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사모아의 한 부두에서 김재철.
젊은 시절 사모아의 한 부두에서 김재철.

“우리는 이제 우리 국토의 자연적 약속에 눈을 뜨고 역사적 사명에 정신을 차리며 또 우리 사회의 병들었던 원인을 바로 알고 우리 국민의 살게 될 방향을 옳게 깨달아서 국가 민족 백년대계의 든든한 기초를 놓아야 할 것이다. 삼면이 바다인 국민으로서 잊어버린 바다를 다시 생각하여 잃어버렸던 바다를 도로 찾아서 그 인식을 바르게 하고 그 자각을 깊이 하여 그 가치를 발휘하고 그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첫걸음이요 또 큰일이 된다. 바다를 안고 바다에 서고 바다와 더불어서 우리 국가 민족의 무궁한 미래를 개척함이야말로 태평양에 둘려 사는 우리 앞으로의 영광스러운 임무이다. 일망무변(一望無邊)한 남방 대양을 향하여 불쑥불쑥 내민 반도 남쪽 기슭의 무수한 팔뚝이 낱낱이 국민의기를 떨쳐 일으키고 국가경제 키움에 보람 있게 활동함으로써 우리가 다시 한 번 우리 역사를 변모시켜서 우리 민족의 총명과 용감함을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누가 한국을 구원할 자이냐. 한국을 바다에 서는 나라로 일으키는 자가 그일 것이다.”

최남선(崔南善)이 쓴 ‘한국해양사’ 머리글이다. 이 글이 쓰인 1954년은 전란의 폐허 속에서 헐벗고 굶주리던 힘든 시절이었다. 최남선은 현실을 딛고 무역입국시대, 해양개척시대, 개발연대, 박정희와 근대화 주체세력 등장을 예언하고 있다. 최남선은 ‘우리 민족의 비극은 반도인으로 태어났음에도 내륙인 행세를 해온 데 있다’고 바다 경시 풍조를 지적한 바 있다. 강대국가들은 일찍이 바다로 진출해 부를 축적하고, 무역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해양자원 개발에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데 우리가 그렇지 못함은 바다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편견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은 문화적 차이라기보다 바다에 대한 ‘무지함’이 근본적 이유라고 생각된다. 오랜 역사 속에서 바다를 제대로 알지 못해 바다를 활용함에 소홀하여 바다를 멀리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고 본다.

누가 나라를 구할 자인가

우리는 바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다. 바다에 대한 무지함은 세계 모든 나라에서 보이는 공통적 현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무지함의 정도 차이는 어마어마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강대국들의 경제적 발전상을 보고 알 수 있다. 바다가 없다면 지구상 모든 인류와 생물들은 어떻게 될까. 지구 표면은 바다와 육지로 둘러싸여 있다. 그중 71%가 바다이고 나머지 29%는 육지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육지보다 바다에 서식하는 식물과 동물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도 모르고, 바다가 아니라 숲이 지구의 주요 산소 공급원으로 잘못 알고 있다. 바다는 여름에 열을 흡수하고 겨울엔 방출함으로써 세계 곳곳 기온을 고르게 유지하며 기후를 조절한다. 또한 바닷물의 흐름은 적도 부근 열을 흡수하고 그 열을 극지방으로 전달해 기온을 조절한다. 이처럼 인간이 살 수 있도록 기후를 조절하는 바다의 필수적 역할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다.

지중해를 차지하는 자가 세계를 차지한다는 말이 있듯 세계 강자는 바다를 통해 시장을 차지하는 순서에 따라 그 순위가 바뀌어 갔다. 지난 800년 동안 강대국의 흥망성쇠는 바다를 통한 세계시장에서의 등장과 사라짐이었다. 동양권에서 당(唐)과 장보고, 그 뒤 신라가 사실상 바다를 포기한 뒤부터 유럽국가에 의해 아메리카대륙,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호주 등 드넓은 지역이 ‘지리상 대발견’이라는 이름 아래 그들 세력권에 들어갔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지리상 대발견으로 그들이 얻은 것은 결코 땅만이 아닌 시장이었다는 점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16세기에 무력(武力)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강대국이었다. 세계의 모든 화물은 이베리아반도로 흘러들어 갔고 이 두 나라는 세상을 영원히 지배할 듯했다. 그 무렵 둑을 쌓아 바닷물을 막고 땅을 개척해 근근이 살아가던 네덜란드는 수산업과 해운업에 목숨을 걸었다. 끊임없이 선박을 건조·개량하고 해상보험조합 위탁판매와 같은 새로운 해상법을 만드는 등, 바다를 통해 무역을 일구고 세계시장 개척에 온 힘을 쏟았다. 마침내 바다와 무역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의 승리는 네덜란드에 돌아갔다. 한반도의 17%도 채 되지 않는 조그만 나라, 천연자원이라고는 거의 없는 네덜란드가 17세기 세계를 다스릴 수 있었던 비결은 바다 항로 개척과 무역 증진, 바로 오늘날 세계화였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예부터 활발한 해상 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이 해양문화의 전통이 유교와 농경문화로 기울면서 마침내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간 바 있다. 우리가 전국을 방방곡곡이라 일컬을 때 일본은 진진포포(津津浦浦)라 했다. 세계로 나아가는 진(津)과 세계를 끌어들이는 포(浦)를 읊어대면서 일본은 진진포포, 즉 항구를 드나들며 세계시장을 열어나갔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그들의 식민지가 되는 쓰라린 역사를 맞았다.

