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모터쇼의 베이징현대차 신차발표회장. 참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베이징모터쇼의 베이징현대차 신차발표회장. 참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현대차의 중국 전략 모델 ‘위에나(悅納)’를 세계 최초로 소개합니다.”

중국 베이징의 신(新)국제전람센터에 마련된 무대 한쪽이 스르륵 열리며 소형 자동차 한 대가 들어왔다. 무대 위로 들어온 차에서 내린 사람은 아이돌그룹 빅뱅의 지드래곤. ‘오우바(歐巴·오빠의 중국식 음차)’란 비명과 함께 곳곳에서 스마트폰 카메라음이 터져 나왔다. 현대차의 로고와 함께 찍힌 신차 위에나와 지드래곤의 사진은 중국판 카카오톡 웨이신(微信)을 통해 급속히 퍼져 나갔다.

현대차가 위기에 빠진 중국 시장을 구할 비책으로 소형차 위에나와 지드래곤을 선택했다. 최근 국내에서 최고급 세단 제네시스를 현대차와 별도 브랜드로 독립시키며 고급차 시장에 주력하는 것과 정반대 행보다. 적어도 지난 4월 25일 미디어데이를 시작으로 개막한 베이징모터쇼에서는 제네시스 G90(한국명 EQ900)이 위에나에 상석(上席)을 양보했다. 현대차는 별도 부스를 마련한 렉서스(도요타)나 인피니티(닛산), 어큐라(혼다)와 달리 제네시스를 위한 별도의 전시부스를 만들지도 않았다.

현대차의 이 같은 실용주의 전략은 적어도 베이징모터쇼에서만큼은 적중한 듯했다. 이날 현대차와 기아차를 비롯해 전 세계 자동차 업체들이 20분 간격으로 연 신차발표회에서 현대차는 가장 많은 주목을 끌었다. 특히 지드래곤이 베이징모터쇼에 온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자동차 잠재고객인 10~20대 팬들까지 현대차 신차발표회장을 가득 메웠다. 행사장에는 압사 사고를 우려해 군복을 입은 보안병력까지 대거 투입됐다. 이로 인해 곳곳에서 실랑이가 벌어졌고, 행사 주최 측인 현대차 진행요원들의 바지가 찢어지는 봉변도 있었다. 그래도 “대성공”이란 말이 현대차 관계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세계 최대 자동차시장인 중국을 잡기 위해 전 세계 완성차 업체들이 베이징에서 격돌했다. 중국은 지난해 2459만대의 차량이 팔린 세계 최대 자동차시장이다. 2년마다 열리는 베이징모터쇼는 그 전초전이다. 전초전은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베이징 서우두공항과 모터쇼장인 신국제전람센터, 베이징현대차 본사 빌딩이 있는 차오양구(朝陽區)를 연결하는 공항고속도로와 순환도로변의 가로등에는 베이징현대차의 현수막 광고가 일제히 내걸렸다. 현수막 만리장성을 보는 듯했다. 베이징에서만 연산 105만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베이징 최대 외자(外資) 자동차 기업 현대차의 위용을 과시하기에 충분했다.

현대차는 베이징 신국제전람센터 E4관에 중국 측 합자(合資) 파트너인 베이징차와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중국 정부는 외자기업의 독자 시장 진출을 불허한다. ‘시장을 내주고 기술과 교환한다’는 소위 ‘이시장환기술(以市場換技術)’ 정책에 따라 반드시 자국 자동차 기업과 합자로 진출해야 한다. 베이징차는 현대차가 2002년 중국 시장에 진출할 때 선택한 합자, 합작파트너다. 독일의 메르세데스벤츠와도 합자 관계를 맺고 있다. 베이징차의 전시부스와 나란히 베이징현대차, 베이징벤츠차의 전시부스가 삼각형 형태로 포진했다.

창안차가 전시한 무인자동차.
창안차가 전시한 무인자동차.

허베이성 창저우를 위에나 생산기지로

현대차의 합자 파트너인 베이징차의 CEO 리펑(李峰) 총재는 “현대차는 소형차로 4~5선 시장을 놓고 중국 자체 브랜드 자동차와 쟁투를 벌이게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현대차의 중국 시장 진출을 총괄 지휘해 온 화교(華僑) 출신 설영흥 고문(전 부회장)과 피터 슈라이어 현대기아차 최고설계책임자(CDO)는 이를 지켜봤다. 중국에서 베이징, 상하이 등 4대 직할시는 1선 도시, 각 성(省)의 성도나 대도시는 2~3선 도시라고 부른다. 4~5선 도시라 하면 지방의 중소도시를 일컫는다. 베이징현대차가 신차 발표회에서 4~5선 도시까지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위에나는 한창 ‘마이카’ 열풍이 불고 있는 4~5선 도시 공략에 특화된 모델이다.

