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십자 조순태 사장(왼쪽에서 네 번째)이 실험실에서 연구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녹십자 조순태 사장(왼쪽에서 네 번째)이 실험실에서 연구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10~15년 이후를 내다보면서 기업경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약·의학 분야에서 미래를 진단하고 질병을 예방하는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앞서갈 수 있어요.” 대한민국 제약회사 중 1등 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는 녹십자 허용준(40) 부사장의 말이다. 허 부사장은 녹십자를 창업한 고(故) 허영섭 회장의 3남이다. 현재 회사에서 경영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허용준 부사장은 “가훈(家訓)인 ‘정·근·신(正·勤·信)’과 ‘문무식 인무식(文無識 人無識)’이 녹십자 기업철학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녹십자는 불모지와 다름없던 한국의 생명공학산업을 선도해온 기업이다. 녹십자의 지난해 매출액은 8882억원. 국내 제약회사로는 올해 처음으로 매출 1조원에 도전하고 있다. 전체 종업원은 3000명에 달한다. 1978년 기업을 공개했는데, 현재 시가총액은 1조4141억원에 달한다. 지난 8월 11일 경기도 용인에 있는 녹십자 본사를 찾았다. 회사 이름이 상징하듯 9만㎡(2만7000평)의 대지 위에 확 트인 시야의 건물과 넓은 녹지(綠地)가 눈길을 끌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 산책길은 회사의 품격을 보여주었다.

전문경영인으로 30년 이상을 녹십자에서 근무한 조순태 사장은 집무실과 실험실을 오가며 녹십자의 발전 역사와 경영 현황을 설명했다. 조순태 사장은 “녹십자는 국내 처음으로 고난도 기술이 요구되는 혈액분획제제 사업을 시작했다”며 “만들기는 힘들지만 반드시 필요한 특수의약품 개발에 매진해 백신과 바이러스 분야에서 세계적인 생명공학 제조기업으로 도약했다”고 말했다.

1969년에 창업한 녹십자는 이같은 노력에 기반해 한국 제약사(史)의 새 장을 열어왔다. 한국 최초는 물론 세계 최초의 제품도 개발했다. 1983년에는 12년간의 연구 끝에 세계 세 번째로 B형간염 백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조 사장은 “녹십자가 개발한 B형간염 백신 ‘헤파박스’는 한국에서 13%에 이르던 B형간염 보균율을 절반으로 감소시켰다”고 자랑했다. 국민보건 증진에 크게 기여한 셈이다. 또 헤파박스는 세계보건기구(WHO), 유니세프(UNICEF) 등을 통해 세계 60개국에 보급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접종된 백신이다. 효자 상품인 셈이다.

녹십자 일반의약 제품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알부민’이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엔 세계 최초로 유행성출혈열 백신인 ‘한타박스’를, 1993년엔 세계 두 번째로 수두백신인 ‘수두박스’를, 2010년에는 세계 3번째로 유전자재조합 혈우병 치료제인 ‘그린진 에프’ 제품화에 성공했다. 또 2011년에는 세계 두 번째로 헌터증후군 치료제인 ‘헌터라제’를 개발했고, 2012년엔 아시아 최초이자 세계 두 번째로 계절독감 백신을 제품화해 세계보건기구로부터 승인(WHO PQ)을 받는 데 성공했다. 한국을 넘어 세계 선도 기업으로 도약한 것이다.

녹십자는 1970년대 창업 초부터 세계 시장을 겨냥해 국내 최초 뇌혈전증 치료를 위한 ‘유로키나제’를 생산해 수출했다. 조 사장은 “지난해에 해외수출 부문이 전년 대비 69% 증가해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며 “독감백신 수출은 215% 성장했고, 혈액분획제제 플랜트를 태국에 수출함에 따라 수출실적이 높아졌다”고 밝혔다. WHO 등 국제기구를 통한 중남미·아시아 시장으로의 백신 수출이 톡톡히 효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를 통해 지난해 녹십자는 1516억원의 수출액을 달성했다. 2012년 대비 56% 성장한 수치다. 올해 수출 목표는 2억달러(약 2060억원)에 달한다.