그러나 이제 한국이 일본보다 앞서 G20 정상회의 의장국이 된 것도 결코 바다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국가 영토는 분명히 땅이 아닌 해외시장이다. 우리 기업인들은 바다 끝까지 찾아가 해외시장을 개척하면서 21세기형 영토(시장)를 넓혀간 것이다. 그렇게 얻은 시장은 6대주 전역에 이른다. 대영제국에 해가 지지 않았듯이 오늘날 대한민국이 차지한 세계시장에서도 해가 지지 않는다.

육당 최남선 ⓒphoto 뉴시스
육당 최남선 ⓒphoto 뉴시스

꿈의 철학을 마음에 담다

부산수산대학 졸업을 앞둔 김재철(金在哲)은 최남선의 글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솟구쳐 오르는 감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는 남태평양 사모아 어장 참치 연승(延繩)어업에 온 인생을 걸기로 결심하면서 다시 한 번 강진농고 최석진 선생의 꿈의 철학을 되새기며 새롭게 마음을 다진다.

우리의 꿈들은 어떤 공간 속에 살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사는 밤의 생활은 어떤 역동성을 가진 것일까. 우리들 꿈의 공간은 과연 휴식의 공간일까. 그 공간은 오히려 부단하고 몽롱한 어떤 운동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우리가 밝혀낼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새날의 아침이 다시 돌아왔을 때 우리의 머릿속에 남는 것은 밤 동안 겪은 삶의 파편들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꿈의 조각들을, 그 꿈 공간의 파편들을 뒤늦게서야 밝은 공간의 기하학적 틀 속에다 나란히 늘어놓을 뿐인 것이다. 우리는 그 꿈을 조각조각으로 해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꿈의 한 조각을 자신의 이상으로 키워내는 것이다. 청춘의 꿈을 논하는 최석진 선생의 수업시간은 김재철에게 매우 흥미롭고 재미가 있었다. 어느 듯 그 꿈의 한 조각을 찾아 자신의 꿈을 그려가고 있었다.

김재철은 1934년 3월 30일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내동마을에서 태어났다. 내동마을은 다산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초당에서 북동쪽으로 10㎞쯤 떨어진 곳이다. 그는 1954년 강진농고를 졸업한다. 재철의 아버지 김경묵(金敬黙·1914~1991)은 슬하에 7남4녀를 두었는데 김재철이 맏이였다. 김경묵은 그 무렵 어른들이 거의 그렇듯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겨울 농한기 서당에서 딱 한 해 배운 ‘천자문’이 전부였다. 하지만 쉼없이 공부를 했고 신문과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크고 작은 일에 문장이 필요하거나 지식과 기술이 필요하면 마을 사람 모두가 그를 찾을 만큼 소문난 지식인이었다.

강진농고 교사 최석진(전남대 공대 교수 역임)과의 만남은 김재철에게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는 강진군 옆 영암 출신으로, 서울대 문리대 화학과 2학년 때인 1951년부터 1956년까지 강진농고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서울대로 복학, 1959년 졸업한다. 최석진은 공교롭게도 김재철이 강진농고를 다니던 시절에 이 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3학년 때는 재철의 담임을 맡기기도 했다. 이 만남은 김재철에게 크나큰 행운이었다. 다재다능하고 열정적인 최석진은 학생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다. 최석진은 6·25전쟁을 겪으며 소년단 창단과 함께 널리 불린 ‘동호소년단가’를 직접 작사·작곡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진로 문제로 고민하던 3학년 겨울 어느 날 최석진은 제자들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너희들에게 일류 대학을 가라고 말하지 않겠다. 더 넓게 더 멀리 보고 인생을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너희들이라면 바다로 나아가는 길을 선택하겠다. 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가 세계 일등국가가 되고 못 되고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바다 개척에 뛰어드는가에 달려 있다.” 60여명 같은 반 학생들이 이 이야기를 함께 들었으나 이를 받아들여 희망의 싹을 틔운 학생은 김재철뿐이었다. 김재철은 곧바로 교무실로 뛰어가 “선생님, 바다로 나아가려면 어느 대학을 가야 합니까?” 물었고 최석진은 “부산에 수산대학이 있을 것이다”고 답해주었다.

