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이후 세계 증시는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지만 국가별 차이는 오히려 벌어지고 있다. 불안한 재정과 경기 회복세가 더딘 유럽과 일본은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반면, 한국과 인도네시아 등 신흥 아시아 국가의 경제지표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미국은 유럽보다는 나아보이지만 상승 추세에 들어섰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이렇게 세계 증시가 지역별로 다른 건 글로벌 금융위기를 해소해가는 과정의 차이와 국가 간 이해의 충돌에 그 원인이 있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근본문제는 부채의 위기다. 21세기 들어 거의 모든 국가들이 자신의 경제능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많은 부채를 만들며 성장을 이끌어왔다. 2008년, 부채를 더 이상은 늘리기 어려운 지경에 도달하자 미국을 포함해 그간 부채로 버텨왔던 세계 곳곳의 경제가 결국 붕괴의 길로 갔다. 이후 2년의 시간, 세계는 가계와 금융권의 부채를 줄이는 과정을 겪고 있다.

부채를 줄이는 한 방법은 민간 부채를 정부 부채로 전환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국가 간 경기회복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애초부터 재정이 취약했던 유럽은 한계에 이른 재정으로 인해 경기회복도 지연되고 있다. 형편이 조금 낫다는 미국과 일본도 이미 감당하기 힘들 만큼 증가해 버린 정부 부채로 인해 민간 부문에서 발생한 부채를 더는 받아주기 어려운 상태에 몰려 있다. 반면 신흥 아시아 국가들은 탄탄한 재정과, 적은 민간 부채로 이미 금융위기의 충격을 많이 털어내고 있다. 이렇다 보니 현재 신흥 아시아 국가의 주식이나 채권이 안전자산으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 경제를 이끌고 있던 국가들의 적정 수준을 넘어선 부채는 세계 경제를 부채에 대한 공포로 몰아가고 있다. 빚으로 산 집값이 하락한 상태에서 3년째 이자만 부담하고 있으니 사람들의 당면과제는 부채를 갚는 것이 되어버렸다. 발생하는 수익을 부채 상환에 써야 하니 돈은 은행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1929년 미국의 대공황 때나 1990년 이후 일본의 장기불황 때 역시 정부는 소비·투자 진흥책을 내놨었지만 시장에 풀린 돈이 찾은 곳은 결국 은행이었다. 시중에 돈을 아무리 풀어도 사람들은 부채만 갚아나가니 기대했던 통화량의 증가는 미미했고 당연히 물가와 금리 역시 동시에 내려앉았다. 일본은 거의 20년간 이 상황에 빠져있다. ‘유동성 함정’을 넘어 ‘부채 디플레이션(Debt Deflation)’에 빠지는 것이다.

부채로 인해 내수가 침체된 국가가 이런 상황을 맞았다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빼들 수 있는 유일한 카드가 수출을 늘려 경기를 부양하는 것이다. 이때 수출을 증가시키기 위한 전통적 방법이 자국 화폐를 평가절하는 것이다. 최근 미국과 일본은 경쟁적으로 자금을 풀거나 상대국가 통화를 매입하면서 자국 화폐의 평가절하를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또 다시 자금의 과잉상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부채의 덫에 걸린 과잉자금은 투자 등 생산활동보다는 안전자산인 아시아 통화와 주식, 채권의 대규모 매집에 사용되며 또 다른 부작용의 우려를 낳고 있다. 결국 부채는 적정한 유동성의 공급을 어떤 형태로든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초저금리 상태에서 과잉유동성이 금융자산을 넘어 원자재 등 실물자산으로 확산될 가능성이다. 9월 말부터 주요 원자재 가격이 꿈틀대는 것은 과잉 유동성과 인위적인 달러 약세의 후유증이다. 향후 금융자산뿐 아니라 원자재 가격까지 동시에 상승한다면 어렵게 찾아온 세계경제 안정세가 일거에 악화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저금리와 주가 강세의 저변에 깔려있는 구조적 불안정은 올 4분기 세계 증시에 던져진 어려운 숙제처럼 보여진다.

홍성국

대우증권 전무

서강대 정치외교학과졸업, 대우증권 투자분석부 부장, 대우증권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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