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롯데 이대호 photo 연합 / 삼성 이승엽 photo 스포츠조선 / KIA 최형우 photo 연합
(왼쪽부터) 롯데 이대호 photo 연합 / 삼성 이승엽 photo 스포츠조선 / KIA 최형우 photo 연합

기나긴 겨울 추위에 옷깃을 여미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봄이다. 야구 팬들은 아직 녹색으로 물들지 않은 다이아몬드 모양 그라운드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타구음을 통해 봄을 느낀다.

한국프로야구, KBO리그가 3월 31일 36번째 막을 연다. 한국 야구는 그동안 시즌을 거듭하면서 인기 가도를 달려왔다. 지난해엔 정규시즌 800만명을 넘어 833만9577명이 직접 야구장을 찾아 야구가 선사하는 재미에 흠뻑 빠져들었다. 국내 프로스포츠 최고의 히트작으로 자리 잡은 KBO리그는 올해도 그라운드에 각본 없는 ‘스토리 야구’로 팬들 앞에 선다. 어떤 주인공들이 KBO ‘시즌 36’의 최대 인기몰이를 할까.

굿바이 이승엽!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데 두 번 바뀌는 동안에도 KBO리그 주연배우 리스트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선수가 있다. 바로 ‘국민타자’ 이승엽(41). 이미 유니폼을 벗고 지도자의 길을 걷는 후배가 있는데 그는 여전히 그라운드에 서 있다. 지난해 그는 142경기에 출전해 타율 0.303, 27홈런 118타점을 올렸다. 애석하게도 국내 야구팬들은 올 시즌을 끝으로 이승엽의 호쾌한 스윙을 더는 지켜볼 수 없다. 이승엽이 올 시즌을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쇠락을 거듭하던 국내 야구는 1995년 프로 무대에 발을 내디딘 이승엽의 존재와 함께 급성장 가도를 달렸다. 이승엽은 1995년 삼성 유니폼을 입고 데뷔한 이후 5년째인 1999년 국내 최초 50홈런 타자로 이름을 올렸다. 2003년에는 한 시즌 56홈런으로 당시 아시아 한 시즌 최다홈런 신기록을 세웠다. 그의 그칠 줄 모르는 홈런 행진에 팬들의 발길이 다시 야구장으로 몰렸고, 그의 홈런 볼을 잡기 위해 ‘잠자리채’가 등장했다.

그는 삼성의 간판타자로 나서 2000년 팀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됐고, 2006년과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결정적인 홈런을 터뜨리며 한국을 세계 야구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국민타자’란 칭호를 얻은 그는 일본 무대에서 8년을 보낸 뒤 2012년 국내에 복귀했고, 변함없이 매섭게 방망이를 돌렸다.

22년 프로인생 마감을 앞둔 이승엽은 지난해까지 KBO리그에서 2024안타 443홈런 1411타점 1290득점을 올렸다. 중간에 8시즌 동안 일본 무대에서 뛰면서도 통산 홈런 및 타점 1위에 올라 있다. 득점과 2루타 부문 1위 정복도 시간 문제다.

이승엽은 지난 시즌이 끝나고 “올해 홈런 스윙으로 바꾸겠다”고 공언했다. “이승엽 하면 역시 홈런”이란 팬들의 기대감에 부응하겠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한국 프로야구사에 큰 흔적을 남긴 영웅에 대한 작별인사는 벌써 시작됐다. 시범경기임에도 그에게 사인을 받으려는 팬들의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 KBO와 각 구단들은 ‘이승엽 은퇴 투어’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 고민 중이다.

이승엽은 아직도 자신의 은퇴가 실감이 나지 않는 듯 ‘잠자리에 누워 은퇴식을 떠올려 보지만,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는다”며 애써 웃음 짓는다. 하지만 이승엽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잘 아는 팬들이 그를 그냥 허무하게 떠나보낼 리 없다. 2017 한국 프로야구의 최대 화두 중 하나는 ‘이승엽과 멋지게 이별하기’다.

100억원의 사나이, 이대호와 최형우

지난해 11월 초 한국 프로야구 FA 시장은 삼성의 거포 최형우(34)가 터뜨린 ‘대박’ 계약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동안 수십 차례 FA 계약 속에서도 아무도 열려고 하지 않았던 ‘100억원’의 벽이 최형우의 한 방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4년간 100억원. 계약금 40억원을 빼고도 매 시즌 15억원을 거머쥐는 최형우의 계약은 2015시즌 후 FA로 삼성에서 NC로 이적한 박석민의 4년 최대 96억원을 넘어선 역대 최고액이다.

30대 초반, 힘이 여전히 넘치는 나이인 그는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9시즌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때렸다. 최근 4년간 홈런이 124개. 시즌당 31개의 타구를 담장 밖으로 넘겼다. 3할대 타율에 중장거리포까지 장착한 그가 KBO리그 최고 타자 중 하나라는 데 이견이 없다.

