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1세대 벤처기업가인 백일승(61)씨가 ‘제국기업 vs 다국적기업’ 개념을 들고나왔다. 2월 출간되는 책 ‘소프트웨어 전쟁’을 통해서다. 백일승 대표는 코스닥 상장게임회사인 ‘조이시티’(옛 JCE)를 경영하면서 ‘프리스타일’ ‘룰더스카이’ 게임으로 대박을 터뜨린 바 있다. 이후 조이시티를 넥슨에 매각하면서 돈방석에 올라앉았다. 창업 전 한국IBM에서 17년간 일하면서 서울올림픽(1988년) 전산시스템 구축을 담당했다. 지금은 이공계 전문 출판사인 ‘더하기북스’를 경영한다.

백 대표는 ‘제국기업’ 개념을 통해 ‘TGIF’(트위터·구글·아이폰·페이스북)와 ‘BAT’(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 등 미·중(美中) 양국의 대표 제국기업을 분석했다. 다국적기업(IBM) 출신 벤처기업가의 미·중 제국기업 분석이라 눈길을 끈다. 지난 1월 19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의 SK허브에 있는 더하기북스 사무실에서 만난 백일승 대표는 “제국기업들이 미치는 영향력이 어느 정도 될 것 같냐”는 질문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에 따르면 로마제국의 영향권 아래 있던 사람들은 전 지구의 9% 정도. 몽골제국은 25%, 대영제국은 20%였다. 하지만 구글의 영향권 아래 있는 사람은 65%, 페이스북의 영향권은 60%다. 제국기업들과 개별국가와의 충돌도 종종 일어난다. 아이폰을 통해 음악을 다운로드하고 결제한 금액은 한국에 남지 않고 애플 본사로 직송금된다. 구글에 광고를 올리는 대가로 지불한 광고비 역시 구글 본사로 흘러간다. 공장을 세우고 영업조직을 꾸렸던 과거와 달리 고용창출도 미미하다. 백 대표는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해도 시장조사와 헤드헌팅 업무 정도만을 수행하는 데 그친다”고 지적했다.

이는 다국적기업(MNC) 시절에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다국적기업은 개별국가에 법인을 설립하고 법인세를 꼬박꼬박 냈다. 사무실과 공장을 운영하며 해당국 국민을 고용하는 고용창출 효과가 컸다. 서울올림픽 때 IBM이 전산시스템 구축을 도맡았듯이 해당국의 기술 수준을 끌어 올려주는 기여도 했다. 이에 개별국가들도 다국적기업을 대개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상황이 180도 변한 것이다.

미국 제국기업들의 약진에 중국 역시 ‘중화(中華) 제국기업’ 전략으로 맞서고 있다. 13억 배후시장과 ‘산자이(山寨·짝퉁)’ 전략을 앞세워서다. 그리고 구글과 페이스북 등의 자국 내 서비스를 차단했다. 그 결과 중국은 바이두와 웨이신, 즈푸바오(알리페이) 등과 같은 구글, 페이스북, 페이팔의 완벽한 대체재들을 만들어 냈다. 이미 “IT 업계는 ‘TGIF 대(對) BAT’의 미·중 양자 대결구도로 재편됐다”는 것이 백 대표의 지적이다.

이로 인해 국내 IT 기업들은 미·중 제국기업들의 경쟁에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한국 기업 중 제국기업에 그나마 가장 근접했다는 삼성전자도 아직은 다국적기업 성격이 더욱 강하다”고 그는 지적한다. 제국기업의 핵심인 소프트웨어 인력도 턱없이 부족한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백 대표에 따르면 미국의 소트프웨어 프로그래머는 250만명으로 추산된다. 전체 인구(약 3억명)의 1%에 가까운 수치다. 후발주자인 중국은 소프트웨어 인력이 140만명 정도에 그치지만 매년 400만명 이상의 이공계 졸업생이 쏟아져 나온다. 국내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는 27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양(量)뿐만 아니라 질(質)에서도 밀린다”고 그는 말했다. 프로그래머를 육성하는 국내 각 대학의 컴퓨터공학과는 정원 미달 사태가 빚어지기 일쑤다. 85~95학번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한때 컴퓨터공학과는 전자공학과와 함께 최고 인기 전공이었다. 하지만 컴퓨터공학이 ‘밤새워 야근하는 고되고 힘든 3D 직종’이란 인식이 세간에 퍼지면서 이런 사태가 빚어졌다.

물론 미국에서도 프로그래밍은 힘든 일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미국은 인도의 우수 소프트웨어 인력을 대거 이민 형태로 받아들여 이 같은 인력부족을 타개했다. 인도 출신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들은 미국 직원 연봉의 70%만 받고서도 기꺼이 일했다. 인도에서 받는 연봉의 6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이민국가인 미국과 같이 무턱대고 이민을 받을 수도 없다.

백일승 대표는 “제국기업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 국민 모두가 프로그래밍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에서도 올해부터 중학교에서 프로그래밍 의무수업을 실시키로 한 상태다. “이를 초등학교 때부터로 더욱 앞당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국 인구(5000만명)의 적어도 1%(50만명)는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프로그래머를 단기간에 대량으로 양성하기 위해 군(軍)에서 매년 2만명씩을 프로그래머로 선발 육성하자”고도 말한다. 지금의 이공계 병역특례와 비슷한 형태로 학력, 전공 등을 불문하고 프로그래머를 선발해 보안업체 등에 배치해서 사이버 부대로 활용하자는 것.

지난해 12월 한국수력원자력 원전 설계도와 연이은 금융기관 해킹에서 보듯 사이버 테러는 갈수록 흉포해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경우 ‘탈피오트제도’를 통해 자국 이공계 인력을 십분활용한다. ‘탈피오트’는 ‘최고 중의 최고’를 뜻하는 히브리어다. 이스라엘의 이공계 대학생 50명을 매년 선발해 ‘유닛8200’이란 부대에 배치한다. ‘유닛8200’은 웜바이러스 ‘스턱스넷’을 이란에 침투시켜 핵개발을 무산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백 대표에 따르면 ‘유닛8200’ 출신들은 제대 후 IT 업계에서 엄청난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백일승 대표는 “소프트웨어는 21세기의 성경”이라며 “프로그래밍과 코딩은 영어보다 중요한 ‘머니 랭귀지’”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벤처기업들이 몰려 있는 실리콘밸리 고급 주택가의 연소득은 96만달러(약 10억원)에 달한다. 미국 나스닥의 주가 상위 10개 기업의 대표들 역시 모두 프로그래머 출신이다. 구글의 래리 페이지를 비롯, 테슬라의 엘런 머스크 역시 프로그래머다.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백 대표는 “넥슨 김정주, 엔씨소프트 김택진, 네이버 이해진, 다음카카오 김범수 같은 신흥부자들이 모두 프로그래머”라며 “이들은 천재가 아니고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알았던 시대적 행운아”라고 말했다. 백일승 대표는 “자동화 시대에 컴퓨터를 부수지 않는 한 당연히 일자리는 없다”며 “그렇다면 결국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키워드

#인터뷰
이동훈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