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 설치된 주식 전광판. ⓒphoto 오종찬 조선일보 기자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 설치된 주식 전광판. ⓒphoto 오종찬 조선일보 기자

“계속 있어 봐야 별 이득이 없는 주식시장을 떠나겠다”며 상장폐지를 선언하는 기업들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상장폐지 선언에 기관과 일반주주들이 강력히 반발하며 ‘오너·기업 vs 일반주주’ 간 갈등이 커지고 있다.

현재 자진 상장폐지를 선언한 기업으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돈 기업인 한국타이어그룹(회장 조양래)이 대표적이다. 한국타이어그룹은 차량용·산업용 축전지를 만드는 계열사 아트라스BX의 상장폐지를 밀어붙이고 있다.

한국타이어그룹 측은 이미 올해 3월부터 아트라스BX의 상장폐지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당시 아트라스BX는 상장폐지를 위해 기관투자자와 개인투자자로부터 자사주 1주당 5만원에 사들이는 공개매수에 나섰다. 하지만 일부 기관과 개인 투자자들이 한국타이어그룹과 아트라스BX의 일방적 상장폐지 추진에 강하게 반발하며 공개매수에 실패, 자진 상장폐지가 물거품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일반주주들의 반발에도 ‘아트라스BX 주식을 상장폐지시키겠다’는 한국타이어그룹 측의 의지는 최근 더욱 강해지고 있다. 기관과 개인 투자자들에게 “아트라스BX 주식을 5월 4일부터 1주당 5만원에 다시 공개매수하겠다”고 나선 상태다. 1차 상장폐지 실패 후 다시 나선 2차 상장폐지 시도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공개매수를 통해 아트라스BX 자사주 95% 이상을 확보해야 한다.

자진 상장폐지를 노리고 있는 기업은 한국타이어그룹의 아트라스BX만이 아니다. 경남에너지, 동일제지, 도레이케미칼 등도 최근 자진 상장폐지를 선언했다. 이 중 경남에너지는 상장폐지에 성공했고, 동일제지와 도레이케미칼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진 상장폐지의 뜻을 꺾지 않고 있다.

아트라스BX, 1차 실패 후 2차 상장폐지 시도

자본시장의 꽃으로 불리는 주식시장에서 기업들은 왜 스스로 떠나겠다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자진 상장폐지를 선언한 기업들 대부분 표면적으로는 “상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크지 않다”거나 “다수의 주주가 존재하는 상장기업 상태보다 단일 혹은 소수 주주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비상장기업일 때 더 신속하고 효율적인 경영이 가능하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이미 한 차례 자진 상장폐지를 추진했다 실패한 한국타이어그룹의 아트라스BX 역시 마찬가지다. 아트라스BX는 “비상장 상태에서 외부환경 변화에 기동성 있는 경영체제를 갖춰 빠르고 유연한 경영 판단을 할 수 있다”며 “기업경영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자진 상장폐지를 하는 것”임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시장 관계자들과 일반주주들의 시각은 이와는 상당히 다르다. 한국타이어그룹 조양래 회장과 두 아들, 한국타이어그룹 지주회사인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 조현식 대표와 한국타이어 조현범 사장이 벌이고 있는 경영권 승계 및 재산 이전용 밑그림 중 하나가 바로 아트라스BX의 상장폐지 카드일 가능성이 크다는 시각이다.

아트라스BX는 1996년 코스닥시장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참여한 코스닥 원년멤버다. 최근 수년간 매년 4600억원에서 5200억원이 넘는 매출액과, 600억원이 넘는 영업이익, 550억원에 육박하는 당기순이익을 올려 왔다. 회사 내부에 현금성 자산을 얼마나 쌓아두고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유보율이 2015년 기준 무려 4735%나 된다. 반면 부채비율은 22.7%밖에 안 될 만큼 코스닥시장의 우량기업으로 꼽힌다.

일반주주들은 “다수 주주가 존재하는 상장 상태에서 매년 이렇게 높은 성과를 꾸준히 유지해왔고 탄탄한 재무구조를 만들어냈다”며 “경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자진 상장폐지를 해야 한다는 회사 측 주장이 설득력이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아트라스BX의 상장폐지 시도와 관련해 조양래·조현식·조현범, 오너 삼부자를 둘러싼 각종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아트라스BX의 상장폐지 후 한국타이어그룹 지주사인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와의 합병설이 대표적이다.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는 조양래 회장(23.59%)과 두 아들인 조현식(19.32%)·조현범(19.31%) 삼부자가 지배하는 한국타이어그룹 지배구조 최상위 기업이다. 문제는 조양래 회장이 두 아들인 조현식·조현범에게 한국타이어그룹의 경영권과 재산을 나눠주기 위한 자금 상황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들이 지배하고 있는 한국타이어그룹 지주사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와 연 500억원이 넘는 순이익과 유보율이 4735%에 이르는 우량 계열사 아트라스BX의 합병을 성사시키면 상황이 달라지게 된다. 조양래 회장 일가가 지배하는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의 가치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합병이 성사되면 아트라스BX의 수익이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의 몫이 된다.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의 수익성과 기업 규모를 일시에 키울 수 있게 된다.

오너일가 주머니 재산증식용

현재 한국타이어그룹은 타이어사업과 비(非)타이어사업 간 규모 차이가 매우 크다. 비타이어사업에 비해 타이어사업이 월등히 크다. 이 점은 경영권 승계와 재산 이전 작업을 해야 하는 조양래·조현식·조현범 삼부자 입장에서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가족 간 잡음을 최소화하며 형제간 경영권 및 재산 이전작업을 하려면 비타이어사업의 수익성과 규모를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한 가장 손쉬운 작업으로 순수 지주사인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와 아트라스BX를 합치는 것만 한 방안이 없다는 얘기다.

