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플랫폼-엘’ 전경.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플랫폼-엘’ 전경.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강남구 논현동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긴 마름모꼴의 알루미늄 금속재로 외관을 두른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하늘을 감싸안은 텅 빈 마당이 나타났다. 마당 아래 지하 2층으로 내려가자 중국의 설치미술가 겸 영화감독인 양푸동(楊福東)의 작품 전시회 ‘천공지색(天空之色), 신여성 2’가 열리고 있었다.

1920~1930년 ‘아시아의 파리’로 불린 상하이의 신(新)여성을 주제로 한 영상 작품이었다. 상하이모던 스타일의 복고풍 수영복을 입은 중국 여성이 목에 황금빛 뱀을 감고 있었다. 뇌쇄적이고 몽환적인 눈빛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플랫폼-엘(Platform L)’은 프랑스 태생의 한국 패션기업 루이까또즈가 만든 복합문화공간이다. 패션기업 복합문화공간의 개관기념전(展)으로 이보다 더 적합한 작품은 없을 듯했다. 연면적 2173㎡, 지상 4층의 ‘플랫폼-엘’은 지난 5월 12일 개관했다. 독특한 외관에 어울리는 도발적인 개관기념 전시로 인해 순식간에 논현동 일대에서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금싸라기 논현동 한복판에 순수 문화예술공간을 만든 사람은 태진인터내셔날의 전용준(63) 회장이다. 전용준 회장은 한국인으로 2006년 패션과 멋의 본고장 프랑스의 패션브랜드 ‘루이까또즈’ 본사를 인수해 한국과 프랑스 양국에 화제를 불러일으킨 기업가다. “자체 브랜드 없이 라이선스만으로는 성장에 엄연한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전용준 회장이 인수한 루이까또즈는 일반 제품보다는 비싸지만 고가 수입 명품보다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소위 ‘매스티지(Masstige)’ 시장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독일 브랜드였으나 한국이 인수한 MCM과 함께 매스티지 열풍을 일으킨 대표적 브랜드다. 일부 백화점에서는 가격만 비싸고 허울뿐인 수입 패션명품 브랜드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다. 전용준 회장의 일거수일투족 역시 MCM을 인수한 성주인터내셔날의 김성주 회장과 함께 패션업계의 선구자로서 늘 주목을 받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복합문화공간 ‘플랫폼-엘’의 개관으로 그가 화제의 중심에 섰다.

지난 5월 31일 오후 서울 논현동의 ‘플랫폼-엘’에서 전용준 회장을 만났다. 전 회장은 “문화예술 활동을 위한 하나의 ‘터’를 갖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서 플랫폼-엘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패션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각종 예술전시, 기업마케팅과 홍보를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 기업의 문화 후원 등 사회환원 사업을 뜻하는 ‘메세나(Mecenat)’ 사업을 벌이기에 플랫폼-엘은 최적지다. 패션쇼와 상영회, 전시회, 심포지엄을 소화할 수 있는 크고 작은 공간을 비롯해 갤러리, 카페, 아트숍, 강의실 등을 갖추고 있다.

건축가와 해외 미술관 답사

전 회장은 “10여년 전쯤 프랑스 파리에 있는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에 갔다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명품 귀금속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까르띠에가 만든 일종의 복합문화공간이었다. 한국 출신의 세계적 설치미술가인 이불이 유명세를 탄 것도 까르띠에재단 전시를 통해서다.

당시 한 일본 작가가 기차, 고래 등을 주제로 한 설치미술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꼬마 관객들까지 밀어닥쳤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여기에 자극받은 그는 한국에 돌아와 자신도 순수예술을 주제로 한 복합문화공간을 만들어야겠다는 구상을 했다. “각종 전시행사나 후원행사를 남의 미술관이나 장소를 빌려서 개최하는 데는 엄연한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후 전 회장은 지금의 플랫폼-엘이 자리 잡은 논현동 땅을 사들였다. 영화배우 고(故) 김진규씨의 가족이 운영한 유명한 식당이 있던 곳이다. 복합문화공간을 설계할 건축가로는 건축사무소 조호의 이정훈 소장을 낙점했다. 파리건축학교를 졸업한 이정훈 소장은 파리에서 일본 건축가 반 시게루(坂茂)의 퐁피두 메츠 설계에 참여하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한 런던의 자하 하디드 건축사무소에서 실무 경력을 쌓은 건축가다. 반 시게루와 자하 하디드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다. 미국의 유명 건축전문지 아키텍처럴 레코드는 이정훈 소장을 ‘2013년 차세대 건축을 이끌 10명의 건축가’로 선정하기도 했다.

