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아니 미국에서 가장 싼 레스토랑 ‘2브로스’의 벽걸이 메뉴판.
맨해튼, 아니 미국에서 가장 싼 레스토랑 ‘2브로스’의 벽걸이 메뉴판.

3년 전 여름 얘기다. 뉴욕에 들렀다가 다음 약속까지의 시간이 어정쩡하게 남았기에 할렘 쪽으로 차를 몰았다. 필자에게 할렘은 두 가지 의미로 와닿는다. 뉴욕 맨해튼에서 가장 싸면서도 대낮에 가도 주차가 가능한 ‘노면 공용 주차장’이란 점과, 아프리카산 오일향 냄새로 채워진 신(神)의 재림을 갈구하는 빈자(貧者)의 땅이다. 노면 주차 비용은 그때나 지금이나 시간당 1달러다. 맨해튼 50번가 중심가에 가면 노면 공용 주차시설이 아예 없다.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비싸다는 땅의 지하 주차장은 시간당 30달러 정도다. 1시간 주차에서 1분이라도 넘기면 팁과 세금을 합쳐 70달러짜리 폭탄을 맞게 된다.

할렘의 오일향은 100%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아날로그 심신 치유약이다. 걸어가면 거리 곳곳에서 이국적인 향을 느낄 수 있다. 보통 1mL에 1달러 단위로 판매한다. 예수 탄생 당시 동방박사가 선물했다는 유황과 몰약도 만날 수 있다.

할렘은 맨해튼 중심가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불과 70블록 정도 떨어져 있지만, 물가는 10배 아니 100배의 차이를 보인다. 할렘의 중심지는 마이클 잭슨이 데뷔했다는 흑인 음악의 성지인 아폴로극장, 즉 125번가다. 주차에 성공한 뒤 할렘 125번가에 내렸다. 유황과 몰약의 향도 음미하고 재림 성지의 변화된 모습도 볼 겸 산책에 들어갔다.

20분쯤 돌아다니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다. 비를 피해 도로 옆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문도 없이 그냥 뻥 뚫린 가게다. ‘2브로스(Bros)’란 이름의 피자집이다. 비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 있던 손님들까지 더해 좁은 공간이 인산인해로 변했다. 자세히 보니까 피자를 사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20여명은 될 듯하다. 줄은 길지만 열심히 일하는 여직원 덕분에 주문 즉시 구입할 수 있다. 맥도날드 햄버거집의 경우 주문하는 시간, 기다리는 시간 합쳐서 평균 10분은 넘어선다. 흥미로운 것은 줄을 선 각양각색의 손님들이다. 양복 정장 신사에서부터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정도의 젊은층, 할렘 여행에 나선 외국인, 아프리카 전통 복장을 차려입은 여성, 그리고 홈리스 ‘행색(?)’의 손님들이다. 가장 많은 것은 홈리스다. 약물에 취한 듯 눈을 감고 기다리는 사람을 비롯해 20여명 중 5명 정도는 홈리스로 보였다. 막 구운 피자 냄새에 가려지긴 했지만 홈리스로부터 악취가 여기저기서 풍겨왔다.

맨해튼에서 가장 많은 손님이 찾는 피자집 ‘2브로스’에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맨해튼에서 가장 많은 손님이 찾는 피자집 ‘2브로스’에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할렘의 명물이 된 ‘2브로스’

유난히 홈리스가 많은 이유는 건물 주변에 도배를 한 붉은 글씨의 광고 문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피자 한 쪽에 1달러, 음료수와 토핑한 피자를 주문할 경우 2달러다. 필자가 아는 한 미국에서 가장 싼 가격의 음식이다. 맥도날드에 1달러99센트짜리 햄버거가 있지만 어린이용 음식에 불과하다. 싸구려의 대명사인 중국 음식 하나를 시켜도 최소 3달러다. 길에서 사먹는 뉴욕 누드핫도그도 최하 2달러다.

‘홈리스가 돈을 내고 음식을 사먹는가’라고 되물을지 모르겠다. 미국에서 홈리스는 말 그대로 집이 없는 사람일 뿐이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거지처럼 집도 돈도 없는 상황과 다르다. 아무리 낮은(?) 소득의 홈리스라 해도 최소한 생계를 유지할 정도의 자금력을 자랑한다. 1달러짜리 피자쯤이야 ‘당당히’ 자비로 구입할 수 있다. 기부문화에 익숙한 미국인은 홈리스에게도 너그럽다. 가끔 해외토픽에 나오지만 홈리스라도 길목만 좋으면 보통 사람 이상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돈을 벌어도 홈리스는 홈리스다. 버는 수입의 대부분을 복권이나 마약 구입에 사용하기 때문이다. 투자인지 탕진인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돈이 없다. 장대비, 할렘, 피자, 홈리스…. 뭔가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어긋난 풍경에 대한 감상은 비가 그치면서 사라졌다. 다음 약속을 위해 차로 뛰어가면서 머릿속에서 잊혀갔다.

할렘 피자집에 대한 기억을 다시 되살린 것은 이후 1년 반쯤 뒤 이탈리아에서였다. 베니스에 머물던 중 이탈리아 TV에서 뉴욕 특집 비슷한 프로그램을 봤다. ‘하루 식사비 3달러로 즐기는 뉴욕 서바이벌 노하우’ 같은 프로그램이다. 할렘 거리가 등장하더니, 아스라한 기억 속에 있던 피자집 풍경이 화면에 떴다. ‘2브로스’다. 할렘에 가면 반드시 들러야 할, 할렘 흑인들 모두가 알고 있는 명소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손님 수로 볼 때 맨해튼 ‘넘버 1 피자집’이라는 것이다.

