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9월 28일 괌에서 CDM에 승선해.
1980년 9월 28일 괌에서 CDM에 승선해.

김재철은 1969년 4월 16일 마침내 회사를 세운다. 동원산업주식회사는 ‘수산물 판매업’과 ‘부대사업 일체’를 사업 범위로 하고 자본금 1000만원으로 서울 중구 명동2가 상업은행 건물 한쪽에 본사 사무실을 마련했다. 회사 이름 ‘동원산업(東遠産業)’은 김재철이 지었다. 회사 이름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창업자의 의지와 사업 방향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업계에선 ‘산업’ 대신에 ‘수산’이란 이름을 많이 썼는데, 김재철에게는 처음부터 수산업으로 시작하지만 궁극적으로 영역 확장을 통해 제대로 된 큰 기업을 만들어내겠다는 비전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동녘 동(東)’ 자와 온 세계를 무대로 뛴다는 뜻에서 멀다는 의미의 ‘멀 원(遠)’ 자가 더해졌다. 그는 회사를 상징하는 로고를, 지구 위에 한자 ‘동녘 동’ 자를 넣어 만들었으며 회사 이름과 마찬가지로 김재철의 드넓은 포부와 이상을 담았다.

가다랑어 채낚기로 새 어장 개척하라!

1969년 7월 1일, 김재철은 신용을 담보로 일본 도쇼쿠사의 미주 현지법인인 올림피아 트레이딩사(社)로부터 지불보증 없이 37만달러에 이르는 동원 31호와 동원 33호의 현물차관 도입계약을 맺었다. ‘정상외 결제방법에 의한 채권채무발생허가’라는 이름으로 정부로부터 차관도입 승인을 받았는데, 이는 외국에서 자산을 먼저 들여온 다음, 그 자산을 활용해서 매출과 수익을 일으켜 갚아나가는 방법을 말한다. 김재철이 정부나 국책은행 또는 민간은행을 통한 지급보증 없이 중고선이라는 현물차관을 들여온 것은 그가 일생 동안 만들어낸 여러 신기록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무급 실습항해사, 일등항해사, 선장으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산 10년 세월 동안 손에 쥔 현금은 없었지만 실력·성실·정직·근면으로 이루어진 무형자산을 만들어냈고 이를 바탕으로 신용을 창조해갔다.

김재철은 이처럼 참치 독항선(獨航船·낚시를 사용하는 연승어업으로 횟감용 참치를 잡는 어선) 대형화에 한발 앞서 나아갔다. 그리고 한국 최초로 탑재모선식(搭載母船式) 연승어업용 선박을 들여온다. 이것은 모선이 또 다른 소형선인 ‘자선(子船)’을 싣고 다니다 물고기 떼를 발견, 어구를 바다에 던질 때 자선이 떨어져나가 모선과 함께 다니며 다랑어를 낚는 방법을 말한다. 그는 국내 업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새로운 기법을 처음 쓰기로 결심했다. 이는 현장을 자세히 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일이 처음 시도할 때는 모험정신도 있어야 하지만 자신의 판단에 확신이 있어야만 한다. 김재철이 내린 결정은 현장에서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다. 세계 수산업계에 누가 있는지, 그리고 누구를 앞에 내세워야 하는지 김재철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전시에 필요한 인재가 있고 평시에 필요한 인재가 있는 법. 사업가의 성공 요건에서 이런 것들을 알맞게 배치하고 움직이는 것만큼 중요한 요소가 또 있을까. 전략이 있다면 전술도 필요하다. 첫 번째 배 동원 31호의 성공에는 전략, 전술, 도구, 사람 등 어느 것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특히 원양어업의 경우에는 새로운 고기잡이 기술을 들여오는 것 못지않게 먼저 어장을 파악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누가 어장을 더 빨리 확보하느냐에 따라 우열이 가려지기 마련이다.

동원의 어장 선점은 무엇이든 남달라야 한다는 김재철의 인생 원칙이 적용된 한 가지 사례다. 김재철은 현재 번창하는 사업도 언제든 위기에 빠질 수 있음을 깨달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끊임없이 찾았다. 창업 후 첫 배 동원 31호만 하더라도 탑재모선식 어법 도입, 기존 어장 재해석, 그리고 뛰어난 선장과 선원 기용 등 모든 것을 적기에 움직였으므로 성공할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성과 앞에 다른 원양업체들도 경쟁적으로 같은 고기잡이 방법을 연구하며 따라왔다. 언제나 김재철은 수산업계의 혁신가로서 맨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이런 면모는 참치 연승업에서 출발해 참치 선망업으로 이어지고 세계 최고 수산업체로 발돋움하는 내내 끊이지 않았다. 그의 혁신은 자기 사업에만 국한되지 않고 한국 원양업계 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는 탑재모선식 참치 연승어업, 오징어 채낚기 어업, 가다랑어 채낚기 어업 등에서 혁신을 이루어냈다. 김재철의 선망업은 선구적인 기여를 해 오늘날 한국 원양어업 발전의 시금석이 되었다.

