훨씬 큰 무대인 챔피언스리그에 집중하자는 게 라니에리의 시즌 초 전략이었다. 라니에리의 이 전략은 성적과 내용으로 확인되고 있다. 현재 13라운드(12월 2일 기준)까지 벌어진 EPL에서 레스터 시티는 3승4무6패, 승점 13점으로 14위에 머물러 있다. 2부 리그 강등권은 아니지만 지난 시즌 우승팀이라기에는 초라하다.

이렇게 EPL 13경기 동안 3승밖에 못 올린 레스터가 챔피언스리그에선 완전히 다른 팀처럼 움직이고 있다. 5경기 중 4승을 쓸어담았다. 라니에리 감독은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열리기 직전에는 주전 선수들을 철저히 아꼈다. EPL 경기를 포기하고 주전들의 체력과 컨디션을 챔피언스리그에 맞춰 끌어올렸다. 그의 이 전략은 챔피언스리그 경기 직전 열린 EPL 경기에서는 패하거나 비기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반대로 EPL 경기에서 비기거나 진 뒤 며칠 후 바로 벌어진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는 어김없이 승리를 잡아냈다. 9월 11일 EPL에서 리버풀에 4 대 1로 졌지만, 4일 뒤인 9월 15일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브뤼헤를 3 대 0으로 격파했다. 또 9월 24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4 대 1로 졌지만, 4일 후인 9월 28일 포르투갈의 강팀 FC 포르투를 1 대 0으로 격파했다. 10월 15일 첼시에 3 대 0으로 지고 3일 뒤 18일 챔피언스리그에서 코펜하겐을 1 대 0으로 잡았다. 이 패턴이 지금까지 계속됐다.

11월 22일 브뤼헤를 꺾고 챔피언스리그 16강을 확정한 후 라니에리는 “13위로 처져 있는 EPL도 이제 신경을 쓸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그가 실제 챔피언스리그보다 EPL에 집중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챔피언스리그 16강은 토너먼트다. 16강 진출 팀이 모두 결정되면 조별 1위와 2위 팀을 구분해 추첨으로 상대를 결정한다. 조 1위를 확정했기 때문에 다른 조 2위와 16강을 벌인다. 운이 더해져 독일 바이엘 레버쿠젠 정도를 만나면 8강 가능성도 높다. 여우인 라니에리 감독의 머릿속에는 이미 챔피언스리그 8강이 그려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조동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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