경쟁력은 이미 충분히 검증됐다. 위에나의 전신은 ‘루이나(瑞納)’. 루이나가 중국 시장에 출시된 것은 2010년이다. 2010년 이후 루이나는 모두 107만대가 팔렸다. 루이나보다 많이 팔린 모델은 아반떼의 중국형 차량인 이란터(아반떼XD)와 위에동(아반떼HD)밖에 없다. 이란터와 위에동은 각각 127만대와 131만대가 팔렸다. 하지만 이란터와 위에동은 출시 시기가 각각 2003년과 2008년으로 훨씬 앞선다. 베이징현대차의 류즈펑(劉智豊) 부총경리는 “루이나는 단 6년 만에 100만대를 판매한 차량”이라고 했다.

베이징현대차의 이병호 총경리(부사장)는 “올 연말 완공 예정인 허베이성 창저우(滄州)공장에서 위에나를 전량 생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수도 베이징을 둘러싸고 있는 허베이성은 전 중국을 통틀어 현대차의 시장점유율이 가장 높은 곳이다. 연산 30만대 규모의 창저우공장에서 위에나가 쏟아져 나오면 시장점유율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하다. 중국 자동차시장에서 생산은 곧 판매와 직결된다. 배기량 1400~1600㏄의 위에나를 대표선수로 내세운 까닭은 중국 정부의 정책적 변화를 겨냥한 포석이기도 하다. 중국 국무원은 지난해 10월부터 내수진작을 위해 배기량 1600㏄ 이하의 차량에 붙는 취득세를 50% 인하했다. 올 연말까지 한시 적용되는데 계속 연장될 가능성이 높다.

현대차가 베이징모터쇼에서 소형차로 승부를 건 것은 중국 시장이 흔들리면서다. 중국 시장은 현대차가 세계 5위 업체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사활적 이익이 걸린 시장이다. 지난해 베이징현대차가 중국에서 판매한 자동차는 모두 106만대. 이는 2014년 112만대 판매에서 6만대가량 줄어든 수치다.<37쪽 그래프 참조> 기술을 뽐내는 것도 좋지만 실질적으로 시장을 사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실용전략이다.

전기차를 내세운 비야디의 전시부스.
전기차를 내세운 비야디의 전시부스.

1호 경계대상은 창안자동차

가장 큰 도전은 중국 토종 자동차가 현대차의 주력인 중소형차 시장을 야금야금 잠식하는 것이다. 중국 토종차의 추격세는 매년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베이징모터쇼에서도 중국 토종차의 약진은 위협적이었다. 중국 토종 자동차인 창안(長安)차와 지리(吉利)차가 앞뒤로 현대차와 비슷한 크기의 전시부스를 꾸렸다. 치루이(奇瑞)차와 비야디(比亞迪·BYD) 역시 상당한 규모의 전시부스를 확보했다. 창안, 지리, 치루이, 비야디 등 중국의 토종 브랜드는 현대차뿐만 아니라 폭스바겐과 GM 등에도 골칫거리가 된 지 오래다. “문을 여니 문짝이 떨어졌다”는 중국산 차에 대한 비아냥은 이제 전설과 같은 얘기다.

그중 ‘1호’ 경계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창안자동차. 창안차는 중국 국무원이 2009년 세운 ‘자동차산업발전진흥계획’에 따라 상하이차, 제일차(이치), 동풍차 등과 함께 4대 자동차 그룹으로 지정된 자동차 회사다. 한마디로 중국 정부에서 밀어주는 회사다.

창안차는 1862년 청(淸)말 양무(洋務)운동 때 청의 실력자 리홍장(李鴻章)이 세운 상하이양포국이 모태다. 원래 포탄·탄약을 만들던 군수회사였으나 자동차 생산에 뛰어들어 약진 중이다. 창안차는 지난해 중국 시장에서 111만대를 판매했다. 지난해 106만대를 판매한 베이징현대차를 근소하게 앞섰다. 중국 토종차가 자체 브랜드로 베이징현대를 제친 사실에 대해 자동차 업계에서는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창안차는 포드, 마쓰다, 스즈키 등 미국과 일본 업체들과 자동차를 합자 생산하며 축적한 기술을 바탕으로 최근 자체 브랜드 차량 판매에 주력하고 있다. 사실 합자 생산은 양날의 칼이다. 당초 목적은 선진 자동차 업체로부터 기술이전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동차를 대충 만들어도 워낙 잘 팔리니 대형 국유업체들은 기술이전을 받는 노력을 게을리했다. 오히려 기술개발은 지리나 치루이 등 민영 자동차 회사들이 앞장서 왔다. 기술 축적은 창안차가 다른 국유 대형 자동차 업체들과 차별화되는 대목이다.