참치 연승어업으로 사업 기틀을 잡으면서도 김재철은 새로운 어장, 고기잡이 기법, 어구 등을 끊임없이 연구했다. 이런 도전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초기 성과로 오징어 채낚기 어업을 들 수 있다. 이 고기잡이법은 1971년 1월 인도양에 참치 연승어선으로 출항, 예상치 못한 해난사고를 겪었던 동원 35호를 고쳐 만든 뒤 처음 이뤄졌다. 동해안과 홋카이도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소규모 어선들이 이끌어온 어업으로 배에 켜는 집어등으로 오징어를 유인한 다음 미끼 없이 바늘만 달린 낚시를 던져 잡는다. 동해안에만 2200척 정도가 조업 중이었다. 김재철은 참치 연승어선을 고친 대형 선박으로 오징어 채낚기 어업에 뛰어들었는데, 여기에서 그의 도전정신은 또 한 번 힘을 발휘한다. 그 뒤 속초를 기지로 둔 대형 오징어 채낚기 어업이 활성화되어 1980년대까지 놀라운 어획량을 올렸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런 도전이 인도양에서 참치 연승어업으로 성과를 올리는 중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1972년 아프리카 가나공화국 테마 기지에서 실시한 가다랑어 채낚기 어업은 김재철이 국내 최초로 사업화에 성공한 일이다. 가다랑어 채낚기 어업은 참치 떼들이 탐색되면 살아 있는 멸치를 뿌려서 낚시로 참치를 낚아올리는 방법인데, 김재철은 이 고난도 기술을 해내기 위해 두 가지 조치를 취한다. 먼저 오징어 채낚기 어업을 성공시킨 김용문을 가나 현지로 보내 기술을 배우게 했다. 그리고 미국의 참치 가공 통조림 회사인 스타키스트사와 선원훈련 계약을 맺고 ‘폴 피싱’이라는 새로운 고기잡이 기술을 우리 선원들이 배우도록 했다. 이처럼 김재철은 신규 사업에 진출할 때 성급하게 뛰어들지도 않지만 남들이 승산이 없다는 등 무슨 말을 해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가다랑어 채낚기 어업은 10여년 동안 원양업계에 새 어장을 열어준다.

동원산업 설립 직후 선박 수는 용선 1척에서 대형 트롤 공모선을 포함해 22척으로 늘어났다. 매출액은 1969년 4129만원에서 1979년 157억5800만원으로 고속성장, 연평균 성장률 81.3%를 기록했다. 창사 10주년을 맞이한 김재철이 손에 쥔 성적표였다. 1981년 동원은 수산업체에서 종합식품회사로 발돋움하는데, 이 기간에 김재철은 그룹의 토대를 탄탄히 세운다. 41세 되던 해인 1975년 2월 12일, 김재철은 일본 미호(三保)조선소에서 스턴트롤 공모선 4500t급을 새로 만들었다. 공모선(工母船)은 선내에 가공 공장시설을 갖춘 선박으로 냉동시설뿐만 아니라 어분(魚粉), 어육, 필렛(filet), 연육 가공 시설을 포함한 최신식 설비를 갖춘 배였다.

동원참치캔 탄생!

김재철은 1981년 ‘캡틴 킴호’를 시작으로 선망어선을 계속 투입, 2014년 17척, 2015년 총 19척을 갖춤으로써 세계 최대 참치 선망선단을 갖추게 된다. 여기에 나머지 어선들을 모두 포함한 결과, 마침내 동원산업은 세계 1위 수산업체로 우뚝 서게 된다. 그러나 김재철의 사업 초창기에 세 번의 결정적 위기가 있었다. 하나는 1차 오일쇼크(1973~1974)이고, 다른 하나는 200해리 경제수역 선포(1977), 그리고 2차 오일쇼크(1979~1980)였다. 창업하고 나서 10여년간 한시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김재철은 이런 위기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부도업체들이 잇따르는데도 김재철은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원양업계의 급작스러운 환경변화 속에서 그를 든든하게 뒷받침했던 것은 회사 어선들이 바다에서 올리는 탄탄한 어획량 때문이었다.

