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7일 광주광역시 북구 광주과학기술원 내 ‘광주 창조경제혁신센터’ 개소식에 유독 눈길을 끄는 인사가 있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일일이 사안을 체크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정 회장은 앞서 두 번이나 현장을 방문해 진행 상황을 사전 점검했다. 국내 굴지의 그룹 회장이 혁신센터 출범식 행사를 위해 한 달에 세 차례나 현장을 찾은 것은 이례적이다.

‘광주 창조경제혁신센터’ 개소식은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는 행사. 창조경제혁신센터는 박 대통령이 가장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창조경제의 상징적 사업이다. 때문에 이 사업을 총괄하는 현대차그룹에서 신경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정 회장이 지나치리만큼 이 행사에 신경을 쏟아 재계 일각에서도 의아해했다.

정 회장이 그만큼 다급한 일이 있었던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다. 어떤 이들은 현대차그룹의 최근 행보에 빗대 얘기를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작한 대규모 투자계획이나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전부지 매입, 글로비스 주식 매각 무산 및 재추진 등 끝없는 이슈를 쏟아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말 2015∼2018년까지 4년간 80조7000억원의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한 해 20조원이 넘는 투자 규모다. 선도적 미래기술을 확보하고 글로벌 800만대 판매 달성 이후 성장세를 유지하며 브랜드 파워를 높이기 위한 투자라고 설명했다. 이는 세계적 불황이 계속되는 와중에 다른 그룹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규모였다. 현대차그룹의 ‘통 큰 투자’가 기업들의 투자를 호소·압박하는 정부에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현대차그룹은 또 지난해 2010년 이후 4년 만에 가장 낮은 영업이익을 기록했지만, 현금 배당을 전년보다 54%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주주 가치를 높이고 내수 경기 활성화를 위한 배당 강화였다. 내수 경기 활성화 역시 박근혜 정부가 목을 매고 있는 정책 중 하나다. 앞서 한전부지 매입과 신사옥 건설에서도 현대차그룹은 통 큰 행보를 선보였다. 10조5500억원의 부지 매입과 국내 최고층인 115층 건설 계획 등을 발표, 주변을 놀라게 하고 있다.

이를 두고 재계에선 ‘마천루의 저주’ 전주곡이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삼성동 한전부지 매입과 100층이 넘는 사옥(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을 짓는 행보가 불안을 키우는 요소가 아니냐는 지적이다. 지난 1981년 미국 디트로이트 도심 한가운데 초고층 본사를 건립한 자동차 메이커 제너럴모터스(GM)가 이후 내리막길에 들어선 사례가 있다. GM은 당시 73층 높이의 초고층 사옥을 지었다. 하지만 GM은 R&D 자금과 현금 동원력 부족으로 1980년대에 일본 도요타에 ‘세계 왕좌’의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그러나 일부에선 다른 시각을 보이고 있다. 현대차 그룹 내부의 복잡한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하려다 보니 큰 이슈가 터져나오고 있다는 진단이다. 복잡한 일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된다고 그룹에 정통한 한 인사는 전했다. 하나는 정 회장의 외아들인 정의선 부회장에게 경영대권을 무리 없이 물려주는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피하려는 사전 조치라는 얘기다.

사실 2월부터 공정거래위원회는 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 제재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2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이 시행됐고, 1년의 유예기간이 끝나는 2월 14일부터 본격 시행됐다. 대기업들은 문제가 되는 계열사의 총수 지분율을 낮추거나 내부거래 비중을 줄여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자산 5조원 이상 대기업의 총수 일가가 상장 계열사 지분 30% 또는 비상장 계열사 지분 20%를 보유한 상태에서 계열사 간 내부거래 규모가 전체 매출액의 12% 이상이거나 200억원 이상이면 제재 대상이다. 지난해 지배구조에 변화를 준 현대차그룹 계열사들 또한 대부분 제재 대상에 포함돼 있었지만 간신히 규제를 피해나갔다. 일례로 현대엔지니어링에 흡수합병된 현대엠코는 합병 전 정 부회장의 지분율이 25.06%, 정 회장의 지분율이 10%로 일감 몰아주기 규제대상이었다. 하지만 계열사 간 합병을 통해 지분율이 16%대로 낮아지면서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피할 수 있게 됐다. 현대위아에 흡수된 현대위스코 또한 합병 전 정 부회장의 지분이 57.87%에 달해 규제 대상이었다. 그러나 현대위아에 흡수합병되면서 정 부회장은 현대위아 지분 1.95%만을 보유하게 돼 규제 대상에서 벗어났다. 또한 정 부회장은 기존에 보유했던 이노션 지분 40% 중 30%를 3000억원에 매각하며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에서 빠져나갔다.

최근 글로비스 주식 매각에 실패했다가 다시 시도한 것도 저간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실제로 정 회장 부자는 글로비스 주식 13.39%(502만2170주)를 국내외 기관투자가에 지난 2월 6일 전량 매각했다. 주당 가격은 23만500원으로 당초 제시한 할인 금액대의 중간 정도에서 가격이 형성됐다. 이로써 정몽구 회장 부자는 모두 1조1576억원의 현금을 거머쥐었으며 이들의 글로비스 지분은 29.99%(정 회장 6.71%, 정 부회장 23.28%)로 낮아졌다. 글로비스는 현대차그룹 내에서 물류를 담당하는 업체다. 대규모 화물 등 그룹 전체의 물류를 글로비스가 맡고 있어 내부거래의 비중이 아주 높다. 글로비스의 연결 매출액은 2011년 9조원에서 2013년 12조원으로 꾸준히 상승했고 개별 매출액 역시 2011년 7조원에서 2013년 10조원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글로비스의 내부거래액은 6조원에서 7조원으로 역시 늘어났고 매출 대비 비율은 최고 86%에 육박했다. 정 부회장은 또 주식 매각과 합병 등으로 자연스럽게 상속이나 증여에 따른 ‘실탄’을 마련하는 일도 쉬워져 일거양득의 효과를 보게 된 것이다.

정 부회장은 정몽구 그룹 회장의 대권을 이어받을 확실한 후계자다. 하지만 정 부회장이 그룹을 지배할 주식 보유량은 미미한 수준이다. 현대차그룹은 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현대모비스에서 다시 현대차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다. 이 구조에 계열사들이 연결돼 있고 정 회장은 현대차 지분 5.17%, 현대모비스 지분 6.96%를 통해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에 비해 정 부회장은 기아차 지분 1.74%를 제외하면 주력 계열사 지분 보유량이 거의 없다. 대신 현대차의 물류를 담당하는 글로비스 주식 31.88%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번에 글로비스의 30%가 넘는 지분을 팔면서 공정위의 규제를 피하게 됐다. 그 ‘실탄’으로 모비스의 주식을 매집하든지 아니면 모비스와 합병하는 순서를 밟으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계획 때문에 정 회장 부자가 분주해졌다는 분석이다.

어쨌든 지난해 800만대를 생산, 세계 5위 자동차 메이커로 우뚝 선 현대차그룹이 안팎으로 시련에 싸인 것만은 사실이다. 80% 이상의 내수 점유율을 유지하던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외국산 자동차에 밀려 60% 선을 위협받기 시작했고, 불확실한 후계구도는 또 다른 오너리스크가 될 수 있다.

홍성추 재벌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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