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3일 ‘OK저축은행 박세리 인비테이셔널’ 대회에 출전한 최나연이 티샷을 날리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9월 23일 ‘OK저축은행 박세리 인비테이셔널’ 대회에 출전한 최나연이 티샷을 날리고 있다. ⓒphoto 뉴시스

‘여기에도 최나연 선수 팬이 있습니다. 요즘 왜 이리 소식이 없나 무척 궁금했습니다. 건강하게 부상 없이 마음 편한 경기 하기 바랍니다.’

최근 3년 만에 국내 대회에 출전한 프로골퍼 최나연(30)의 소식을 ‘171위까지 떨어진 최나연, 오랜만에 듣는 응원 소리에 울컥’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전하자 한 팬이 마음을 담아 위와 같은 댓글을 올렸다.

극심한 슬럼프에 빠져 성적을 내지 못하는 최나연 관련 뉴스는 말 그대로 ‘가뭄에 콩 나듯’ 하고, 중계 화면에도 좀처럼 잡히는 일이 없자 ‘최나연 어디 갔냐’며 궁금해 하는 팬들이 많았다. 최나연은 지난 9월 22일부터 사흘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OK저축은행 박세리 인비테이셔널’(경기도 양주 레이크우드CC)에 출전했다. 지독한 슬럼프와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최나연은 “이름을 불러주며 응원해주시는 팬들을 보며 울컥하는 감정이 솟았다”며 “이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라운드를 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고1 때 프로 대회에서 우승하며 ‘얼짱 골퍼’로 유명해진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여자 골퍼 중 한 명이었던 그는 지금 바닥을 모르는 추락 중이다. 지난 대회 171위였던 세계 랭킹은 며칠 새 175위(9월 25일 기준)로 더 떨어졌다. 세계 랭킹 2위까지 올랐었고 LPGA에서 9승을 올린 그는 올 시즌 17개 대회에서 상금 3만3743달러(140위)를 벌어들이는 데 그쳤다. 그의 통산 상금은 1071만달러다.

그는 대회에 나서기 사흘 전 골프화에 ‘고맙습니다’라고 큼지막하게 적어 넣었다. 골판지에 매직으로 수십 차례 글자를 연습해 보고는 직접 골프화에 적었다고 한다. 이렇게 준비를 꼼꼼히 하고 만족스러울 때까지 연습을 한 뒤에야 ‘실전’에 들어가는 것이 최나연 스타일이다. 이런 완벽주의가 어쩌면 그를 더욱 더 지독한 슬럼프의 늪으로 밀어넣었는지도 모른다.

최나연의 말이다. “그동안 성적이 좋지 않으니 미국 투어에서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외롭게 경기했어요. 국내에 오면 성적과 관계없이 응원해주는 분들이 있다는 게 너무 고마웠어요. 내 이름을 불러주면서 응원하는 팬들과 함께 이 슬럼프를 이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대회에 출전했어요.”

최나연은 3년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선수 설문 조사에서 ‘스윙이 가장 좋은 선수’로 꼽힐 정도로 탄탄한 기본을 갖춘 선수다. 그런데 이런 최나연이 어쩌다 한 라운드에 OB(아웃오브바운즈)를 네다섯 번 내고 툭하면 주말골퍼처럼 80대 타수를 치게 된 것일까. 슬럼프는 그가 가장 최근에 우승한 2015년 6월 아칸소챔피언십에서 싹이 텄다고 한다.

“아칸소 1라운드 때 우천 연기가 5~6시간 있었어요. 그때 너무 안 좋은 자세로 오래 있었던 거예요. 우승은 했지만 바로 다음 주에 열린 마라톤클래식에 갔다가 허리가 아파서 기권했어요. 제가 중학교 때부터 척추측만증이 있어서 일찌감치 체력훈련으로 통증을 관리했었거든요. US여자오픈 때는 허리가 아픈 상태로 경기를 했는데 브리티시여자오픈 때는 증상이 심해져서 허리도 못 구부렸어요. 캐디가 티를 꽂아주고 공도 올려주는 식으로 계속 쳤어요. 동반자 캐디가 LPGA투어 선수 출신인데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저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최나연은 “미련한 소리라고 하겠지만 라운드를 일단 시작했으면 어떻게든 마치는 게 선수의 도리라고 생각했어요”라고 했다.