2차 오일쇼크를 당하면서도 김재철은 헬리콥터 탑재식 참치 선망업에 뛰어드는 파격적 결정을 내린다. 코스타 데 마필호의 도입으로 시작된 참치 선망업은 출항 2년3개월 만에 320만달러의 누적 적자(초기 선박 구입·수리비 400만~500만달러 제외)로 그에게 어려움을 주었지만 마침내 이를 이겨내고 1981년부터 모두 정상 궤도에 올린다. 위기극복 과정에서 동원 선단은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기업의 위기는 주력사업이 흔들릴 때 일어난다. 창업하고 나서 10여년 사이 세 번 큰 위기를 넘기고 몇 번 해난사고를 이겨낼 수 있었던 저력은 꾸준히 높은 매출과 이익을 창출했던 주력사업의 성과에서 나왔다. 김재철의 사업 확장, 그 첫 번째 선택은 수산물 냉장사업이다. 그는 1973년 7월 부산 감천동에 대지 1만6500여㎡(5000여평)를 구입, 냉동공장을 세운다. 이 계획은 1976년 11월 8일 동원냉장주식회사 설립으로 성과를 올린다. 냉장사업은 그 뒤 동원산업이 수산종합식품회사로, 이를 넘어 동원그룹으로 도약하는 발판이 되어 유통업과 수산가공업, 더 나아가 제조업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었다. 동원냉장 설립은 유통업 진출로 이어졌고, 수도권에 냉동 수산물을 공급하기 위해 동원산업 성남사무소를 열게 된다. 그리고 성남사무소가 성장하면서 또 다른 조직 동원식품주식회사가 탄생한다. 1981년 출범한 동원식품주식회사는 동원그룹 성장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수산물 가공 및 식품사업 진출의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1981년 6월 김재철이 14주 하버드대학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스타키스트 공장을 둘러볼 기회를 갖는다. 공장을 둘러보면서 그는 ‘우리도 이 정도 공장이면 충분히 운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는데, 머릿속 깊이 새겨진 문제들이 참치시장 진출이라는 타개책을 찾는 순간이었다. 그때 미국에서는 통조림 하면 참치캔을 떠올릴 만큼 폭발적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때 우리나라는 꽁치, 복숭아, 햄 통조림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김재철은 한국에서 참치캔이라는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낸 혁신가가 된다. 그가 원양어업으로 인도양, 대서양, 북태평양 등에서 새로운 어장을 개척해왔듯이 4000억원대(2015년 기준) 참치캔시장을 만들어낸다. 1982년 11월, 가다랑어와 황다랑어 등 가공하지 않은 물고기를 수출하던 동원산업이 국내에 참치통조림을 처음 내놓은 것은 그즈음 수산물 판매 형태로 보면 기존 질서나 고정관념을 깬 파격적 대사건이었다. 그는 어업에서 그랬듯 수산 가공업 분야에서도 개척정신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참치캔 대성공은 동원이 종합식품업체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된 것은 물론 참치를 대중화시킴으로써 국민에게 새로운 단백질 공급원을 마련해준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동원그룹의 식품사업은 2000년에 출범한 동원F&B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하버드 최고경영자과정은 국내에서는 해마다 두 사람쯤 갈 수 있는 좁은 문이었다. 그 무렵 아시아에서는 일본만 쿼터가 4개 있었고 한국과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에는 자리가 둘뿐이었다. 공직자로 최각규 전 경제부총리, 기업가로 김재철이 참여하게 되었다. 좀 더 배우고 좀 더 성장하고 싶다는 타오르는 열망으로 어렵게 시간을 내어 찾은 하버드 최고경영자 연수에서 그는 두 가지 배움을 얻는다. 바로 증권업은 기회가 주어지면 한번 도전해볼 만한 유망 사업이라는 확신과, 로스앤젤레스의 스타키스트에서 발견한 참치캔의 국내 사업화 가능성이다. 1981년 6월 시중은행 민영화에 따라 삼보증권, 동양증권과 함께 국내 대표적 증권사인 한신증권이 매물로 시중에 나왔다. 한신증권의 매각 공고가 나왔을 때 김재철은 충분히 준비된 상태는 아니었다. 예상 낙찰가격은 70억원대로 추정되었지만 김재철로서는 어느 정도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도전할 만한 일이었다. 여기에다 자산 재평가를 하면 자본금의 몇 배나 되는 내실 있는 기업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재철 회장의 최근 모습.
김재철 회장의 최근 모습.

