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교육보험 출범 당시의 종로 사옥.
대한교육보험 출범 당시의 종로 사옥.

신용호는 더 넓은 세상에서 꿈을 펼치기 위해 고향을 떠나 호남선 완행열차를 타고 경성(서울)으로 올라왔다. 1936년 3월 물기 오른 가지마다 온갖 꽃들이 예쁘게 피어오르는 봄날, 신용호는 역 광장으로 나와 우뚝 선 남대문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다. 그토록 바라던 자립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신용호는 인왕산 밑 효자동 변두리에 하숙을 정하고, 이튿날 아침 일찍 본격적인 서울 탐험에 나섰다. 두어 달 동안 집중적으로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 현장 공부를 하기로 했다. 만주로 가는 데 필요한 공부도 함께 하면서 여비를 마련해 볼 생각이었다. 조선총독부 중앙청 석조 건물을 구경한 뒤 광화문 네거리 동아일보사 앞에 발길이 닿은 신용호는 신문을 옆에 끼고 “동아일보 석간이오!”라고 소리치며 열심히 뛰어다니는 소년들을 보았다. 처음 보는 색다른 풍경이었다. 얼마 안 되는 돈을 벌기 위해 한껏 소리치며 달려가는 저들. 그들의 열성이 넘치는 모습에서 긴박한 생존경쟁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미스코시와 조지야백화점에 들어가 화려한 상품들을 찬찬히 살펴보고는 오후에는 종각 네거리 화신백화점에서 난생처음 신기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렸다. 그의 경성 탐방 범위는 백화점, 시장, 상업지역에 국한되지 않았다. 관공서와 조선은행은 물론이고, 을지로 입구에 있는 악명 높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붉은 벽돌 건물까지 들어가 살펴보았다. 고향 영암의 농토와 호남평야 옥토를 빼앗아간 식민지 수탈기관 총본산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농토를 잃고 도시로 만주로 떠난 농민들의 억울함과 아버지가 소작쟁의를 이끌다 감옥살이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영등포에 있는 방적공장과 철도공작창에서는 노동자들과 함께 국밥을 얻어먹는 가운데, 무슨 일을 하더라도 조선인은 일본인이 받는 급료의 절반밖에 받지 못한다는 우울한 현실을 확인했다.

어느덧 경성에 온 지도 석 달째로 접어들었다. 신용호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만주로 갈 적지 않은 돈을 마련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그는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가기 전에 먼저 만주로 건너 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일본이 만주제국을 세워 중국 본토 침략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 언제라도 중국과 전쟁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따라서 무작정 중국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먼저 만주로 가서 생활비를 벌며 중국말을 익히고 정세를 살피는 게 현명하리라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주제국 수도 신징(新京)에 앞서 그 관문이면서 가장 산업이 발달한 다롄(大蓮)으로 가는 게 좋으리라 생각하고, 총독부 도서관에 가서 만주와 다롄에 대한 일본인의 통계자료와 연구서들을 찾아 읽었다. 무엇보다 만주로 가는 데는 꽤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일자리 얻어 첫 월급을 받기까지 숙식비와 기차 요금 등 100원은 있어야 했다. 그즈음 100원은 다른 직종보다 봉급이 많은 금융조합 직원 넉 달치 월급이었다. 경성에서 알맞은 일자리를 얻는다 해도, 하숙비를 비롯 최소한 생활비를 제하면 2년은 걸려야 겨우 모을 수 있는 큰돈이었다. 그렇다고 여비를 직접 벌기 위해 2년을 서울에서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제 용기와 신념을 담보로 해주세요”

신용호는 궁리 끝에 효자동 신갑범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신갑범은 아버지와 가끔 편지를 주고받는 집안 어른으로, 셋째형과는 일본에서 함께 유학했던 친구 사이기도 했다. 제주도 출신 문학평론가인 신갑범은 도쿄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독립운동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저씨, 오늘은 제가 부탁드릴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무슨 부탁이냐? 어서 말해 보아라.”

“100원쯤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꼭 갚아 드리겠습니다.”

“뭐? 100원이라고? 그 큰돈을 무엇하려….” 신갑범은 놀랍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신용호를 바라본다. 용호가 돈이 필요한 이유를 진지하게 차근차근 설명해나가기 시작하자 신갑범은 심각한 표정으로 용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신용호는 자세를 바로 한 뒤 10년 동안 독학으로 공부한 과정, 세상을 알기 위해 목포와 서울 장안 시장들과 백화점 곳곳을 세세히 둘러보며 간접적으로 겪은 것과 미래의 꿈을 열정을 다해서 말했다.

