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임원으로 재직할 때 있었던 이야기다. 금요일 오후 사장에게서 호출이 왔다. “내일 별일 없으면 같이 운동하러 가자고.”

골프 부킹과 멤버 구성은 거의 한 달 전에 끝나므로 하루 전에 제의를 한다는 것은 멤버 중 한 명이 갑작스러운 사정이 생겨 펑크가 났기 때문이다. 다음날 친구들과 라운드가 예정돼 있었으나 내 입에서는 “아, 별일 없습니다. 같이 가시죠”라고 자연스러운 대답이 나왔다.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빠질 수 있었으나 그러면 사장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어 거짓말을 한 것이다. 만약 내가 불참했다면 3명이 느슨한 플레이를 하며 매우 아쉬워했을 건 뻔한 일이다. 사장은 나를 원망했을 테고.

이번엔 나의 고교 동창 경우다. 토요일 아침 지인들과의 라운드를 위해 집을 나서려는데, 회사의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말에 집에서 뭐 해? 같이 운동이나 하자고.” 이렇게 해서 동창의 지인들은 애꿎게 세 사람이 골프를 쳤다. 조직사회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인사권을 쥔 사장과 회장이 부르면 만사를 제치고 합류해야 한다.

이것뿐만 아니다. 라운드 전후에도 상사(사장)를 잘 모셔야 한다. 골프장 도착해서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식당으로 달려가 메뉴가 어떤 게 있는지 살펴보고 식당 매니저에게 가장 잘하는 음식을 추천받아 놔야 한다. 비서에게 사장이 뭘 좋아하는지를 미리 체크해 놓으면 금상첨화. 식사 후엔 골프숍에 들러 모든 골퍼들이 선호하는 A사 제품의 공을 구입해 골프백에 비치한다.

라운드 시작 전에는 캐디에게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저분(사장)에게만 상세히 코스와 그린 컨디션을 잘 설명해주면 돼”라며 슬쩍 팁을 찔러준다. 내기는 사장의 핸디캡에 맞춰, 가능한 사장이 유리한 방법을 택한다. 사장이 룰에 까다로운지, 후한 편인지도 재빨리 간파해야 한다. 룰에 까다로울 경우 디보트에서 구제 없이 그대로 치거나, 워터해저드에 빠졌을 때는 1벌타로 (드라이버) 2클럽 이내 공을 드롭하는 등 규칙을 웬만큼 준수해야 한다.

반대로 느슨한 편이라면 OB 났을 때 수시로 멀리건을 주고, 카트 도로에 공이 떨어졌을 경우 페어웨이로 던져 주는 등 최대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안 그러면 “이 친구, 일은 않고 쓸데없이 룰 공부만 했구먼”이라는 핀잔을 듣게 된다. 사장의 공이 깊은 러프에 빠졌을 때는 잽싸게 낙하 지점으로 가 폭발물을 찾아내듯이 뒤져 반드시 공을 찾아내야 한다.

그린에 올라가서는 “남에게는 관대하게, 자신에게는 엄격하게”라는 골프 격언을 100% 실천해 퍼트 OK(기브)를 넉넉히 줘야 한다. 만약 내기에서 본의 아니게 따고 있다면 16번 홀쯤에서 방향을 살짝 틀어 OB를 내 사장을 흐뭇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골프 끝나고서 바쁜 건 마찬가지. 빨리 샤워를 마치고 클럽하우스로 뛰어가 미리 알아둔 사장의 선호 메뉴를 주문해놓아야 한다. 사장이 오자마자 기다리지 않고 맛있게 들 수 있도록 하는 게 상사 접대의 비법이다.

김수인 골프칼럼니스트·전 스포츠조선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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