두 회사가 합병되면 유보율이 각각 5491%와 4735%에 이를 만큼 배당 여력이 충분한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와 아트라스BX의 자본을 모두 활용해 배당금을 대폭 올릴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현재 두 회사의 시가 배당률은 1.7%대, 배당성향은 11~14%밖에 안 된다. 지나칠 정보로 높은 유보율에도 지금까지 매우 적은 배당을 해왔다는 점에서 두 회사가 합병하면 배당금을 대폭 늘릴 가능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3월 말 기준,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 지분 총 62.22%를 보유한 조양래·조현식·조현범 삼부자와, 이 회사 지분 10.22%를 갖고 있는 조 회장의 차녀 조희원씨의 배당수익이 커질 수밖에 없다. 사실상 조 회장 일가의 배당금 독식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아트라스BX 상장폐지 후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와의 합병은 조양래·조현식·조현범 오너일가의 고민이던 경영권 승계와 오너 3세들로의 재산 분할에 필요한 자금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카드인 셈이다. 아트라스BX가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에 합병되지 않는다 해도, 상장폐지가 되면 배당금은 지금보다 더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주주들은 기업의 가치부터 정상화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우량한 기업가치만큼 주가가 오르지 못했고, 거래부진 상황에 빠졌다면 회사와 오너·경영진이 이에 대한 대책부터 내놓는 게 정상적인 상장기업이라는 것이다. 주주들 사이에 이런 불만이 폭발했고, 결국 지난 3월 한국타이어그룹이 추진했던 아트라스BX의 1차 자사주 공개매수와 자진 상장폐지 시도를 일반주주들이 무산시켜 버렸다. 한국타이어그룹 측과 일반주주들 사이에는 아트라스BX 자진 상장폐지를 두고 아직도 신경전이 진행 중이다.

“재수·삼수 해서라도 자진 상장폐지할 것”

일본계 한국 상장사인 도레이케미칼 역시 지난해 5월부터 자진 상장폐지를 둘러싸고 기업과 주주들 간 갈등이 커져 있다. 원래 웅진케미칼이던 도레이케미칼은 2014년 일본 화학기업 도레이의 한국 법인 도레이첨단소재가 인수했다.

도레이첨단소재는 이미 지난해 초부터 수차례 도레이케미칼의 자진 상장폐지를 시도하고 있다. 지난해 5월과 7월, 두 차례나 자진 상장폐지를 위한 자사주 공개매수를 시도했다. 하지만 두 번 모두 일반주주들이 강력히 반발하며 상장폐지에 실패했다. 그럼에도 올해 2월 도레이첨단소재와 도레이케미칼 모두 “도레이케미칼의 자진 상장폐지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재차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도레이 측은 “그동안 상장으로 인한 시너지효과나 기술이전 효과가 없었다”며 “비상장회사가 되면 적극적인 기술이전과 외부환경 변화에 유연한 대응, 신성장동력 확보 및 국제적 경쟁력 확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일반주주들은 “상장폐지가 되면 기술이전을 이유로 알짜 기술과 회사 자산이 해외로 부당하게 유출될 가능성이 크다”며 “주주의 권리를 무시하는 경영에는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런 도레이케미칼의 자진 상장폐지 분쟁은 ‘도레이첨단소재·도레이케미칼 vs 일반주주들’ 간 격한 대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올 초에는 회계장부 열람을 둘러싸고도 갈등이 있었고, 도레이케미칼 측이 고의로 수익을 적자로 처리했다는 논란이 이는 등 일반주주들과 회사 측이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일반주주들이 자진 상장폐지 반대와 상장폐지의 부당함을 외치며 서울 도레이 본사에서 1인시위와 피켓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일본 도레이 본사와 일본 최대 언론사인 NHK방송사 앞에서도 상장폐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미 두 차례나 상장폐지 시도가 실패했고 분쟁도 격화되고 있지만 도레이첨단소재·도레이케미칼은 “계획대로 자진 상장폐지시키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경남에너지는 자진 상장폐지 시도에 성공했다. 5월 19일 코스피시장에서 상장폐지된다. 경남에너지 역시 오래전부터 자진 상장폐지를 시도해 왔다. 이미 2014년과 2015년 수차례 자진 상장폐지를 위한 자사주 공개매수에 나섰던 전력이 있다. 당시 자진 상장폐지 시도는 모두 실패했지만, 올 2월 자사주 3만주를 추가로 사들여 95%가 넘는 지분을 확보했다. 자진 상장폐지 시도 2년 만에 뜻을 이룬 것이다. 경남에너지는 경남권 도시가스 공급업체다. 경남에너지는 자신 상장폐지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상장을 유지할 실익이 없다”는 점을 내세웠다. 안정적 현금 흐름과 풍부한 자금을 내세워 굳이 주식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사모펀드가 최대주주인 동일제지도 지난해부터 상장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가치 향상과 공개매수가 인상을 내세운 일반주주들의 반발로 실패했다. 이들 외에도 현재 자진 상장폐지를 꾀하고 있는 몇몇 기업들의 이름이 시장에서 거론되고 있다.

기업들이 주식시장에 상장한 이유는 간단하다. 부족한 자본을 조달해 기업을 성장시키고 그 열매를 주주들과 나누겠다는 것이다. 자본조달이라는 열매를 따먹은 기업과 기업오너들이라면 기업가치 향상은 물론 주주들에 대한 이익공유 등 정당한 보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회피하기 위해 일부 기업과 오너들이 자진 상장폐지 카드를 꺼내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이런 비판이 커지고 있는 이유를 기업과 오너들이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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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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