전 회장은 이정훈 소장과 건축주와 건축가로 만나 설계단계에서부터 머리를 맞댔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 현장답사도 함께 떠났다.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스위스 바젤의 바이엘러재단 미술관을 비롯, 반 시게루가 지은 퐁피두 메츠 등을 다녀왔다. 이 밖에 건축사무소 SANNA가 설계한 루브르 랑스, 독일의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 테이트 모던 등을 둘러보았다.

전 회장은 “스위스의 가구회사인 비트라가 건립하고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뿐만 아니라 니콜라스 그림쇼, 알바로 시자, 세지마 가즈요, 안도 다다오, 자하 하디드 등 세계적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들이 한데 모여 비트라 캠퍼스를 이루고 있다. 문화예술과 건축 애호가라면 한번쯤 들러야 하는 성지(聖地)다. 전 회장은 “건축물을 통해 기업의 정체성을 보여주면서도 기업 자체에도 엄청난 홍보와 부가가치를 생산해냈다”고 총평했다.

마음을 비우듯 공간을 비우다

그는 이정훈 소장과 함께 마주 앉아서 한 장 한 장 도면도 그려나갔다. 건물의 외관 소재는 최첨단 느낌을 주는 알루미늄을 택했다. 비행기 동체에 주로 쓰는 알루미늄은 평범한 건물에는 잘 쓰지 않는 소재다. 가격이 비싸 건축주가 선뜻 택하기도 쉽지 않다. 전 회장은 “벽돌 건축에 비하면 비용이 아마 10배는 더 들 것”이라고 했다. 질감이 비슷하면서도 비용이 저렴한 아연을 택할 수도 있었지만, 아연은 용접 부위에 녹이 스는 단점이 있다. 그는 “알루미늄 소재를 택했을 때 비록 비용은 많이 들지만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 보자며 흔쾌히 결정했다”고 말했다.

알루미늄을 긴 마름모꼴로 지그재그 배치해 지상 4층의 외관을 새집처럼 얽었다. 그는 “태양왕 ‘루이 14세’처럼 태양빛이 뻗어나가는 형상”이라고 소개했다. 루이까또즈는 1980년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유서 깊은 장인 가문 출신의 폴 바렛에 의해 탄생했다. 폴 바렛은 17세기 프랑스 고급 귀족문화와 예술의 향취를 담아내고자 브랜드 이름을 ‘루이 14세’, 즉 ‘루이까또즈’로 지었다. 기업 이름에서 영감을 얻어 건물 외관을 태양빛이 뻗어나가는 형상으로 설계한 것이다.

건축주의 기호도 충실히 반영했다. 가장 흥미롭게 만든 곳은 플랫폼-엘의 ‘중정(아트리움)’이다. 플랫폼-엘의 정문으로 들어가면 가운데가 텅 빈 마당 형태의 중정(中庭)이 나온다. 그가 경남 창녕에 있는 지인의 한옥집을 찾았을 때 본 ‘마당’에서 모티브를 얻은 공간 배치다. 한옥집의 마당에 연못, 중정 그리고 그 안에는 대나무를 심어 조경을 해놨는데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집에 들어서면 바로 하늘을 볼 수 있고,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고, 햇빛이 들어온다는 것이 무척이나 자연친화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개인적으로 한옥을 좋아하는데 한옥 구조의 특이한 점은 마당”이라며 “한옥 문에 들어서면 대청마루까지 텅 빈 공간이 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늘 신선하다”고 말했다.

플랫폼-엘 역시 건물 가운데 공간을 텅 비워 마당과 같이 만들었다. 사실 중정 형태의 건물 설계는 땅값이 비싼 서울 강남에서 임대료가 한푼이라도 아쉬운 건축주 입장에서는 흔쾌히 동의하기 힘든 설계다. 그는 플랫폼-엘의 중정을 활용해 각종 야외 전시 행사도 구상 중이다. 중정에는 접었다 펼 수 있는 대형 롤스크린이 있어 기업행사장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전 회장은 “8월에는 패션쇼를 비롯해 가을에는 좀 더 대중적인 전시도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패션기업이 복합문화공간을 마련해 예술가를 후원하는 것은 세계적 추세이다. 까르띠에뿐만 아니라 구찌나 에르메스도 복합문화공간을 갖추고 있다. 루이비통도 2014년 파리에 루이비통 미술관을 열었다.

