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관광객이 거북이 모양의 바위를 끌어안고 있다. ⓒphoto 이경민 조선영상미디어 객원기자
한 관광객이 거북이 모양의 바위를 끌어안고 있다. ⓒphoto 이경민 조선영상미디어 객원기자

풍수(風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도 그의 옛집을 찾으면 한눈에 명당(明堂)임을 알 수 있다.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723번지에 있는 호암 이병철의 생가(生家)는 멀리 10리 밖으로 남강(南江)이 천천히 흐르고, 남서향 안채 뒤로는 노적봉(露積峯) 형상의 산자락이 자리잡아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자랑한다.

집은 1851년 호암의 조부인 문산 이홍석 공이 지었다. 천석꾼 대지주에 대학자였던 조부는 멀지 않은 곳에 ‘문산정’이란 서당을 세워 후학 양성에 힘썼다. 호암은 이 집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고, 결혼 후엔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집으로 분가했다. 기와를 새로 이고, 서까래를 교체하는 등 수차례 개보수가 있었지만, 전체 틀은 160여년 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집은 1907㎡(약 570평)의 대지에 사랑채, 안채, 대문채, 광으로 구성돼 있다. 마당엔 호암이 좋아했던 백일홍과 벽오동 등 여러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안채 뒤란엔 아름드리 회화나무를 베어낸 그루터기가 보였다. 너무 크게 자란 회화나무가 집안에 음영을 드리운다며 호암이 잘라냈다고 한다.

안채 뒤편엔 울창한 대숲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화단 옆으론 기이한 모양의 암벽이 자리잡았다. 거북이, 두꺼비, 자라 등이 안채를 향해 고개를 내민 형상이다. 암벽 한편엔 재물을 쌓아놓은 모습과 밭 전(田)자 형상이 있어 많은 방문객들이 바위에 손을 얹고 “부자 되게 해달라”며 기도한다. 경남 창녕에서 온 홍영식(61)씨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돈보다는 건강에 대한 욕심이 더 생긴다”면서 “호암 선생께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며 바위에 손을 얹었다.

CS뉴스프레스 주최 ‘호암 캠프’ 참가 대학생 110명도 지난 2월 3일 생가를 방문해 호암의 옛 흔적을 체험하고 그의 사업보국 정신과 기업가정신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고려대 행정학과에 재학 중인 황인재(25)씨는 “호암이 돈만 많이 벌었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멀리 이곳까지 찾아오진 않을 것”이라며 “문화 사업과 사회 공헌 활동 등 그의 다양한 행적이 사후(死後)에도 큰 영향력을 끼치는 기반이 된 것 같다”고 했다.

2007년 11월 19일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된 이후, 현재까지 약 18만1000여명이 생가를 다녀갔다. 평일엔 200~300명, 주말과 휴일엔 800~900명이 이곳을 찾는다. 이무형(58) 관리소장은 “기업의 단체 방문을 비롯해 개인사업가, 수험생, 신혼부부 등이 ‘호암의 부자 기운을 받겠다’며 찾아온다”고 했다.

대문 한편에 놓인 방명록엔 많은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부산, 창녕 등 인근 지방의 주소가 많이 보였다. 중소기업 대표이사의 이름도 종종 보였고,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란 소속도 눈에 띄었다. 주소 옆 비고란엔 돈, 건강, 성공 등 짤막한 소원이 함께 적혀 있었다. 이 소장은 “삼성과 CJ 등 관계사 임직원들도 종종 찾아오지만, 일일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상 다 알 수는 없다”고 했다. 최근 이건희 전 회장이 다녀갔느냐는 질문엔 “노 코멘트”라며 즉답을 피했다.

생가 입구엔 ‘부자 매점’ ‘부자 한우촌’ ‘삼성 정미소’ 등 ‘부자’와 ‘삼성’을 상호로 내건 가게가 많이 보인다. 부자 매점을 운영하고 있는 조영자씨는 “생가를 다녀간 이들이 ‘부자의 기운을 한 번 더 받겠다’며 매점을 찾는다”며 “100주년 잔치 때 꼭 다시 찾아달라”고 했다.

의령군은 올해를 ‘호암 생가 방문의 해’로 선포했다. 지난해 12월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해 2월 12일 생가에서 탄신제와 기념식을 진행하는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김채용 의령군수는 “인구 3만의 작은 도시에서 세계적인 인물이 난 것이 자랑스럽다”며 “호암생가 일대에 기념관, 홍보관, 기술대학을 건립해 호암정신을 기념하는 명소로 개발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키워드

#포커스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