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리튬 배터리를 대체할 종이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는 미국 ‘페이퍼배터리’사의 제품.
기존의 리튬 배터리를 대체할 종이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는 미국 ‘페이퍼배터리’사의 제품.

종이가 새로운 에너지 저장장치 소재로 탄생해 화제다. 스웨덴 린셰핑대(LiU) 물리전자공학과 매그너스 버그렌 교수팀이 개발한 휘어지는 고효율의 ‘종이 배터리’가 그것. 기록과 포장이라는 고유의 역할을 넘어 종이의 영역이 정보기술(IT)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NT(나노공학)와 IT가 만난 획기적인 이 제조기술은 앞으로 휴대용 배터리 용량 확대 등에 크게 기여할 전망이다.

셀룰로스 이용해 고성능 배터리 구현

휘어지는 종이 배터리 기술 발달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배터리는 약간의 변형으로 휘어지는 정도의 곡선형 플렉시블 배터리가 최고 연구 기술인 줄 알았다. 하지만 최근 버그렌 교수팀이 가로로 접고 세로로 접고 두루마리처럼 둥글게 말아도 안정적으로 전류가 흐르는 ‘종이 배터리’를 개발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지름 15㎝ 종이 한 장 크기의 이 배터리는 마음대로 접어도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 유연성이 뛰어나고, 심지어 일부를 잘라내도 기능을 유지한다.

전력을 공급하는 종이의 주재료는 나무의 약 40%를 구성하는 셀룰로스. 셀룰로스는 식물체 세포막의 주성분으로 섬유소라고도 한다. 이 섬유소를 종이 배터리로 만들 때의 관건은 사람 머리카락의 5만분의 1 두께인 셀룰로스 가닥가닥을 결함 없이 균일하게 코팅하는 기술이다. 코팅 두께에 따라 충전 용량과 속도를 극적으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그렌 교수팀은 고압의 물을 쏘아 셀룰로스의 지름을 20㎚(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까지 얇게 만든 후, 전기가 통하는 고분자 화합물을 가하는 실험을 수없이 반복했다. 그 결과 섬유 주변에 아주 얇은 코팅막이 생기면서 전기가 잘 흐르는 소재가 만들어졌다. 매끈하고 균일하게 코팅된 섬유 사이에는 미세한 구멍이 수없이 생겨, 이 빈 공간에 든 액체가 전해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스마트폰을 비롯해 휴대용 기기 개발의 가장 큰 걸림돌은 배터리다. 용량이 큰 보조 배터리의 최대 단점은 휴대하기가 너무 무겁다는 것. 반면 종이의 가장 큰 매력은 ‘가벼움’이다. IT업계가 최근 종이 배터리에 주목하는 이유다. 종이 배터리가 현실화된다면 수많은 휴대용 전자기기는 자연스럽게 가벼워진다.

배터리 역할을 하는 박막은 이미 오래전에 개발되었다. 2007년 미국 렌셀러 폴리테크닉대학의 연구진은 검은색 탄소 나노튜브를 입힌 종이 배터리를 만들었는가 하면, 2009년에는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연구팀이 코팅 방법을 단순화해 생산단가를 낮추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얇기만 할 뿐 전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활용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버그렌 교수팀이 개발한 ‘종이 배터리’는 단 몇 초 만에 원활하게 충전할 수 있고, 수백 번까지 재충전 사용이 가능하다. 배터리 충전 용량 또한 기존 전지보다 3배로 많아 3배 이상 오래 쓸 수 있다. 또 외부 충격을 받으면 뜨거워지거나 경우에 따라선 폭발하는 기존 배터리의 단점을 해결했다는 점에서 실용적이다.

기존 리튬이온 전지는 전극에 해당하는 양극(+)과 음극(-)을 나누는 분리막이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다. 전극을 만들 때도 알루미늄과 구리와 같은 금속물질이 필요하다. 따라서 뜨거운 판 위에 놓을 경우 쉽게 수축하고, 전지를 과도하게 휠 경우 서로 분리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하지만 나무에서 추출한 나노종이 분리막은 플라스틱을 대체하기 때문에 전극 사이의 계면이 매우 안정적이고, 휘거나 외부에서 큰 힘을 가해도 변형 없이 작동한다.

더구나 종이는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데다 자연에서 분해되는 등의 장점이 많다. 종이 배터리는 위험한 화학물질이나 중금속을 쓰지 않고 나무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하기 때문에 친환경적이다. 최근 IT 선진국들이 셀룰로스로 높은 효율성을 가진 배터리나 축전기와 같은 저장장치에 도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동차·생체의학 등 다양한 분야 활용 가능

‘나노 셀룰로스’는 초극세 섬유로 꿈의 첨단 소재다. 따라서 그 활용 폭 또한 넓다. 전문가들은 ‘종이 배터리’ 기술이 앞으로 다가올 웨어러블 기기의 전원이나 전기 자동차·하이브리드 자동차의 동력 에너지로 사용될 것으로 전망한다. 종이로 만들어진 초고용량 축전지는 전기를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최근에 급부상하는 지능형 전력망 구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대용량 저장장치에도 크게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야간에 발생하는 유휴전기를 저장해 전력 소비량이 많은 낮시간에 사용할 수 있다.

종이 배터리의 개발은 이미 청신호가 켜진 상태다. 나노 셀룰로스 기술은 전기·전자 외에 세계적으로 생체의학, 나노 복합 재료 등에 쓰이고 있다. 현재 핀란드와 스웨덴, 미국, 일본 등에서는 IT와 종이를 접목한 복합체를 개발하는 연구가 한창이다. 생물학적 센서를 가진 ‘바이오액티브 종이’가 그것. 세균이나 독성물질을 감지할 수 있는 이 종이를 포장지로 쓸 경우, 유통되는 제품의 품질 관리를 철저하게 할 수 있다.

생물학적 테러를 예방하는 종이 배터리도 등장할 전망이다. 물론 예전에도 종이로 만든 바이오센서 등이 개발됐지만, 배터리를 따로 연결해야 작동이 가능했다. 이제는 박테리아의 호흡을 이용해 전기를 만드는 시스템을 종이 위에 구현하여, 종이로 만든 기기들이 스스로 작동할 수 있게 하는 배터리를 연구 중이다. 박테리아는 더러운 물에 있는 유기물을 이용해 신진대사를 한다. 따라서 버리는 물 한 방울이면 전기를 만들 준비가 완료되는 셈이다. 특히 종이는 물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따로 펌프나 관을 연결할 필요도 없다.

‘휘어지는 종이 배터리’는 둥글게 말 수 있는 롤업(Roll-up) 디스플레이와 옷처럼 입을 수 있는 전자소자 등 다양한 디자인으로의 활용이 가능하다. 미국 육군에서는 나노 셀룰로스로 군복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 종이 배터리나 전자제품을 다른 물질과 함께 군복에 직조하면 된다. 그럴 경우 군복은 화학전에 뿌려진 화학제를 감지할 수 있고, 종이 태양전지를 군복에 넣으면 야간투시경 같은 전자제품들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

‘종이 배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공장기 동력으로 쓰는 것. 이때 전해질로 사용되는 것이 우리 몸의 혈액, 땀, 소변이다. 이들 물질을 흡수시켜 전기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몸속으로 들어간 ‘종이 배터리’는 충전할 필요가 없다. 참으로 종이의 무한 변신이다. 언젠가는 이보다 더 낯선 모습의 종이와 만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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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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