그 무렵 부산에는 바다와 관련된 대학이 두 곳 있었다. 국립 부산수산대학교와 한국해양대학이었다. 그때만 해도 교통부 산하 해양대학은 학사 자격증을 받을 수 없었다. 이와 달리 수산대학교는 학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었다. 김재철은 부산수산대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어로학과로 진로를 결정하고 지원서를 넣었다. 여느 아버지였다면 공부 잘하는 자식이 서울 명문대를 마다하고 수산대를 가겠다고 했을 때 결사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재철의 아버지는 “내가 쌀은 보내줄 수 있지만, 그곳에 바다가 있으니 반찬은 네가 고기를 잡아서 해먹어라”는 단순한 말로 불편한 마음을 좀 내비쳤을 뿐이다.

강진농고 시절 김재철.
강진농고 시절 김재철.

최초, 어로실습선 타고 망망대해로

부산수산대학교 어로학과 54학번은 특별했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먼바다 실습을 다녀왔다. 그들은 1957년 9월 26일부터 10월 14일까지 교수들이 탑승, 지도하는 가운데 동중국해를 거쳐 대만 기륭항까지 다녀오는 행운을 잡았다. 그들이 타고 간 배는 ‘이승만라인(평화선)’을 어겨서 우리 정부에 사로잡힌 일본 국적 어선인 홍양호였다. 김재철의 대학생활 추억담에는 대만 해역에서 가졌던 첫 어로 실습이 빠지지 않는다. 누구든 해외로 나가기가 힘들었던 시절, 대학생들이 배를 타고 외국으로 나간 일은 대단한 추억거리였으리라. 흔히 한국 원양어업의 첫해를 1957년으로 잡는다. 그해에는 다랑어 연승어선이 인도양에 시험 출어해 성공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부산수산대의 원양 실습이 시작되었던 것은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김재철과 참치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김재철이 대학을 갓 졸업한 1958년, 한국에 원양어업 시대가 열린 것은 그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시범 조업에서 성과를 거둔 제동산업 심상준 사장은 본격적으로 참치를 잡으려 지남호를 남태평양 사모아에 보내기로 결정하는데, 1958년 이 진출로 한국의 원양어업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막이 오른다. 윤정구 선장은 사모아 조업단을 꾸렸다.

김재철은 신문에서 지남호 관련 기사를 읽고 그간 가꾸어 온 꿈을 실현하고자 배에 오르기로 마음을 굳힌다. 1958년 1월 22일 윤정구 선장이 이끄는 지남호는 선원 18명을 태우고 사모아로 출발한다. 윤정구는 1945년에 부산수산전문학교 어로학과를 졸업, ‘수산대 출신 원양어선 선장 1호’이다. 이 선박에 가까스로 동승하게 된 어로학과 54학번 김재철은 ‘부산수산대 출신 원양어선 선원 1호’이자 ‘부산수산대 출신 무급 실습항해사 1호’를 기록하게 된다. 이 배에는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로 한국일보 사회부 문제안 기자도 탔으며 그는 ‘원양어업 지남호 동승기’를 써서 본사에 보낸다.

배가 맨 처음 들른 항구는 일본 시모노세키였다. 지남호는 이곳에서 보충할 어구와 참치잡이에 꼭 필요한 미끼를 마련해 갖추었다. 김재철은 이때 용돈으로 5달러를 받았는데, 그 돈으로 시모노세키 헌책방에서 어류도감이나 소설 등 읽고 싶은 책을 샀다. 뒷날 그는 일본어를 능숙하게 쓰게 되었다. 이는 그의 사업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일본어를 스스로 독학해 익혔고 이 배움의 많은 부분은 원양어선 생활에서 이루어졌다. 김재철의 뛰어난 면모 가운데 하나는 무언가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그것을 배우고야 만다는 점이다.

1월 30일 시모노세키를 떠난 배가 마리아나제도를 지나 적도를 통과해 최종 목적지인 아메리칸사모아의 파고파고항에 다다른 때는 2월 21일였다. 부산을 떠난 지 꼭 한 달 만이었다. 그동안 김재철은 틈틈이 어류도감을 보며 참치를 비롯한 물고기를 꼼꼼하게 연구했다. 한편 파고파고항을 뒤로하고 현지인 6명을 더 채운 지남호가 사모아 근처 어장에서 첫 투망이 이루어진 날은 2월 28일이었다. 그때 사모아 어장에는 일본 참치잡이 어선이 53척이나 바다 가득 떠 있었으므로 지남호 선원들의 마음가짐에는 단순한 참치잡이가 아니었다. 그 이상 결기를 품고 일본 어선들을 노려보았다.

지남호는 12개월 가까이 사모아 근해에서 여섯 차례 출어해 450t의 참치를 잡았으며, 미국 밴캠프사에 납품해 9만달러를 벌어들인다. 1959년 2월 무사히 돌아온 지남호의 성공적 조업으로 자신감을 얻은 제동산업은 1959년 5월에 지남 2호(선장 박형관)와 지남 3호(선장 김대준)를 사모아 어장에 추가로 보낸다. 이때 김재철은 월급 200달러를 받고 일등항해사로 지남호에 다시 오른다. 두 선박이 부산항으로 돌아온 때는 1960년 7월과 1961년 4월이었다. 저마다 9만달러와 15만달러 어획량이라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고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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