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목적의 기능성 게임 ‘폴드잇’의 게임 화면. 단백질 구조 사이에 있는 붉은색 구가 병균이다.
연구 목적의 기능성 게임 ‘폴드잇’의 게임 화면. 단백질 구조 사이에 있는 붉은색 구가 병균이다.

‘나무줄기처럼 얽히고설킨 단백질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두 개의 단백질 줄기 사이사이에는 빨갛고 동그란 병균들이 보였다. 마우스 커서로 사슴뿔 모양의 작은 단백질 구조 하나를 젖히자 병균은 이내 사라졌다. 잘못 얽혀 있던 단백질 구조를 서로 닿지 않게 풀자 병균이 치료된 것이다. 하지만 두 개의 단백질 줄기 사이를 넓게 벌리자 경고문구가 떴다. 단백질 구조 사이로 물분자가 들어오면 안 되는데 공간을 너무 넓혔기 때문이다. 다시 공간을 좁히고 배열을 정확하게 맞추자 4523점을 얻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버튼도 새로 생겼다.’

최근 기자가 해본 ‘폴드잇(Fold it)’이라는 게임의 화면과 게임 방식을 설명한 것이다. 단백질 분자 구조들이 화면에 가득한 이 게임은 2008년 미국 워싱턴대학에서 개발했다. 이 게임이 주목받은 이유는 다른 게임보다 재미있어서가 아니다. 수퍼컴퓨터도 10년 동안 풀지 못했던 단백질 구조를 ‘폴드잇’이 3주 만에 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폴드잇으로 10년 난제를 풀어낸 사람들이 과학자가 아닌 의사, 가정주부, 학생, 목수 등 일반 게이머들이었다는 점이다. 단백질은 1000개의 아미노산이 결합한 구조이기 때문에 단백질 구조를 배열하는 경우의 수가 어마어마하다.

이 게임을 개발한 워싱턴대학 데이비드 베커 교수는 ‘폴드잇’을 만들기 전에 분산컴퓨팅 기술을 이용한 ‘로제타엣홈’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단백질 구조를 파악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인공지능의 단점은 3차원 공간에서 정확한 구조를 일일이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베커 교수는 사람의 협동 능력과 직관력을 이용하는 게임을 고안했다. 게이머들이 게임을 하는 과정에서 단백질 구조의 비밀이 밝혀지도록 한 것이다. 그는 “사람의 직관력이 컴퓨터보다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폴드잇 같은 게임은 ‘기능성 게임(Serious Game)’이라고 불린다. 기능성 게임이란 용어는 1977년 사회과학자 클라크 앱트(Clark Abt)의 저서 ‘진지한 게임(Serious Game)’에서 유래됐다. 단순한 오락용 게임이 아니라 게임을 푸는 과정이 연구, 교육 등 특별한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는 의미다.

폴드잇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능성 게임은 ‘아이와이어’다. 이 게임은 인간 뇌의 뉴런(신경세포) 구조를 밝혀낼 목적으로 2010년 만들어졌다. 아이와이어는 최근 한국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2012년 한국에 소개된 이 게임에 달라붙은 한국의 게이머들이 지난 3월 한 달 동안 1만3751개의 새로운 뉴런망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한 달간의 실적으로는 미국(4만6564개)에 이어 세계 2위다. 이 게임의 개발자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세바스찬 승 박사가 세운 ‘승 연구소(Seung Lab)’가 이 게임을 개발한 곳이다.

인간의 뇌 속 뉴런의 숫자는 약 1000억개다. 뉴런의 연결망만 150조개가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신경세포 100개를 연결하는 2500개의 연결망을 정확히 그리는 데만 10년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150조개의 연결망을 그리는 데는 수백억 년이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인간의 3차원 직관력에 집단지성을 접목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이와이어 측에서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145개국에서 17만명의 게이머가 달라붙어 게임을 즐기면서 뉴런망을 그려 나가고 있는데, 현재 추세로 가면 20년 안으로 150조개의 연결망 지도를 완성할 수 있을 전망이다.