“저는 중학교 교육을 받고 10년 넘게 사회생활을 한 사람과 견주어 결코 떨어지지 않는 실력을 갖추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남다른 인내력과 투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돈을 빌려주신다면 꼭 제 손으로 벌어 갚을 수 있습니다.” 신용호는 차분하고 확실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중국으로 건너가 장사를 해 크게 성공하고 싶으니 여비와 정착 비용을 꼭 빌려달라고 간청했다. 경성에서 그 돈을 벌려면 적어도 2년이란 세월이 걸리는데 그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야망이 대단하구나. 그런데 만약 내가 돈을 빌려주어도 그 먼 중국으로 떠나버린 네가 갚지 않으면 난 어떻게 하란 말이냐? 더욱이 큰돈을 빌려줄 땐 담보를 잡는 법이라고 했다. 한데 내가 보기에 너에겐 담보가 없지 않느냐.” 그 말에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맹랑하고 엉뚱한 그의 반응을 시험해 보기 위해 농담조로 던지는 말이었다. 잔뜩 긴장했던 신용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자신에 찬 투로 입을 열었다.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독학으로 쌓은 실력과 제 젊음과 포부를 담보로 드리겠습니다!”

신갑범은 당차고 용기 있는 재미난 녀석이란 표정으로 신용호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말했다.

“그럼 좋다! 학교를 다녀보지 못한 네가 맡기겠다는 그 담보가 어디 쓸 만한지 내가 직접 시험해 본 뒤 결정하겠다.”

그는 곧 자기 아들의 중학교 5학년 교과서와 신문을 가져왔다. 조선어·일본어·한문 교과서와 신문을 읽어보라 했고, 상업과 역사 교과서를 펴들고 질문을 던졌다. 신용호는 신문과 교과서를 모두 막힘 없이 술술 읽어내려 갔다. 상업과 역사에 대한 질문도 거의 틀리지 않고 대답했다. 신용호의 1000일 독서가 얼마나 깊고 광범위했는가를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신갑범은 예상치 못했던 그의 실력과 강한 집념에 내심 감탄하면서 말했다.

“그만하면 됐다. 네 담보를 믿고 돈을 마련해줘도 되겠다! 하지만 이것은 네 아버지나 형과는 아무 상관없는 너와 나의 거래라는 사실을 명심해라. 아무쪼록 노력하는 자세와 집념을 소중히 간직하고 열심히 일해서 꼭 성공하거라!”

“아저씨,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1936년 가을 신용호는 신갑범의 도움으로 두만강을 건넜다. 신용호는 경성에 온 지 다섯 달 만에 중국 만주 대륙으로 가는 확실한 길을 찾는 데 성공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길을 찾아라!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가라.’ 스마일스 ‘서국입지론’을 읽다 발견한 이 명구를 신용호는 책갈피로 만들어 읽는 책에 늘 꽂아놓고 보고 또 보며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 신용호는 만주국 수도인 신경(현재의 중국 창춘)에서 신갑범을 다시 만나 함께 생활하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2년쯤 만주에서 꿈을 키우던 신용호는 다롄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뛰어난 사업 수완을 발휘한 신용호는 양곡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신갑범에게 빌린 100원을 20원을 더하여 갚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신갑범은 20원은 끝내 받지 않았다.

1943년 중국에서 양곡수송 사업을 크게 벌이던 신용호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서둘러 귀국했다. 고향집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건강한 모습으로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출판보국을 위하여

“내일모레가 네 장가가는 날이다.” 아버지는 용호를 결혼시키려고 거짓 기별을 보낸 것이었다. 그 무렵 남자 26세는 혼기를 놓친 나이였지만 그는 벌인 사업 때문에 아직 결혼할 때가 아니라고 여겼다. 신용호는 자신의 뜻을 밝혔으나 아버지가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눕는 바람에 결혼식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부인 유순이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년제 전수학교까지 마친 규수로, 사업에 힘쓰느라 가정에 소홀한 남편을 탓하지 않고 어려운 형편 속에서 묵묵히 2남2녀를 길러낸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신용호는 사업을 정리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중국에서 크게 성공했지만 신용호에게 남은 돈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양곡은 동포와 이웃들에게, 돈은 함께 일한 사람들에게 고르게 나누어 주었다. 귀국선에 올라탄 신용호는 빈손이나 다름없었다.

