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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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양적완화’ 논쟁이 뜨겁다.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한국은행의 자금공급 문제와, 경기회복을 위한 한국은행의 주택담보대출증권 매입을 통한 통화공급 문제가 논쟁을 달구고 있다. 특히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산업은행 자본 확충 문제가 한국판 양적완화의 논란을 키우고 있다.

2015년에만 현대중공업·대우조선·삼성중공업, 조선 3사의 영업적자가 8조원 발생했다. 그 여파로 산업은행도 1조9000억원의 영업적자가 발생했다. 기업부실과 그에 따른 금융부실 증가추세를 고려할 때 기업부실 문제의 처리가 시급한 상태다. 부실여신으로 자본이 잠식된 금융사의 자본확충 외에도 부실여신을 인수하기 위한 부실채권 정리자금, 채권시장 안정을 위한 채권시장 안정자금, 부실기업의 우량한 부분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투입해줘야 할 경쟁력강화자금 등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상태다. 그런데 정부와 정치권은 이렇게 시급히 마련해야 할 자금 가운데 금융사의 자본확충자금을 어떻게 마련할지의 문제로 무려 한 달을 보냈다.

내년 본격적인 대선 국면에 들어서면 근로자들의 실업 사태를 피하기 힘든 구조조정이 사실상 어려워진다. 결국 한계 산업 구조조정 시한이 불과 7개월여밖에 남지 않은 상태다. 사실상 올해 구조조정을 마무리해야 함에도 정부와 정치권은 너무나 안이한 인식을 하고 있었다. 일단 한국산업은행의 자본확충은 한국은행이 자본확충펀드에 자금을 투입하면 이 펀드가 산업은행의 채권을 매입하는 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은과 정부가 서로의 입장을 모두 고려한 대안을 마련한 것으로 생각된다.

부실기업 구조조정용 한국판 양적완화

그렇다면 이제 구조조정의 큰 그림이 나와야 한다. 구조조정의 컨트롤타워가 어디인지. 누가 구조조정을 주도할지, 구조조정 일정은 어떻게 잡을지, 불가피하게 나올 수밖에 없는 실업대책은 어떻게 마련할지 등 큰 그림이 적어도 6월 중에는 나와야 한다. 그래야만 하반기 중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할 수 있다.

성공적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경제·사회적 파장과 추진과정의 어려움을 생각할 때 부총리나 적어도 장관급 구조조정위원장을 내세워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금융위원회의 경우 금융감독원과 국책은행 등과 함께 최근의 사태를 야기한 책임규명 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최근 한국산업은행이 조선사와 해운사에 대해 과도하게 부실여신을 제공한 것을 두고 책임규명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산업은행으로서는 정부 고위층이 결정한 것을 어쩔 수 없었다”는 입장이고, 산업은행을 제대로 감독하지 않은 금융감독원은 “금융위원회·기획재정부 차원에서 결정되는 것이니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는 발언이 해당 기관 고위관계자들에게서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20년 전 한국은 천문학적 대가를 치른 외환위기를 겪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동안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또다시 수십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 국민 혈세를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이다.

구조조정의 핵심은 경영진, 채권단과 노조가 각각 손실분담 원칙을 준수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손실분담의 원칙에 따라 경영진의 책임규명과 채권단의 출자전환 등 채무 재조정은 물론, 노조 역시 인적 구조조정을 감내해야 한다. 그런 바탕에서 국민의 혈세가 투입되어야만 국민의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다.

구조조정을 주도할 주체를 선택할 때도 단호해야 한다. 현재 지금의 문제를 불러오게 한 국책은행들에 구조조정을 맡긴다는 구상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절대 구조조정에 성공할 수 없다. 국민들이 믿지 않는다. 한국 경제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요인 중 하나가 바로 국책은행들이 보여준 무능과 부실함이다.

현장 구조조정은 구조조정 전문가가 전권을 가지고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치권과 정부가 배제된 구조조정 전문가를 통해, 정부 개입과 정치적 논란에서 자유롭고 구조조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전후해 부도 직전까지 갔던 미국 자동차회사 GM이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태스크포스를 통해 회생한 것을 되짚어봐야 한다.

구조조정팀이 꾸려지면 어떤 부문을 매각할지, 어떤 부문을 키워 경쟁력을 강화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때 정부의 역할은 구조조정에 필요한 자금조달 방법을 강구하고, 불가피하게 나오게 될 실업자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단순히 고용특별업종으로 지정해 실업급여 몇 개월 더 주는 정도로는 강성노조의 반발을 무마하기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정부의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20조~30조원에 달할 수도 있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되는 구조조정인 만큼 확실히 책임을 규명하고, 또 철저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래야만 혈세를 내는 국민이 납득할 수 있다. 이런 부실기업에 혈세투입이 반복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책임 소재를 밝혀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이제라도 마련해야 한다.

한국 양적완화 제로금리 아니어도 된다

다시 한국판 양적완화 논란으로 돌아와 보자. 한국판 양적완화 문제에서 국책은행의 자본확충과 함께 거론되는 것이 한국은행의 주택담보대출증권 매입을 통한 유동성 공급 문제다. 주택담보대출증권 인수는 미국의 중앙은행에서 주택경기 부양을 위해 채택했던 양적완화 통화정책이다. 침체를 지속하고 있는 주택경기와 주택거래 부진으로 주택담보대출을 갚지 못하고 있는 하우스푸어 문제를 고려할 때 한국 역시 전향적으로 검토할 만한 대책이다.

2008년 금융위기 시 미국 연준은 자산가격 폭락을 막기 위해 1~3차에 걸쳐 대규모로 돈을 푸는 양적완화정책을 실시했다. 이때 돈을 푸는 방법으로 주택저당채권을 매입했다. 그 결과 미국의 주택가격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해 주택시장이 살아났다. 부실이 커지던 주택대출시장 등도 안정화됐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135%였던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05%로 낮아지면서 소비와 경기도 상당부분 회복되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143%였던 한국의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최근 170%까지 올라 소비침체의 원인이 되고 있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양적완화정책과 관련해 또 하나의 논쟁은 ‘금리가 반드시 제로(0%) 수준이라야 하는가’이다. 양적완화정책은 금리를 낮춰도 기업이나 가계로 돈이 잘 돌지 않아 결국 돈이 필요한 부문에 중앙은행이 직접 통화를 공급하는 정책이다. 현재 한국은 본원통화 대비 통화량 비율인 통화승수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이런 때는 금리인하만으로 통화 공급이 쉽지 않게 돼, 경기회복도 쉽지 않다. 차라리 경기회복이 될 만한 부문에 중앙은행이 직접 돈을 공급해 경기를 살리는 양적완화정책이 필요하다. 반드시 제로금리일 필요는 없는 셈이다.

한국 경제는 잠재성장률 하락과 경기침체 상태에 있다. 중장기적으로 잠재성장률을 제고하기 위한 구조조정과 구조개혁이 단행돼야 하고, 단기적으로도 경기 안정화 정책인 양적완화 통화정책을 동시에 실행해야 하는 어려운 실정이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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