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페루에서 열린 태평양동맹 정상회의에 참석한 4개 회원국 대통령들. 왼쪽부터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 오얀타 우말라 페루 대통령,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
지난해 페루에서 열린 태평양동맹 정상회의에 참석한 4개 회원국 대통령들. 왼쪽부터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 오얀타 우말라 페루 대통령,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

중남미에는 크고 작은 각종 정치·경제 결사체와 동맹 및 공동체들이 있다. 미주기구(OAS), 남미국가연합(UNASUR), 라틴아메리카·카리브공동체(CELAC), 미주를 위한 볼리바르동맹(ALBA), 남미공동시장(MERCOSUR), 안데스공동체(CAN), 아마존협력조약기구(ACTO), 라틴아메리카통합기구(ALADI), 중·미공동시장(CACM), 중·미통합체제(SICA), 카리브공동시장(CARICOM), 라틴아메리카경제체제(SELA), 라틴아메리카자유무역연합(LAFTA) 등이다.

중남미에 이런 기구가 많은 이유는 정치·경제적으로 다양한 국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구촌에서 몇 안 되는 공산주의 국가인 쿠바부터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국가인 멕시코까지 중남미 국가들은 이념과 체제 면에서 스펙트럼이 넓다. 경제 수준도 빈국과 부국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이로 인해 중남미를 특정 기준으로 구분해서 규정하기 어렵다. 중남미는 아메리카에서 캐나다와 미국을 제외하고, 과거에 라틴민족 국가들의 지배를 받아 라틴 전통을 배경으로 갖는 지역을 말한다. 중남미에는 모두 33개국이 있으며, 총넓이는 2000만㎢, 인구는 5억여명이다.

중남미는 중미, 카리브해, 남미 3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또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를 옛 종주국으로 하고 가톨릭을 믿는 등 라틴문화의 영향을 받은 20개국과 영국,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던 13개국으로 나뉘기도 한다. 라틴문화권에 있는 20개국이 중남미 전체 넓이와 인구의 98%를 차지하기 때문에 중남미를 라틴아메리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남미는 또 각국 정권 성격에 따라 중도우파, 중도좌파, 급진좌파로 구분된다. 중남미에서 경제 1위 국가인 브라질은 남미에서, 2위 국가인 멕시코는 중미에서 각각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중남미를 경제라는 큰 틀에서 볼 때 크게 두 개의 공동체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태평양과 접한 국가들의 모임인 태평양동맹(Pacific Alliance·스페인어 Alianza del Pacifico)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서양을 맞대고 있는 메르코수르(MERCOSUR·남미공동시장·영어 Southern Common Market)이다.

태평양동맹은 가장 최근 결성됐으면서 경제적으로 가장 잘나가는 공동체이다. 회원국은 칠레·콜롬비아·페루·멕시코 등 4개국이다. 태평양동맹은 2012년 6월 출범했다. 인력과 상품, 서비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무역, 에너지, 인프라 통합을 목표로 한다. 아시아 시장 접근을 강화한다는 전략적 목적도 갖고 있다. 태평양동맹 4개 회원국의 인구는 2억900만명, 국내총생산(GDP) 합계는 중남미 전체의 35%에 해당하는 2조달러에 달한다.

메르코수르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 남미 4개국이 1991년 결성한 지역 공동체이다. 이들 4개국은 1995년 1월 1일부터 관세 등 무역장벽을 전면 철폐하는 등 역내 무역 자유화를 통해 경제통합을 추진해왔다. 메르코수르는 자유무역협정(FTA)에서 한 단계 발전한 관세동맹에 해당하며, 회원국 간 무역에선 90% 품목에 대해 무관세를 시행하고, 비회원국에 대해선 공통 관세율을 적용한다. 메르코수르는 한동안 새 회원국을 받지 않다가 2012년 베네수엘라의 가입을 승인했다. 메르코수르는 단순한 경제블록을 넘어 유럽연합(EU)과 같은 통합체를 지향하고 있다. 5개 회원국의 인구 2억7000만명, GDP 합계는 3조3000억달러로 중남미 전체의 60%에 달한다.