고향에 돌아온 뒤 여러 사업을 구상하던 신용호는, 자신이 1000일 독서로 실력과 꿈을 키워온 것처럼 광복을 맞은 조선 사람들이 독서로써 올바른 가치관과 학문을 깨쳐 큰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좋은 책을 만들어 사회에 기여하고 싶었다. 젊은이들로 꽉 찬 서울 종로의 영창서관, 박문서관, 한성도서, 덕흥서림, 세창서관, 숭문서점 등을 둘러보며 그 가능성을 확인한 신용호는 1945년 끝무렵 전북 군산에서 출판사 민주문화사를 세운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이때의 좌우명은 뒷날 1981년 광화문 네거리 교보문고가 문을 열면서 교보빌딩에 큰 글씨로 새겨 올려졌다. 그즈음 문필가로 이름난 시인 김용제를 주간으로, 이만규가 쓴 여운형 일대기 ‘여운형 선생 투쟁사’를 첫 작품으로 펴냈다. 그러나 이 글 첫 장면에서 보듯 서점계 유통체계가 엉망이어서 배포된 책값이 잘 거둬들여지지 않았다. 책 진열도 점원들에게 잘 보여야 했고 팔린 책조차 대금 지급을 미루어 출판사는 책을 찍어 낼수록 손해 보기 일쑤였다. 이런 한국 서점계의 현실을 파악한 신용호는 과감하게 사업을 정리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두 걸음 전진을 위한 한 걸음 후퇴일 뿐 평생의 꿈인 출판문화 사업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어서 신용호는 군산직물을 설립, 면방직 사업을 시작해 1년 뒤 동업자에게 넘겨주고 견직물을 생산하는 한양직물을 창업했다. 한창 사업이 성공적으로 번창할 때 터진 1950년 6·25전쟁은 모든 국토를 잿더미로 만들었고 신용호의 사업을 원점으로 되돌려놓았다. 다시 사업을 일으키고자 시작한 동아염직도 전란 불황 속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어 새로운 의욕의 불씨를 살리며 어렵게 투자자를 구해 한국제철을 세우고 공장 가동을 눈앞에 두었으나 이마저 경쟁자가 손을 쓴 자유당 정권 방해로 좌절되고 만다. 역경의 연속, 빚만 남은 암담한 현실이었다. 만주에서 귀국 뒤 9년 동안 이런저런 사업을 일으켜 운영했지만 모두 짧게 끝났다. 양심적인 기업관과 정도경영 철학을 수용할 만큼 한국 사회와 경제계가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용호는 빈털터리가 되어 아내와 함께 이불 보퉁이만 챙겨 단칸 셋방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공사 대금을 마련하기 위해 끌어다쓴 고리채는 이미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고 직원들 밀린 임금까지 몽땅 대표이사였던 그의 몫이었다. 분노와 비탄에 앞서 쓴웃음이 나왔지만, 빚 독촉에 쫓기느라 한탄할 겨를조차 없었다.

대한교육보험을 세우고

새로 일으킨 사업마다 톡톡하게 쓴맛을 본 신용호는 복잡하고 힘들었던 뒷수습을 끝내고 여행길에 오른다.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일제에서 광복된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 곳곳 사정을 살펴보는 동안 좋은 착상이 떠오르리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신용호는 목포 고향집에 내려갔다가 서울행 기차에 오른 뒤에도 고향의 가난한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무엇인가를 꾸준히 찾고 있었다. 그즈음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전 국민 의무교육정책에 따라서 온 나라에 교육 열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배우지 못한 게 한이 되어 자식만은 목숨과 다름없는 소를 팔아서라도 공부를 시키려는 가난한 농촌 부모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처럼 교육열이 뜨거운 민족은 없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이것이다. 이토록 가난하면서도 열성적으로 자식을 가르치고 싶어하는 부모들. 그들의 학자금을 쉽게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이 자식 교육 열성을 사업과 연결해 보자!’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문득 넷째 형 용복의 말이 떠올랐다.

“보험이란 뜻하지 않은 사고에 대비해 일정한 보험료를 미리 내고 사고가 발생했을 때 보험금을 받아 그 손해를 보상하는 거야. 내가 근무한 곳이 바로 그런 일을 하는 보험회사였지.”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경영하던 조선생명에 근무하다가 광복과 함께 그만둔 용복이 중국에서 돌아온 그에게 해준 말이었다. 신용호는 가난한 부모들의 학자금 마련을 돕는 일을 보험에 접목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사망·화재·사고를 당했을 때 보험금을 지급받는 보험처럼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 갈 때 학자금을 지급하는 보험을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 다른 보험처럼 푼돈을 저축하여, 필요할 때 자식들 학자금을 목돈으로 지불해 주는 보험을 만들면 된다! 교육과 보험, 이것을 접목하자! 교육과 보험을….’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동안 기차는 어느덧 서울역에 닿았다. 언제나 차분하게 심사숙고할 뿐 좀처럼 흥분하지 않던 그였지만 이번 여행에서 큰 고기를 낚았다는 예감으로 마구 가슴이 뛰었다.

1958년 6월 30일 신용호는 오랜 준비 끝에 대한교육보험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 보험 역사에 유례없는 교육보험 사업을 시작했다. 이는 옛 선조들이 만든 하나의 보험 형태인 계(契)를 연구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육열이 높다는 데서 계와 보험을 접목해 창안한 것이었다.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보람 있는 일을 하겠다는 평생의 꿈도 담겨 있었다. 모든 아이들이 정상적인 교육을 받도록 함으로써 국가의 앞날을 이끌어갈 인재를 키우고 민족자본을 만들어 국가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큰 뜻이기도 했다. 신용호의 이 사상은 곧 교보문고, 교보생명의 창업이념이 된다.

고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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