최형우는 지난해 타율 0.376, 31홈런 144타점을 올렸다. 그는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지난해엔 내가 봐도 미친 것 같아요. 그런 성적을 어떻게 또 올립니까?”

최형우는 각종 인터뷰 때마다 먼저 ‘본전’이나 마찬가지인 3할 30홈런 100타점을 목표로 내세운다. 일단 1차 목표를 달성한 후 그 다음 목표를 세울 것이라는 얘기였다.

최형우가 힘겹게 이룬 ‘100억원’은 올해 초 이대호(35)가 롯데로 복귀하면서 가볍게 깨졌다. 이대호는 4년간 150억원, 최형우보다 50억원 더 많은 금액으로 KBO리그에 복귀했다. 계약금 50억원을 빼더라도 연간 25억원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이대호는 2010년 전무후무한 타격 7관왕에 오른 후 해외 무대에 진출했다. 국내에서 이룰 것은 다 이루자 또 다른 도전을 위해 일본 무대에 진출했고, 2015시즌 소속팀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정상으로 끌어올리면서 챔피언전인 재팬시리즈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2016년엔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해 평생 꿈인 메이저리그에 도전했다. 상대적으로 많은 나이에, 뒤늦게 입단하면서 좁아진 입지 등 악조건 속에서도 파워가 가미된 정확한 스윙을 해 메이저리그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일본과 미국에서 여전히 관심을 보였지만, 롯데 복귀를 결정하면서 ‘외로운 외국 생활을 하면서도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롯데 팬들의 응원이 그리웠다”고 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5년간의 공백과는 무관하게 이대호가 리그에서 강력한 충격파를 던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본과 미국 야구는 국내보다 수준이 높다. 투수들의 공 스피드가 150㎞는 가볍게 넘어서고, 제구력은 한 치 오차 없는 컴퓨터같이 정확하다. 그런 무대에서 5시즌을 보내며 그의 실력이 더욱 업그레이드됐다고 보고 있다.

이대호와 최형우가 100억원 넘는 몸값에 준하는 활약을 펼치면 올 KBO리그는 흥행 대박을 예감해도 좋다. 두 선수가 속한 롯데(이대호)와 KIA(최형우)는 대표적인 영·호남 라이벌이다. 두 팀이 좋은 성적을 내면 야구장에 구름 같은 관중이 몰려들었다. 지난해 관중 기록을 뛰어넘어 올해 900만명도 가능할 수 있다. 특히 이대호가 롯데 유니폼을 입자 홈구장인 사직야구장이 시범경기 임에도 주말에 5000~7000명의 관중이 몰렸다.

(왼쪽부터) SK 트레이 힐만 감독 photo 연합 / 삼성 김한수 감독 photo 스포츠조선 / 넥센 장정석 감독 photo 스포츠조선 / KT 김진욱 감독 photo 스포츠조선
(왼쪽부터) SK 트레이 힐만 감독 photo 연합 / 삼성 김한수 감독 photo 스포츠조선 / 넥센 장정석 감독 photo 스포츠조선 / KT 김진욱 감독 photo 스포츠조선

두산의 판타스틱 4, 올해도?

영원할 것 같던 삼성 왕조가 몰락한 게 엊그제 같은데 또 하나의 왕조가 잠실벌에서 꿈틀댄다. 원년 우승팀 두산은 2015·2016년 두 시즌 연속 챔피언에 올랐다. 2015시즌은 해외 원정 도박 파문이 터진 삼성이 전력을 풀가동하지 못하는 반사이익을 얻으며 우승했지만, 2016시즌은 완벽한 통합 우승을 이끌어냈다.

두산의 우승 원동력은 여러 가지다. 주전이 부상 등으로 빠져도 그 자리를 거뜬히 메우는 ‘화수분 야구’는 김재환·박건우 등을 스타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다른 팀보다 더 두드러진 것은 바로 마운드, 선발투수였다.

두산은 지난 시즌 에이스인 더스틴 니퍼트를 비롯해 마이클 보우덴, 장원준, 유희관 등 4명의 선발투수가 시즌 93승 중 70승을 합작했다. 지난해 KBO리그 유일한 2점대 평균자책점(2.95)을 올린 니퍼트가 22승(3패)을 거뒀고, 보우덴(18승7패, 3.80), 장원준(15승6패, 3.32), 유희관(15승6패, 4.41) 등이 투수 다승 1, 2, 공동 3위를 휩쓸었다. 두산은 이들의 위력적인 투구를 발판 삼아 선발투수들의 승리, 평균자책, 투구이닝, 탈삼진, 퀄리티스타트(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 투구) 등에서 모두 1위에 올랐다. 두산은 올해 2015년 입단한 함덕주가 스프링캠프부터 뛰어난 구위를 뽐내며 ‘판타스틱 4’를 뒤받칠 제5선발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함덕주가 코칭스태프의 기대에 부응한다면 두산은 올해 ‘판타스틱 5’로 업그레이드돼 3년 연속 우승을 노려볼 만하다.

