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준환과 함께 한국을 찾은 브라이언 오서 코치. 지난 1월 5일 강릉아이스아레나에서 차준환의 공식 연습을 기다리고 있다. ⓒphoto 하주희
차준환과 함께 한국을 찾은 브라이언 오서 코치. 지난 1월 5일 강릉아이스아레나에서 차준환의 공식 연습을 기다리고 있다. ⓒphoto 하주희

서울에서 차로 두 시간 반을 달리면 동계올림픽 도시에 닿는다. 지난 1월 5일 찾은 강원도 강릉은 올림픽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도로변 곳곳엔 올림픽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고, 여기저기에서는 고층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다. 선수촌과 미디어촌으로 쓰일 곳이다. 평창올림픽은 강릉, 평창, 정선 일대에 흩어져 있는 12개 경기장에서 치러진다. 강릉에서는 피겨스케이팅과 쇼트트랙 경기가 열린다.

기자가 강릉을 찾은 것은 피겨 코치 브라이언 오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1월 6일부터 1월 8일까지 강릉아이스아레나에서 제71회 전국남녀 피겨스케이팅 종합선수권대회가 열렸다. 김연아 이후 차츰 대중의 관심 대상에서 벗어난 피겨대회가 다시 들썩였다. 기대주의 등장 때문이다. 열여섯 살 차준환은 한국 남자 피겨의 새 역사를 쓸 유망주로 떠올랐다. 차준환은 철저히 김연아와 같은 훈련 코스를 밟고 있다. 2015년부터 오서 코치의 캐나다 토론토 훈련 캠프에 합류해 맹훈련 중이다.

오서 코치가 묵고 있는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쉰여섯 살의 중후한 모습 위에 7년 전 모습이 겹쳐 보였다. 밴쿠버올림픽 메달 시상식이 끝난 후였다. 취재진과 연맹 관계자가 없는 링크 뒤편에서 피겨 여왕은 오서의 목에 자신의 금메달을 걸어줬다. 오서의 눈은 붉어졌었다.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근방의 카페로 이동했다. 기사를 위해 만났지만 사실 정식 인터뷰를 하기엔 겸연쩍었다. 기자는 브라이언 오서와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다. 밴쿠버올림픽을 앞두고 캐나다 토론토에서 훈련을 하던 김연아와 함께 머무르며 오서의 코칭스타일을 지켜볼 수 있었다. 2009년, 벌써 8년 전이다. 김연아는 오서의 첫 제자였다. 오서가 선수 생활을 접고 코치 생활을 시작한 계기도 김연아였고, 지도자로서 최고의 기쁨을 맛보게 한 것도 김연아였다. 두 사람의 마지막은 전 국민, 아니 세계 피겨인들에게 실시간 중계되며 좋지 않게 끝났다. 김연아가 선수 생활을 이어갈지 그만둘지 불확실한 상황이었고, 오서는 아사다 마오를 맡아달라는 일본 연맹의 요청을 수락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의사소통이 잘 안 돼서 오해가 쌓여갔고, 금전 문제 등 여러 문제가 겹치며 급기야 양측이 공개적으로 성명을 내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당시 캐나다 방송에서 이들의 갈등을 뉴스로 다루기도 했다.

김연아와 결별한 이후에도 오서는 한국을 정기적으로 찾았다. 지도하는 선수와 함께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거의 매년 한국에 왔다. 오서와 함께 서울의 식당이나 카페 등지에 들어설 때마다 오서를 알아본 사람들의 반응은 대략 세 가지였다. 반가워하거나, 일행과 수군거리거나, 의구심 깃든 눈으로 본다. 한국인들은 아직도 오서 코치에게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서 코치의 근황은 묻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오서는 상당히 정돈된 패턴으로 일상을 꾸려가는 사람이다. 집, 크리켓클럽, 경기장을 오가며 선수들을 가르치고 틈틈이 친구들을 만날 터다. 차준환의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다는 것도 이미 오서에게 종종 들어 알고 있었다. 지난해 여름 차준환이 쿼드살코(4회전 점프)를 훌륭하게 뛰었다며 자축의 메시지를 전해오기도 했다. 오서가 아직 어린 차준환을 김연아와 하뉴 유즈루의 뒤를 이을 수도 있는 유망주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차준환이 지난 1월 8일 강릉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제71회 전국 남녀 피겨스케이팅 종합선수권대회에서 프리스케이팅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photo 뉴시스
차준환이 지난 1월 8일 강릉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제71회 전국 남녀 피겨스케이팅 종합선수권대회에서 프리스케이팅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photo 뉴시스