50년 만에 스타키스트 인수하다

김재철은 한신증권을 인수해 몇 년을 각고심혈하면서 회사를 키워냈다. 이때 거쳐간 대표적 인물이 김정태(전 국민은행장)와 박현주(미래에셋증권 회장)이다. 특히 한국 금융계의 기린아로 통하는 김정태는 36세가 되는 1986년에 김재철에게 상무로 발탁되어 17년6개월 동안 함께 일했다. 김재철은 1996년 4월, 한신증권 상호를 동원증권으로 바꾼다. 외환위기가 닥치기 전인 1996년 중반부터 김정태 사장이 무차입경영을 실시하는 등 동원증권은 내실 운영을 해왔다. 이런 결단으로 동원증권은 1997년 4월 공식적으로 ‘차입금 전무’를 대외적으로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외환위기 때 대형 증권사들이 줄줄이 적자를 보였음에도 동원증권은 186억원 흑자를 보여준다. 김재철은 일찍이 금융업에 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장남 김남구에게 승계를 준비한다. 2002년 설립 준비 팀을 발족해 2003년 5월 금융지주회사가 출범한다. 김재철은 또한 수산업과 전혀 관련이 없는 2차 산업인 제조업에도 뛰어들었다. 그는 포장재 사업을 주력사업의 경쟁력 강화와 새로운 수입원 창출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 나갔다.

그는 해외 기업들을 살펴보고 포장재 사업 분야의 경쟁력이 기반이 되어야 원가 경쟁력과 품질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관심은 경영상의 실체험 판단에서 출발한다. 사실 식품가공업은 포장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가 포장재 사업과 인연을 맺은 지는 오래되었으며, 이 분야의 사세 확장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1991년 6월 통조림 캔용 빈 깡통을 생산하는 삼양공업이 설립되었으며, 1990년대 앞뒤로 동원정밀(현 동원시스템즈)이 세워졌다. 동원정밀은 1986년 3월 시판되기 시작한 김을 담기 위한 플라스틱 용기 제조사였다. 이들 사업은 아직 전통적 의미의 포장재 사업이라 할 수는 없었고 실제 사업은 1996년 경기도 광주에 한 인쇄소를 인수하면서 시작되었다. 김과 어묵 등의 포장지, 즉 작은 식품용 봉투를 만드는 인쇄소였다. 포장재 사업이 새로운 성장축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99년 충북 진천에 공매로 나온 한 공장을 인수하면서부터였다. 이렇게 시작된 포장재 사업은 2012년까지 식음료 포장에 쓰이는 통조림 캔과 필름 포장재, 그리고 페트병 정도를 생산하는 데 머물렀다. 그러다가 성장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포장재 관련 사업을 차근차근 인수해나간다. 2013년 1월 알루미늄 포일을 만드는 대한은박지를 합병하고, 2014년 1월 산업용 필름, 상업용 인쇄, 판지상자 생산 특허를 가진 한진피앤씨, 같은 해 10월 동원시스템즈 포장 부문보다 매출이 큰 테크팩솔루션을 인수한다. 이어 남태평양 사모아의 스타키스트 공장 바로 앞에 있는 포장재 업체인 탈로파시스템즈를 인수한다.

이로써 동원시스템즈는 매수합병으로 포장재 사업 전 분야에 걸쳐 제조기술과 인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스타키스트는 참치캔으로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이다. 하지만 김재철에게는 단순한 시장점유율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는 회사였다. 그가 1958년에 지남 1호를 타고 무급 실습항해사 자격으로 남태평양 사모아에서 잡은 참치는 그즈음 중요한 참치캔 제조회사였던 밴캠프 시푸드사에 납품되었다. 그 뒤 김재철이 스타키스트와 맺은 인연은 스타키스트가 사모아에 공장을 준공해 납품을 받기 시작한 1960년대 들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세계적 스타키스트를 처음 만난 지 50년이 되던 2008년 마침내 이 회사를 인수하는 데 성공한다.

스타키스트를 인수한 김재철은 곧바로 두 가지 효과를 얻는다. 하나는 동원산업의 구매와 제조의 강점을 국내 시장을 넘어 세계시장에까지 확대,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점이다. 다른 하나는 글로벌 기업의 매수합병으로 그룹 전체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 기업을 경영하는 경험을 쌓게 되어 글로벌 기업으로의 도약에 필요한 밑바탕을 마련한 점이다.