하지만 이를 다른 팀들이 가만 보고 있을 리 없다. 두산과 잠실야구장을 쓰는 라이벌 LG는 삼성에서 FA로 영입한 차우찬이 기존 데이비드 허프, 헨리 소사, 류제국과 함께 두산에 필적할 만한 선발진을 구축했다. LG 팬들은 벌써 이들을 ‘어벤저스’로 부르며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KIA 역시 두산의 아성을 깰 수 있는 전력을 갖췄다. 해외 진출 꿈을 접은 양현종이 건재하고, 팻 딘과 헥터 노에시 등 외국인 투수로 짜인 선발진이 좋은 데다 최형우가 타선에 가세하면서 방망이에 힘이 생겼다. 올해 재기 가능성을 높였던 김진우가 시범경기에서 갈비뼈 부상을 입고 시즌을 팀과 함께 시작하지 못하는 게 변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지난해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은 NC와 재임 마지막 시즌을 맞이한 김성근 감독이 벼랑 끝 지휘술을 펼칠 한화도 다크호스다.

실패는 변화를 요구한다. 올해는 10개 팀 사령탑 중 4팀이 새 얼굴이다. SK는 김용희 감독이 퇴진한 공백을 외국인인 트레이 힐만으로 메웠다. 힐만은 미국인이지만, 일본 니혼햄 파이터스 지휘봉을 잡아 재팬시리즈 우승을 일구는 등 세밀한 아시아 야구 스타일에 익숙하다. 또 1군뿐 아니라 잠재력 있는 유망주 육성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세대교체가 시급한 SK에 적합한 인물이란 기대다. 넥센을 강팀으로 끌어올린 지략가 염경엽 전 감독이 단장으로 취임한 것도 SK의 미래를 밝게 해준다. 단기간에 그 결실이 나올지는 지켜봐야 한다.

해외 원정 도박 파문에 발목이 잡혀 왕조 몰락을 자초했던 삼성도 김한수 코치를 감독으로 승격시키며 분위기 전환을 꾀했다. 김한수 감독은 그동안 삼성 야구의 상징 중 하나였던 홈런과 불펜 야구 대신 기동력의 야구로 색깔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넥센은 선수 출신으로 프런트 생활을 오래했던 장정석 전 운영팀장에게 팀 운명을 맡겼다. 그가 ‘염갈량’이란 칭호까지 얻은 염경엽 전 감독 못지않은 용병술을 발휘할지 관심이다.

3번째 시즌에 돌입한 KT는 ‘덕장’ 김진욱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2년 연속 최하위로 패배의식에 젖은 어린 선수를 다독이기엔 그만 한 인물이 없다. 김 감독은 “졌을 때도 하이파이브를 하겠다”며 선수들의 기 살리기에 나섰다. 김 감독은 사생활 문제로 징계를 당했던 장성우에게도 “이젠 팬들 앞에 나설 때가 됐다”며 혹시 일어날지 모를 비판적 여론이나 팬들의 비난을 정면으로 헤쳐나갈 뜻을 밝히는 강한 심지도 드러냈다.

새로 선을 보일 신인 중에선 현재까지 넥센의 이정후, 삼성 최지광의 활약이 눈길을 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바람의 아들’ 이종범(현 프로야구 해설위원)의 아들인 이정후는 아버지처럼 빠른 발과 정확한 타격 능력을 지녔다. 시범경기 4할대로 눈도장을 찍은 그가 정규시즌 때도 기대대로 활약하면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다. 부산고 출신으로 삼성이 신인 1라운드에서 지명한 최지광은 벌써 5선발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기대를 한 몸에 받는다. 직구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몸쪽 승부를 과감하게 펼치는 배짱을 지녔다.

이밖에 삼성 투수 장지훈(경주고 졸업), 두산 투수 박치국(제물포고 졸업) 등이 눈길을 끈다. 가장 관심이 컸던 롯데의 1라운드 지명선수 윤성빈(부산고 졸업, 투수)은 어깨 이상으로 재활 및 보강 치료를 결정해 시즌을 일찌감치 마감했다.

야구공은 둥글다. 그리고 108개 실밥 수만큼 그라운드에 수많은 변화를 일으킨다. 전례로 보듯 전문가들의 시즌 예상이 100% 맞아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10개 구단 팬들은 설렘 반 기대 반 심정으로 ‘플레이 볼’을 기다린다.

강호철 조선일보 스포츠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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