동서로 나뉜 경제블록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중남미를 동쪽과 서쪽으로 구분하는 두 경제블록의 명암(明暗)이 최근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는 것이다. 2010~2011년만 해도 대서양연안(서쪽)의 메르코수르 회원국들은 호황을 누리며 중남미 경제의 새로운 대안 모델로 각광을 받았다. 특히 메르코수르는 남미를 대표하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주도하는 경제블록으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당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경제성장률은 국제유가를 비롯해 원자재 값의 급증 덕분에 8~9%를 웃돌았다. 중국과 밀접한 경제협력 체제를 구축했던 양국은 풍부한 원자재와 천연자원을 대거 중국으로 수출하면서 벌어들인 상당한 자금을 선심 쓰듯 국민들에게 배분해왔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의 다양한 복지혜택을 제공하고 생활보조금까지 나누어주었다.

그러다 중국 경제가 2012년 후반기부터 경기침체로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두 나라도 덩달아 위기에 빠졌다. 부패도 양국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두 나라의 정권은 오랜 기간 집권하다 보니 권력형 부패에 깊숙이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경제난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국민들은 대통령을 비롯해 고위 지도자들의 권력형 부패 스캔들에 등을 돌렸다. 결국 아르헨티나에선 정권이 교체됐다. 지난해 12월 대선에서 승리한 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고 있다. 브라질에선 부패와 재정난이 겹치면서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사태로 경제위기가 증폭되고 있다. 현재 직무가 정지된 호세프 대통령의 탄핵 심판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브라질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25년 만에 최저치인 -3.8%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도 -3.8%에 머물 것으로 예상된다. 브라질 경제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원유 매장량 세계 1위인 베네수엘라도 극심한 경제난에 직면해 있다. 수출의 96%를 원유에 의존하는 베네수엘라는 국제유가 하락으로 경제 위기가 이어지면서 식량은 물론 전기와 수도의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의약품이 없어 병원에서 환자 치료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생필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부 주민들이 상점과 슈퍼마켓을 약탈하고 있다. 식료품이 없자 주민들이 거리와 광장에서 개, 고양이, 비둘기를 잡아먹기 위해 사냥까지 하고 있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지만 혼란은 갈수록 가중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은 점점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2016~2018년 만기가 도래하는 국가부채 원리금 상환액은 총 270억달러나 되지만 외환보유액은 현재 30억달러에 불과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베네수엘라의 물가상승률을 720%로, 내년엔 2200%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반정부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야권은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 투표를 추진하고 있다.

메르코수르의 추락

메르코수르의 추락은 공교롭게도 베네수엘라의 가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메르코수르는 2012년 7월 31일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특별 정상회의를 열고 당시 호세프 대통령의 강력한 주장으로 베네수엘라를 다섯 번째 회원국으로 전격 받아들였다. 호세프 대통령의 야심은 메르코수르를 통해 중남미 경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호세프 대통령은 멕시코가 주도하는 태평양동맹이 출범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베네수엘라를 끌어들였다. 베네수엘라는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과 더불어 급진좌파 국가. 베네수엘라가 가입함으로써 메르코수르는 극좌 성향으로 기울면서 경제블록이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변질됐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은 파라과이에서 좌파 대통령이 탄핵당했을 때 회원국들의 단체행동을 이끄는 등 정치를 앞세웠다. 게다가 메르코수르는 회원국들의 개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금지하는 등 폐쇄적인 정책을 고수해왔다. 이 때문에 메르코수르는 경제블록으로 보호주의에만 집중한 나머지 경제영토를 확대할 기회를 놓쳤다. 세계 7위의 경제대국인 브라질의 경우 지금까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 3개국과 FTA를 체결했을 정도다. 오죽하면 중도좌파인 타바레 바스케스 우루과이 대통령은 메르코수르에 가입한 것을 후회한다는 말까지 했을까. 바스케스 대통령은 지난 2월 25일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만나 메르코수르와 유럽연합(EU)의 FTA를 추진하고 나섰다. 우루과이의 이런 움직임은 메르코수르의 현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태평양 연안(동쪽)의 태평양동맹 회원국들의 경제는 말 그대로 잘나가고 있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을 보면 멕시코 2.5%, 콜롬비아 3.1%, 페루 3.3%, 칠레 2.1%를 기록하는 등 준수한 성적을 보였다. 이들 4개국의 국가신용등급은 지난해 모두 한 단계씩 올랐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지난해 칠레의 GDP 대비 국가부채 비중은 15.1%로 중남미 최저 수준이다. 페루는 20.7%로 두 번째로 낮고 콜롬비아(44.3%), 멕시코(49.7%)도 중남미 평균을 밑돈다. 태평양동맹 회원국들도 메르코수르 회원국들과 마찬가지로 원자재 수출에 경제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지만 원자재 값이 폭락했는데도 불구하고 탄탄하게 버티고 있다. 올해도 GDP 성장률이 2.4~3.3%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 있는 증권거래소의 모습.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 있는 증권거래소의 모습.