오늘날 동원그룹은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인 동원 엔터프라이즈를 중심으로 18개 주요 계열사로 이루어진 생활산업그룹이다. 18개 계열사들은 동원건설산업 및 통신장비업을 영위하는 동원T&I, 포장재 회사인 동원시스템즈 말고는 모두 수산·식품 관련 사업이며, 주력회사인 동원산업과 2000년에 동원산업에서 분리된 동원F&B이다. 수산 식품사업 그룹은 동원산업과 동원F&B를 중심으로 원재료 획득, 식품 생산, 물류, 보관업 등 수산·식품 연관된 1차 산업과 2차 산업 위주 수직계열화 및 수평계열화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원엔터프라이즈에 더해, 동원그룹에서 출발해 독자적으로 큰 축을 이루고 있는 한국투자금융지주가 있다. 이 회사는 동원산업이 1982년 인수한 동원증권과 2005년 2월 인수한 한국투자신탁을 바탕으로 하며, 2004년 12월 계열 분리가 이루어졌다. 현재 한국투자금융지주는 한국투자증권과 한국투자금융지주를 주력회사로 모두 15개 계열사를 두고 있다. 두 지주회사들 사이에는 단 한 주의 주식도 교차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법적·경영적인 면에서 완전히 독립해 나가고 있다.

나는 다시 바다로 가리라

김재철은 지난 5월 해양수산부 출범 20주년 기념강연에서 2008년 해수부를 폐지하자마자 조선·해운업계가 어려움에 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며, 오늘 대규모 구조조정을 앞둔 한국의 조선·해운산업의 위기 극복에 있어 해수부 폐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역사학자 폴 케네디가 ‘영국을 세계사의 중심에 서게 한 것은 막강한 상선을 건조해낸 조선소’라고 했음을 지적하고, 한국이 보유한 세계적인 조선소들을 국력 강화에 활용할 방법을 적극 찾아야 한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는 바다로 나가야 합니다. 바다를 활용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정도론 안 돼요. 우리는 바다를 이용함을 넘어서 숙명적으로 바다와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지리적 조건이 유라시아 대륙의 부두 형상이에요. 일본은 대양의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이고, 중국은 대륙의 폭풍을 막아주는 언덕이잖아요. 우리는 유라시아의 부두로서 동서양의 항구 역할을 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어요. 그러니 세계의 물자, 돈, 사람, 정보가 모여드는 매력 있는 나라, 동아시아 물류 중심으로 발전시켜 나아가야 합니다.”

세계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면 한반도는 대륙 끝에 매달린 작은 반도가 아니라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천혜의 부두이자 동북아의 전략적 관문에 해당하는 요충지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오늘의 청년들, ‘흙수저 논란’에 대해 김재철은 진취적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인생은 B(birth)에서 시작해 D(death)로 끝난다. 그러나 B와 D 사이에 C(choice)가 있어 인생의 묘미가 있다’는 말을 인용하며 “불평(complain)·충돌(crush)처럼 ‘부정적인 C’보다는 도전(challenge)·변화(change) 같은 ‘긍정적인 C’의 삶을 살자”고 했다. 아울러 그 진취적 기상을 바다에서 구하라고 당부했다. “최남선 또한 말한다. 큰 것을 보고자 하는 자, 넓은 것을 보고자 하는 자, 기운찬 것을 보고자 하는 자, 끈기 있는 것을 보고자 하는 자는 가서 시원한 바다를 보아라. 응당 너희들이 평일에 바라던 바보다 그 이상을 주리라.”

김재철의 마음에는 언제나 드넓은 바다의 거대한 파도소리가 깨어나라! 깨어나라! 하고 울부짖는다. 바다의 사나이 그의 새벽 잠자리는 언제나 거친 격랑과 싸우다 항구에 돌아온다. 아침 꿈결에서 이제 바다로 나아가야지! 이제 바다로 나아가야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깨어난다.

‘나는 다시 바다로 가리라. 외로운 바다와 하늘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은 키 큰 배 한 척, 그 배를 이끌 별 하나, 그리고 물결치는 키바퀴, 바람의 노래, 펄럭이는 흰 돛, 바다 얼굴 위의 잿빛 안개와 먼동이 트는 잿빛 새벽, 나는 다시 바다로 가야지. 흐르는 조수가 부르는 소리. 거절할 수 없는 거친 부름이며 똑똑한 부름이기에 그리고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은 하얀 구름 날아가는 바람 찬 날, 사납게 솟구쳐오르는 물보라, 날려가는 물거품, 울어대는 보라 갈매기, 나는 다시 바다로 나아가리라.’

고정일 소설가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