사실 피자집이란 것이 전부 비슷하다. 할렘 피자집을 특별히 기억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는 내부 구조 때문이다. 피자를 파는 계산대와 맞은편에 들어선 허름한 스탠딩테이블 하나가 전부다. 앉는 의자는 아예 없다. 이탈리아 방송은 이탈리아 여행객에게 할렘 피자 맛과 이탈리아 피자 맛이 얼마나 다른지 물어봤다. “미국 피자는 엉망이지만, 할렘 피자는 특별하다”는 형이상학적 답변이 돌아왔다. 더불어 뉴욕 서바이벌 피자집의 단점 4가지도 전해졌다. ‘신용카드 사용이 안 된다’ ‘예약이 안 된다’ ‘화장실이 없다’ ‘앉아서 먹을 공간이 없다’ 등이다.

미국으로 돌아와 ‘2브로스’로 향한 것은 지난해 11월 말이다. 놀랍게도 셔터가 내려져 있다. 인터넷으로 상황을 알아보니까 그동안 두 가지 큰 일이 벌어졌다. 첫 번째로, 문을 닫은 이유다. 시 당국의 위생검사에 걸려 3개월간 영업정지를 당했다. 부엌에 돌아다니는 쥐가 발견된 것이 이유다. 할렘에 대한 편견일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쥐가 나와 영업정지를 당하는 레스토랑도 극히 드물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는 히스패닉 종업원이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최저임금도 주지 않고 하루 종일 부려먹었다는 것이 이유다. 결과는 1~2년 뒤에나 나오겠지만, 맨해튼에서 가장 싼 가격의 피자를 제공하는 대가가 아닐까 싶다.

맨해튼 125번가는 할렘의 중심지다. 할렘의 주민 대부분은 기독교인이지만(위) 할렘의 벽 곳곳에는 실종자나 총칼에 의한 피살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아래)
맨해튼 125번가는 할렘의 중심지다. 할렘의 주민 대부분은 기독교인이지만(위) 할렘의 벽 곳곳에는 실종자나 총칼에 의한 피살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아래)

매일 2000~6000명 몰려

할렘 피자집에 다시 들른 것은 지난 4월 초다. 손님들로 북적대는 점심시간대에 갔다. ‘2브로스’는 뉴욕 메트로 125번지역에서 내려 동쪽으로 1분 거리에 있다. 125번지 역 주변은 뉴욕에서 가장 많은 홈리스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낮인데도 역 주변에서 잠과 약에 취한 듯한 홈리스가 넘친다. 피자집에 갔지만 의외로 홈리스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1달러짜리 피자를 찾아온 손님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피자 두 조각과 음료수로 구성된 2달러99센트짜리 ‘특별 피자’가 최고 인기상품이다. 뉴욕에서 피자 한 조각과 음료수의 가격은 보통 4달러 전후다. 거의 반값이다. 필자도 줄을 서서 보통 피자와 음료수를 시켰다. 2달러다. 얼마나 양이 많은지 전부 먹기 어려울 정도다. 피자란 것이 그러하듯 오븐에 구울 경우 전부 맛있게 느껴진다. 계산대에서 일하는 히스패닉계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하루 손님이 어느 정도인가?”

“최고 기록은 6000명 정도다. 보통 하루 2000명 정도다. 오후 4시쯤부터 저녁 내내 사람이 몰린다.”

“1달러짜리 피자 때문에 주변 레스토랑에서 말이 많을 듯한데?”

“싸게 판다고 난리다. 그렇지만 할렘의 최고 명물이 우리 피자집이다. 할렘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들른다. 품질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3.5달러짜리 조각 피자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위생 문제로 영업정지를 당한 걸로 알고 있다.”

“쥐 얘기를 고자질하면서 영업정지로 몰아간 곳이 어디인지 잘 안다. 할렘이 아니라 뉴욕 레스토랑 가운데 쥐에서 자유로운 곳이 어디에 있을까? 열심히 뒤지면 어디선가 튀어나올 뿐이다.”

미국에 피자가 처음 상륙한 것은 1890년대다. 뉴욕이 시발지다. 나폴리에서 온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연 노점 피자집이 기원이다. 뉴욕 거주 이탈리아인을 위한 토속 음식 정도에 불과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 전역으로 확산된다.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 미군들이 피자 맛을 잊지 못하면서 곳곳에 피자집이 생긴 것이다. 바쁘게 활동하는 패스트푸드형 미국 스타일의 피자도 선보인다. 피자를 6등분, 8등분으로 나눈 조각형 피자다. 원래 이탈리아에는 조각형 피자가 없다. 통째로 주문해서 먹다가 남기는 것이 보통이다. 뉴욕에서 시작된 조각형 피자는 미국 전역은 물론 피자의 원조 이탈리아로 역수입된다.

1달러짜리 조각 피자의 현장은 뉴욕 스토리인 동시에 미국 음식 역사의 현장인 셈이다. 물론 홈리스가 애용하는, 쥐도 나오고 임금착취 소송도 벌어지는 뉴욕의 치부 같은 곳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할렘만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맨해튼에 존재하는 최저가 서바이벌 음식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다면, 세계의 부를 창출해내는 월스트리트 이면의 그림자를 살펴보고 싶다면, 할렘의 ‘2브로스’가 최적의 답이 아닐까 싶다. 땀을 흘리며 살아가는 이 시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꽉 찬 삶의 현장이 바로 할렘 피자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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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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