태평양동맹이 승승장구하는 비결

태평양동맹이 승승장구하는 비결은 높은 수준의 개방이라고 볼 수 있다. 회원국들은 무엇보다 지난해부터 경제블록 내에서 통상 장벽을 철폐했다. 역내 교역품의 92%는 아예 수입 관세가 없다. 2020년까지 100% 무관세 역내 교역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회원국들의 상품이 자유롭게 국경선을 넘나들고 있다. 회원국 간 관광 및 비즈니스 비자는 이미 필요 없어졌다. 회원국들은 대외 개방에도 적극적이다. 한 회원국이 외부와 FTA를 맺으면 회원국들 전체가 협정을 맺은 효과가 나도록 시스템화했기 때문에 FTA로 얻는 혜택은 극대화된다. 게다가 회원국들이 자유롭게 FTA를 맺을 수 있다. 칠레는 전 세계 60개국과 무역협정을 체결해 세계에서 가장 개방된 경제정책을 표방하고 있으며, 멕시코는 44개국과, 페루와 콜롬비아는 50개국, 30개국과 FTA를 각각 체결했다. 멕시코, 칠레, 페루는 또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고 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도 가입했다. 이들 4개국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을 계획이다. 현재 이들 국가 중 콜롬비아를 제외한 멕시코, 페루, 칠레는 이미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원국이다.

태평양동맹은 금융시장의 통합도 추진하고 있다. 회원국들은 자본시장을 통합하기 위해 중남미통합증권시장(MILA·Mercado Integrado Latinoamericano)이란 공동 주식시장을 결성했다. 이에 따라 한 회원국에 상장된 기업의 주식이 다른 회원국에서도 거래가 가능하다. 상장된 기업은 800여개이며 시가총액은 1조2000억달러다. 남미 최대인 브라질 상파울루 증시의 시가총액을 웃돌 때도 있다. 태평양동맹은 또 기업환경 개선에도 주력했다. 세계은행이 지난해 9월 발표한 ‘2015 비즈니스하기 좋은 중남미 국가’에서 콜롬비아, 페루, 멕시코, 칠레는 각각 1위부터 4위까지를 차지했다.

미·중과의 관계 설정이 변수

태평양동맹이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요인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점이 있다면 정치적 안정이다. 중도우파가 정권을 잡고 있는 멕시코와 콜롬비아는 물론 중도좌파가 통치하고 있는 페루와 칠레는 그동안 민주적으로 국가를 운영해왔으며, 선거를 통해 정권이 합법적으로 교체돼왔다. 중남미 국가들은 현재 앞다투어 태평양동맹에 가입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코스타리카, 파나마, 과테말라 등이 가입 의사를 밝힌 상태다. 심지어 우루과이도 태평양동맹에 가입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메르코수르가 지는 해라면 태평양동맹은 뜨는 해라고 분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제블록이 중남미 경제의 주도권을 차지할지는 예측하기 이르다. 무엇보다 두 경제블록이 미국·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가 가장 중요한 변수다. 태평양동맹은 기본적으로 친미 국가 모임이다. 그렇다고 중국과의 관계가 나쁜 것도 아니다. 메르코수르는 반미 성향이 강하고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두 블록은 또 중국과는 경제협력 관계를 강화하기를 바라고 있다. 미국과 중국 모두 메르코수르는 물론 태평양동맹과도 경제적 유대를 밀접하게 맺기를 기대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는 아니지만 태평양동맹과 메르코수르 사이에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안데스산맥이 마치 국경선처럼 뻗어 있다. 앞으로 두 경제블록 간의 경쟁에서 승자가 누가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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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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