레스토랑 직원 체험 게임

2000년대부터 일반인에게 보급되기 시작한 기능성 게임은 해외에서는 의료, 교육,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발되고 있다. 교육용 기능성 게임으로는 ‘심시티’와 ‘마인크래프트’가 대표적이다. 가상현실을 이용한 의료 목적 기능성 게임인 ‘리플렉션 헬스’와 ‘버추얼리햅’도 주목받고 있다.

보통 기능성 게임들은 어린 학생뿐 아니라 성인도 즐길 수 있다. 우수 기능성 게임을 선정해 수상하는 미국의 ‘시리어스 플레이상(Serious Play Award)’을 받은 USC대학 창조기술연구소의 ‘USC 스탠더드 페이션트’라는 게임을 보자. 이 게임은 의과대학 학생들이 진찰을 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게임 속 아바타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환자 인터뷰와 진단 실습을 체험 학습할 수 있도록 개발됐다.

사회공헌 기능성 게임도 있다. 2015년 ‘시리어스 플레이상’ 금상 수상작인 ‘언세이버리’는 유급 병가가 없는 레스토랑 직원을 체험해 보는 게임이다. 몸이 아픈 상태에서 출근하며 일하는 체험을 한다. 실제 미국 대부분의 레스토랑 노동자들은 유급 병가를 못 받는다. 개발자는 클레이 이웡(Clay Ewing)이라는 마이애미대 학생. 그는 노동자 삶의 개선을 위한 사회운동 차원에서 이 게임을 만들었다고 한다.

해외에서는 다양한 기능성 게임이 개발되고 있지만 한국의 기능성 게임은 아직 초보적이다. 게이머들에게 인기를 끄는 기능성 게임이 거의 없다. 한국게임학회 회장 이재홍 교수(숭실대)는 “교육열이 유별나게 높은 한국에서는 기능성 게임도 학습용만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며 “학습에 지나치게 초점을 두다 보면 아무도 찾지 않는 게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게임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좋지 않지만 최근 미국 컬럼비아 메일맨 공공보건대학교와 프랑스 파리 데카르트대학교 공동 연구팀이 발표한 연구자료에 따르면 6~11세 어린이들이 게임을 많이 할수록 정신건강·인지력·사고능력·학업 성취도가 더 높아진다고 합니다. 게임도 이런 순기능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성공작으로 평가받은 기능성 게임은 2000년대 중반 선보인 ‘한자마루’라는 교육용 게임이다. 오락성과 학습의 균형을 적절하게 맞췄다고 평가를 받아 한때 연매출 50억원을 달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2년 9월부터 서비스를 종료한 상태다. 더 나은 콘텐츠 개발에 실패해 게이머들이 외면한 것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조사한 ‘2015 국내 기능성 게임 사업체 및 수요기관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 전체 게임시장은 10조5788억원 규모로 매년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기능성 게임의 매출은 314억원(2014년 기준)으로 추정된다. 게임 개발을 위한 투자금도 정부에서 받거나(43%) 업체가 직접투자(40.5%)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민간으로부터 투자를 받는 게 거의 없다는 의미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능성 게임의 활용 범위는 교육(63%)이 압도적이고 의료(26%), 공공(6%), 기업(9%) 군사(6%) 등의 순으로 활용되고 있다. 교육용 게임의 주요 타깃층도 성인은 아예 제외돼 있고 0~19세에 집중돼 있다. 기능성 게임이 학습 목적에 치중하다 보니 당연히 오락성이 떨어지고 잘 팔리지 않는다. 국립국어원의 한 관계자는 국어 교육을 도와주는 기능성 게임 ‘낱알’의 문제점으로 “사용자의 학습과 재미를 동시에 아우르는 것이 상당히 힘들다”고 지적했다. 부산의 한 특수학교 교사는 “장애아동 교육을 목적으로 ‘깨비키즈’라는 게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온라임 게임을 계속 사용하기 위한 비용도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경기도 과천 국립과학관의 직원 김모씨는 “과학관을 찾는 학생들에게 서비스하는 수학·과학 게임 ‘밀크 앤 시리얼’ 운영을 위한 예산과 전문 인력 배치 등에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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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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