정상급 선수의 심리에 정통

지난 8년 동안 오서 코치는 세계 정상급 피겨 지도자로 발전했다. 남자 피겨 세계 랭킹 1, 2위에 있는 선수 둘 다 오서의 지도를 받고 있다. 소치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하뉴 유즈루(23·일본)와 2015년과 2016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 하비에르 페르난데스(26·스페인)다. 경쟁 관계의 선수가 한 지도자 아래 한 링크에서 생활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오서 캠프는 어떻게 해서 세계 최고를 잇따라 배출할까, 의문이 떠올랐다. 외부 요소에 신경 쓰지 않고 선수가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점, 이것이 기자가 생각하는 브라이언 오서 리더십의 첫 번째 특징이다.

오서 코치가 선수들을 가르치는 토론토 크리켓클럽은 회원제 스포츠클럽이다. 피겨 링크와 컬링 링크를 포함해 웨이트 운동을 할 수 있는 시설 등을 갖췄다. 회비가 상당하기 때문에 토론토에서도 비교적 상류층이 드나든다. 출입카드가 없는 외부인은 아예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내부엔 고급 레스토랑도 있다. 전체 분위기는 서울 남산자락의 서울클럽과 상당히 비슷하다. 직원들과 회원들은 오서의 제자들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봐준다. 한번은 주차장에서 김연아 선수의 차량이 다른 회원의 차를 가볍게 친 적이 있다. 링크에서 훈련하는 선수의 차량에 받혔다는 걸 알자, 손사래를 치며 신경쓰지 말고 얼른 들어가 훈련에 집중하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회원들은 김연아의 올림픽 출전을 앞두고 힘내라고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선수가 새로운 시즌을 준비할 때는 안무가와 의상 디자이너들이 클럽으로 찾아온다. 대개 오서의 지인들이다. 김연아의 안무를 담당했던 데이비드 윌슨이 대표적이다. 긴 시간 국가대표였던 오서 코치의 경험과 네트워크가 만나, 선수는 링크에서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스템이 조성됐다.

피겨는 승부나 기록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경기가 아니다. PCS라 불리는 표현 점수가 있기 때문이다. 심판의 주관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 채점 논란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선수나 지도자의 인지도에 따라 점수가 달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피겨계에서는 ‘코치만 바뀌어도 PCS가 달라진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키스앤크라이존에 앉기만 해도 PCS가 올라가는 세계 정상급 코치가 되려면 링크 뒤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공학에 능숙하게 대처해야 한다. 키스앤크라이존은 선수가 자신의 연기를 마친 후 코치와 함께 앉아 점수가 나오길 기다리는 구역을 뜻한다. 기자가 지켜본 바로는 선수가 치르는 링크 위의 게임과 지도자와 해당국가의 연맹이 출전하는 링크 밖의 게임 모두에서 이겨야 올림픽 금메달이 가능하다.

차준환은 오서와 함께 훈련을 계속하는 한 크리켓클럽이라는 안정된 환경에서 스케이팅에만 집중하며 (최소한) 두 번의 올림픽을 치러낼 것이다.

오서 코치와 차준환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맹훈련 중이다. ⓒphoto 뉴시스
오서 코치와 차준환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맹훈련 중이다. ⓒphoto 뉴시스