하지만 한국의 패션기업이 순수예술 전시가 주가 되는 복합문화공간을 여는 것은 드문 일이다. 핸드백 제조사인 시몬느가 핸드백 박물관을 개관하긴 했지만, 엄밀히 말해 순수예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플랫폼-엘에서 루이까또즈를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건물 꼭대기에 붙어 있는 알파벳 ‘L’과 ‘Q’를 형상화한 루이까또즈의 브랜드 심벌뿐이다. 그는 “브랜드와 상관없이 순수 문화공간을 만든 것은 아마 한국 기업 중 처음일 것”이라고 했다. 기업의 문화예술 후원은 정부에서도 장려하는 것으로 기부금 지정단체로 지정해 세제 혜택 등을 주고 있다.

그는 오래전부터 문화예술 후원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다. 2008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파리 퐁피두센터 특별전 ‘화가들의 천국’을 비롯해 2015년에는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국내 젊은 신진작가들의 작품활동을 후원한 적이 있다. 2006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 2012년 중국 베이징 자금성 황성예술관에서 열린 ‘조르주 브라크 전’, 2013년 부산 국제영화제 및 프렌치 나이트 등도 후원했다. 주로 ‘루이까또즈’의 뿌리인 프랑스 문화를 국내외에 알리는 데 주력해왔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에는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를 수상하기도 했다.

한옥의 마당에서 차용한 플랫폼-엘의 내부 중정.
한옥의 마당에서 차용한 플랫폼-엘의 내부 중정.

명품 패션기업들 마케팅 진화

그는 “패션기업이 디자인 자체만으로 마케팅하는 데는 한계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핸드백과 같은 패션아이템은 디자인 자체만으로 차별화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입소문이나 평판과 같은 디자인 외적인 요소는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루이비통, 구찌, 에르메스 같은 해외 패션기업들이 디자인 외적인 마케팅에 주력하는 것도 실은 같은 이유에서다.

그는 “뉴욕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을 비누회사들이 후원한 덕분에 드라마가 ‘솝(비누) 오페라’란 말을 얻지 않았느냐”며 “사실 패션기업으로서 예술가 후원을 통해 협업을 하는 것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가령 철강기업이 문화예술 후원을 하는 것은 제품으로까지 연결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패션기업은 문화예술 후원 등을 통해 구축한 아티스트 네트워크를 제품 디자인에 반영하는 것은 물론, 문화사업으로까지 영역을 늘릴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루이까또즈 역시 플랫폼-엘 신축 이후 건물의 마름모꼴 외관 디자인을 응용한 핸드백 제품군을 생산해냈다.

사실 현재 세계적으로 패션시장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그는 “사람들이 옛날만큼 돈이 없고, 정치이슈 등으로 소비의욕 자체가 많이 꺾인 편”이라며 “루이비통과 샤넬도 가격을 내리고 일부 매장을 철수하는 등 패션업계 전체가 세계적인 재편과정에 있다”고 말했다. 명품시장의 마지막 보루인 중국마저 시진핑(習近平) 정권의 부정부패 척결 움직임으로 직격탄을 맞는 등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했다. 루이까또즈는 2012년 상하이를 시작으로 중국 시장에 뛰어들어 세계 최대 면세점인 하이난다오 하이탕완(海棠灣)면세점 등에 매장을 내고 있다. 그는 “중국 시장은 내년쯤이면 안정화될 것 같다”고 전망했다.

핸드백과 같은 패션 잡화의 판매채널 역시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전통의 판매채널인 백화점 매출 비중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대신 면세점이나 온라인과 같은 새로운 판매채널의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루이까또즈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루이까또즈의 경우 백화점 판매 비중이 60% 정도 된다. 요즘은 백화점을 대신해 온라인과 면세점의 판매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그는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성능이 뛰어난 소위 ‘가성비’가 높은 제품을 개발하는 등 소비자의 니즈와 새로운 트렌드 파악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업군(群) 다각화 역시 검토 중이다. 핸드백 등 제품군을 늘리는 것뿐만 아니라 문화사업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는 방안이다. 전 회장은 “문화 관련 벤처 등 전시기획 같은 사업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2시간 가까이 만난 전 회장은 패션업체 CEO는 으레 화려할 것이란 선입견을 깨버렸다. 서울 강남의 청담동이나 압구정동에 본사를 둔 다른 패션기업들과 달리 루이까또즈는 여전히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 본사를 두고 있다. 그는 플랫폼-엘에 투자한 금액을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당장 돈이 된다는 보장도 없는 순수예술공간을 짓는다는 것은 문화에 대한 오너의 철학 없이는 불가능하다. 약속된 인터뷰가 끝났을 때 그는 말했다.

“플랫폼-엘과 같은 문화예술 플랫폼을 가지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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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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