최나연의 골프화. ⓒphoto 민학수
최나연의 골프화. ⓒphoto 민학수

최나연의 노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고지식한’ 태도가 몸상태를 악화시키고 일시적 부진으로 끝낼 수 있던 상황을 극심한 슬럼프로 만들었다.

그는 허리 치료를 받고도 한동안 날카로운 신경 통증을 임팩트 때마다 느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통증이 없어진 뒤에도 두려움 때문에 ‘반대 동작’(부상 부위를 보호하기 위한 보상작용 동작)을 하게 됐다.

이런 기간이 지속되면서 ‘최고’라 평가받던 스윙이 엉망이 된 것이다. 투어 선수들은 실수를 해도 한쪽 방향으로 하면 어느 정도 스코어를 관리할 수 있다. 그런데 드라이버 OB가 왼쪽으로도 나고 오른쪽으로도 나는 최악의 상황에 빠진 것이다. 그는 지난해 이렇게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대회 출전을 강행했다. 하루빨리 경기 감각을 회복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럴수록 슬럼프의 늪으로 더 깊이 빠져들어갔다. 당시 심경을 최나연은 이렇게 말했다.

“대회 때 떨리든 안 떨리든 시간은 흘러가더라고요. 그냥 걸어가서 치고 있어요. 쳐야 하니까. 정신은 어디 있는지 아예 모르겠고요. 그러다 보니 라운드가 끝나면 항상 후회했어요. 저에게 가장 힘든 건 이것들이었어요. 단 한 번의 스윙도 연습장에서 하던 스윙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하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힘을 주려고 해도 다리에 힘이 빠진다는 것, 백스윙을 들면 갑자기 정신이 방에 불 끄듯이 꺼져버리니까요.”

그는 친구 박인비가 부러웠다고 한다. “저하고 인비는 성격이 달라요. 인비는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거든요. 인비 성격이었다면 스트레스를 덜 받았을 거예요. 인비에게 ‘나 골프 안 된다’ 신세 한탄하면 인비가 그래요. ‘그냥 쳐.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라고요.” 최나연은 “뭘 하나 해도 남들이 10가지 생각하면 저는 50가지를 챙겨야 만족하는 성격이에요. 저에겐 제가 만들어 놓은 ‘최나연은 이렇게 해야 해’ 하는 기준이 있어요. 그런데 이런 마음을 내려놓기가 정말 힘들더라고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와서 보니 친구 (김)송이가 슬럼프로 어려울 때 ‘타깃을 보고 경기 하기 힘들다’며 아파하던 것을 제대로 공감하지 못했던 게 마음에 사무친다”고도 했다.

최나연의 부모와 주변에선 힘겹게 미국 투어 생활을 이어가는 그에게 한국으로 복귀하거나 일본 투어로 옮길 것을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 무대에서 제대로 슬럼프를 이겨내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나연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상황이 되니까 감정기복이 심해져서 바늘 하나 찌르면 저는 죽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골프 명예의전당 회원인 베스 대니얼(61)과 멕 말론(54) 같은 미국의 대선수들이 저를 잘 봤는지 도와주겠다고 대회 갤러리까지 해줬어요. 정신적으로 큰 위안이 됐지요. 제가 미국 선수는 아니지만 TV로 제 경기를 보면서 너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해요. LPGA에서 33승을 한 대니얼은 ‘난 서른 살에 최고의 시즌을 맞았다’고 했고, 말론은 ‘내가 두 번째 US여자오픈을 우승한 게 마흔두 살’이라고 했어요. 한국 선수들은 28세만 되면 피크타임이 끝난다고들 하는데 끝까지 오래 남는 선수가 됐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하고요.”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는 체력훈련과 심리 상담을 통해 점점 더 밝은 모습을 되찾고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 대회 때 땅만 쳐다보던 그가 이번 대회에는 팬들과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감이 극도로 떨어진 상황에서는 이런 사소해 보이는 행동도 굉장한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에게 ‘골프를 그만둔다면 이런 어려움도 없지 않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의 말이다. “이런 생활이 좋아요. 매일매일 배우고 느끼는 게요. 골프를 그만두면 이렇게 살 수는 없어요. 선수로서 이렇게 경쟁하는 느낌이 저를 살아 있게 하죠. 그것들 없이는 살 수 없어요. 최나연의 노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4년간의 슬럼프를 이겨낸 박인비와, ‘30㎝ 퍼팅 실수의 악몽’을 극복하고 메이저 챔피언이 된 김인경은 그와 골프를 함께 시작했던 친구들이다.

민학수 조선일보 스포츠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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