오서 코치의 두 번째 특징은 정상급 선수의 심리에 정통하다는 점이다. 리더의 유형엔 여러 가지가 있다. 아랫사람이 그가 가진 최선을 발휘하도록 북돋아주는 유형이 있고, 다그쳐서 실력을 향상시키는 유형이 있다. 오서는 전자다. 김연아나 하뉴 등 동아시아 선수들이 오서의 지도 아래 좋은 성과를 내는 것도 그 때문일 터다. 코치 자신이 오랫동안 정상급 선수였기 때문에 톱 수준의 선수가 겪는 내적 갈등과 애로사항에 정통하다. 사실 어느 수준 이상에 오른 선수에게는 웬만한 사람이 건네는 칭찬이나 지적은 별로 와닿지 않는다. 기분만 상할 공산이 크다. 역효과다. 정상급 선수에게는 기술적인 지적보다 심리 조절이 더 긴요하다. 오서 코치가 김연아나 아담 리폰(미국 국가대표)을 지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 점이다. 잘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한번 끄덕이기만 해도 서로의 의도를 알아듣는다. 질책은 짧고 분명하게 한다.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가 한번 화를 내면 무서운 법이다.

오서 코치는 차준환을 이미 정상급 선수가 될 수 있는 재목으로 판단했다. 김연아와 그런 일을 겪은 뒤 한국선수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했지만 차준환만은 예외적으로 받아들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오서는 기자에게 “차준환의 성장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뉴나 하비에르의 지도를 잠시 뒤로하고, 국제 경기도 아닌 국내 선발전에 차준환과 동행하는 모습을 보고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서는 또 “준환이 현재의 인기에 너무 들뜨지 않도록 지도하려 한다”는 말도 했다.

세 번째 특징은 네트워크다. 오서 코치는 자신이 혼자 할 수 있는 일과 다른 사람과 나눠서 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을 구별하는 데 능하다. 트레이시 윌슨, 데이비드 윌슨 등과 함께 팀으로 움직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피겨에는 점프 말고도 스케이팅, 표현기술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있다. 각 전공과목별로 우수한 코치들이 나눠서 지도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국제대회에 나가면 오서의 네트워크가 빛을 발한다. 대회장 뒤편에는 세계 각국 연맹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 간다. 각국 주요 선수들의 몸 상태와 각 훈련 캠프별 변화상이 빠르게 업데이트된다. 기자는 처음 피겨 대회에 갔을 때 대회장 뒤편 어떤 모습에 놀란 적이 있다. 바로 선수 대기실 풍경 때문이었다. 한 개의 로커룸에 모든 선수가 모여 앉아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한다. 물론 남녀 대기실은 구분되어 있다. 각 연맹 관계자가 대기실을 들락거리며 선수를 도왔다.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한·일 라이벌 구도가 한창인 시기였다. 일본 연맹 관계자들은 여러 명이 로커룸을 들락거리며 마오를 돌봤다. 보통 선수라면 그 모습에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오서는 주요 나라의 연맹과 심판진들, 코치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가 경기 직전 심판진들과 안부인사를 나누며 “내가 가르치는 선수가 요즘 컨디션이 아주 좋고, 실력이 이만큼 향상했다”고 자연스럽게 어필하는 게 점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진 않을 터다.

오서 코치는 지난해 여름에도 차준환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 당시에도 국내 경기였다. 오서는 경기가 끝난 직후 한국인 심판들을 찾아갔다. 차준환이 어떤 면에서 좀 더 개선이 필요한지 각 심판들의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다. 오서 코치가 그걸 정말 몰라서 심판진들을 만난 걸까.

차준환의 공식 연습을 지켜보기 위해 함께 강릉아이스아레나로 이동했다. 차준환이 몸을 푸는 모습을 지켜보는 오서를 뒤로하고 경기장을 나섰다. 김연아와 오서, 두 사람의 인연은 선연일까 악연일까. 오서 코치를 만날 때마다 문득 드는 의문이다. 남자 싱글 경기는 싱겁게 끝났다. 차준환의 압도적 우승이었다. 종합점수 238.07, 종합선수권대회 사상 최고점을 기록했다. 이미 과녘은 세계 정상급 수준으로 맞춰졌다. 오서는 평창올림픽에서 차준환이 어떤 성적을 올릴지 예측하길 꺼려했다. 어떤 대답도 자칫하면 선수에게 불필요한 심리적 압박을 줄 수 있다. 기자와 사적으로 주고받은 예측을 기사에 쓸 수 없는 이유다. 김연아와 오서의 인연은 흐르고 흘러 차준환이라는 선수에게까지 닿았다. 이제부터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기대된다.

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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