베이징모터쇼에서 드러난 창안차의 기술적 성과는 괄목상대할 정도였다. 창안차가 앞세운 것은 자동운전이 가능한 무인자동차. 창안차의 본사가 있는 중국 서부 충칭에서 산시성 시안(西安)을 거쳐 베이징까지 2000㎞를 달려온 실제 무인차였다. 창안차 관계자는 “4~5명의 운전자가 번갈아 탑승하면서 6일간 120㎞의 속도로 달려온 차량”이라고 소개했다. 창안차의 CEO인 주화룽(朱華榮) 총재는 무인차가 달려온 지도를 소개하면서 “전 세계 무인차 중에 이 정도 거리를 테스트한 업체는 창안차가 유일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창안차는 중국 최대 검색엔진 바이두(百度)와 함께 연구개발 중인 SUV 차량도 전시했다.

중국 수영 국가대표팀 스폰서 지리차의 신차발표회.
중국 수영 국가대표팀 스폰서 지리차의 신차발표회.

친환경 전기차도 주목

중국 자동차업체들이 전기차 등 친환경차로의 발빠른 전환을 하고 있는 것도 현대차로서는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친환경차의 대표주자인 중국 토종 자동차는 비야디. 광동성 선전에 본사를 둔 비야디는 미국의 워렌 버핏이 투자해 주목을 받은 업체다. 비야디는 이날 베이징모터쇼 자사 전시부스에 택시로 쓰이는 전기차 E5 300을 앞세웠다. E5 300은 완전 충전에 300㎞를 연속으로 달릴 수 있는 순수 전기차다.

비야디 관계자는 “요즘 테슬라가 전기차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지만 사실 판매량과 시장점유율만 놓고 보면 비야디가 테슬라를 앞선다”고 자신했다. 비야디가 지난해 판매한 전기차는 모두 6만1722대로, 테슬라(5만574대)보다 앞선다. 세계 시장점유율 역시 비야디가 11%로 테슬라(9%)보다 앞선다. 이를 통해 비야디는 지난해 800억위안(약 14조원)의 매출을 기록했고, 전년 대비 매출 증가율은 37.8%에 달했다. 자신감을 바탕으로 비야디는 ‘6년’ 또는 ‘15만㎞’ 품질보증까지 내걸면서 공격적인 행보를 하고 있다.

비야디와 같은 친환경차 업체들은 중국 정부의 친환경차 육성책에 따라 언제든지 시장 판도를 뒤흔들 수 있다. 일례로 번호판 추첨제를 운영하는 베이징시는 올해 할당한 15만개 번호판 가운데 6만개를 전기차 등 친환경차에 배당했다. 달리 말하면 자동차 구매자들이 자동차보다 구하기 어렵다는 ‘경(京·베이징)’ 자 번호판을 따기 위해 친환경차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비야디 관계자는 “국가와 지방으로부터 보조금을 받을 수 있고, 베이징 번호판도 쉽게 따낼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 토종차 업체가 부쩍 애국심 마케팅에 호소하고 나선 것도 현대차로서는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애국심 마케팅은 한국에서 현대차가 애용한 마케팅 방법이다. 현대차는 중국 시장에서는 도리어 애국심 마케팅을 경계해야 하는 처지다. 애국심 마케팅을 전면에 내세운 업체는 역시 토종 자동차인 지리자동차. 저장성 항저우(杭州)에 본사를 둔 지리차는 스웨덴의 명차 볼보를 인수해 일약 스타가 된 자동차 회사다. 민영 자동차인 지리는 줄곧 중국 자체 브랜드의 대표주자임을 강조해 왔는데, 중국 올림픽 수영 국가대표팀 스폰서를 자처하면서 오는 8월 열리는 브라질 리우올림픽 수영종목 1, 2, 3등을 한 선수와 코치진에게 모두 지리의 SUV 신차를 제공하기로 공언해 큰 박수를 이끌어 냈다.

지리의 CEO인 안총후이(安聰慧) 총재는 “휴대폰에서 화웨이(華爲), 가전에서 하이얼(海爾)이 한 것처럼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이 존경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기술적 자신감도 드러냈다. 이날 모터쇼 행사장에는 중국에서 ‘자동차 대왕’으로 불리는 리수푸(李書福) 지리 회장까지 참석해 중국 수영 국가대표 선수와 지리차의 연구개발진을 격려했다.

중국 시장에서는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끼리의 규모의 경쟁 역시 날로 격화되고 있다. 현대차는 올해 연말 허베이성 창저우공장을 완공하고, 5번째 충칭공장을 내년에 가동할 예정이다.

현대차는 중국 시장에서 장기적으로 브랜드 경쟁력을 끌어올릴 방안에 대해서도 고민 중이다. 정몽구 회장의 아들인 정의선 부회장은 지난 2월 ‘베이징현대차 딜러대회’에서 “신공장 건설 등으로 미래의 중국 시장을 대비하고 브랜드 이미지를 한층 제고해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정의선 부회장은 베이징모터쇼 참석을 위해 지난 4월 28일 출국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매년 중국 시장에 특화된 신차를 4~5개씩 투입, 전략 차종을 다양화하는 동시에 중국 시장 수요를 세분화해 낮은 가격대부터 고급차까지 라인업을 새롭게 재편성함으로써 다양한 고객 수요에 대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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