녹십자는 세계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미국에 현지법인 ‘GCAM(Green Cross America)’을 설립했다. 이를 통해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보증하는 양질의 혈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게 됐다. 또 법인은 글로벌 프로젝트를 위해 미국의 전진기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글로벌 진출을 위해 가장 먼저 프로젝트가 시작된 품목은 ‘그린진 에프’와 ‘아이비글로불린 에스엔’이다. 혈우병 치료제인 그린진 에프는 2008년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글로벌 임상을 진행 중이다. 또 면역약품인 아이비글로불린 에스엔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글로벌 임상 3상 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녹십자 박두홍 종합연구소장은 “세계 두 번째 헌터증후군 치료제 ‘헌터라제’는 미국 FDA로부터 임상 시 세금감면, 신속심사, 허가비용 감면 등 여러 혜택이 주어져 글로벌 임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녹십자를 이끄는 허일섭 회장은 회사 경영철학에 대해 “창의와 도전의 정신을 바탕으로 녹색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봉사와 배려, 정도와 정의를 지키고 인간존중을 통해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허일섭 현 회장은 고 허영섭 회장의 동생이다. 건강산업의 글로벌 리더가 되기 위해 ‘녹십자 2020’을 발표했다. 2020년에 국내매출 2조원, 해외매출 2조원을 달성해 세계 50위권의 제약사로 도약하는 것이 목표다.

녹십자는 회사 이름에 걸맞게 사회공헌에도 적극적이다. ‘받았던 나라에서 되갚는 국가’라는 말을 내걸고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손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한국전쟁기념재단(이사장 김인규)에도 장학금을 기탁했다. 또 사내 강당과 식당을 임직원 혹은 자녀 결혼식이나 행사를 위해 제공한다. 독특한 사회기부 활동도 있다. ‘매칭 그랜트 시스템’으로 녹십자 임직원이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기부대상자와 기부금액을 정하면 회사가 동일한 기부금을 지원하는 제도다. 2008년부터 시작된 이 제도에 임직원이 75%나 참여할 정도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창업자인 허영섭 회장의 호를 딴 목암과학장학재단을 설립해서 과학도를 발굴하고 장학금을 지원한다.

녹십자는 독일과도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다. 창업자인 허영섭 회장은 독일의 기술 명문 대학인 아헌(Aachen)공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그는 녹십자 최고경영자로 회사가 세계적 생명의학제조회사로 도약하는 데 리더십을 발휘했다. 또 1992년 독일 베링거만하임사와 합작으로 ‘녹십자베링거만하임’(대표이사 허일섭 현 회장)을 설립했다. 두 회사는 자본금을 50 대 50으로 공동 투자해 진단용 시약을 공급했다. 베링거만하임은 진단용 시약과 기기류 분야의 세계적 전문회사로 한때 독일에서 매출 규모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지금은 경영적자로 다른 회사에 인수합병(M&A)당하면서 문을 닫고, 녹십자와의 인연도 끝났다.

조순태 사장은 녹십자의 성공요인으로 적극적인 연구개발(R&D) 투자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조 사장은 회사를 설명하는 동안 R&D라는 단어를 입을 달고 다녔다. 녹십자는 매출액의 8~10%를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국내 제약업계 최고 수준이다. 또 이를 위해 “제약업계의 고질병인 ‘리베이트’ 제도가 근절돼야 한다”는 것이 조 사장의 주장이다.

“제약산업을 ‘보건복지의 도구’가 아니라 국가 핵심 미래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 현재 제약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의 주장이다. 녹십자 R&D 건물의 실험실에는 뢴트겐 등 노벨과학상을 받는 유명 과학자들의 이름이 붙어 있다. 조순태 사장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노벨과학상을 받는 사람이 녹십자에서 나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택환

경기대 교수·독일 본대학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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