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델리 외곽의 신도시 구르가온의 한 가전양판점에 꽃무늬 투도어 냉장고가 늘어서 있다.
인도 델리 외곽의 신도시 구르가온의 한 가전양판점에 꽃무늬 투도어 냉장고가 늘어서 있다.

인도 최대 상업도시 뭄바이(옛 봄베이)에서 남쪽으로 450㎞가량 떨어진 서부 해변도시 고아(Goa). 아라비아해를 끼고 있는 고아는 인도의 대표적 휴양지다. 1961년 인도에 무력으로 병합되기 전까지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탓에 아직도 포르투갈의 문화적 정취가 강하게 남아 있다. 기독교 문화권이라 힌두교에서 금기시되는 소고기를 비롯 술과 카지노도 자유롭게 허용되는 인도 유일의 해방구다. 지난 7월 9일 고아의 타지호텔은 인도 전역에서 온 광고간판업계 종사자 50여명으로 떠들썩했다. 은행, 병원, 호텔, 주유소 등의 광고간판을 부착하는 시공업체 대표들이었다.

LG하우시스가 고아의 해변가로 인도의 광고업자들을 초청한 것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인도의 옥내외 광고간판시장을 잡기 위해서였다. LG그룹의 건축자재·소재 계열사인 LG하우시스는 옥내외 간판 및 차량 광고에 쓰이는 필름 등 원부자재를 인도 현지에 납품한다. 인도는 연평균 성장률 7%를 상회하는 폭발적 경제성장과 함께 소비시장 역시 팽창하고 있다. 그 최전선에 있는 것이 옥내외 광고간판시장이다. 물건이나 서비스를 판매하기 위해 간판을 붙이는 것은 장사의 기본이다. 은행, 병원, 호텔, 주유소, 식당 등을 가릴 것 없이 남보다 멋진 간판을 달아 고객을 사로잡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광고간판은 기업의 얼굴이다. 간판이 지저분하면 기업 이미지에 손상이 간다. LG하우시스의 박병좌 기술부장은 “태양에 노출됐을 때 덜 변색되고, 바람과 비와 같은 외부충격을 잘 견뎌야 한다”며 “얇고 가벼워야 태풍과 같은 강한 바람에 떨어질 염려가 없다”고 했다. 특히 인도와 같이 무덥고 습한 기후에서는 극한의 날씨에도 잘 견디는 내구성이 요구된다. 툭하면 정전이 될 정도로 전력사정이 열악한 인도에서는 빛을 잘 투과해 절전효과도 있고, 전기료를 덜 내는 간판 소재가 환영받는다.

미국 3M 넘어라!

그간 시공업자들은 광고간판 소재 선택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기술적인 영역이라 일반인들은 잘 알기가 어렵다. 하지만 워낙 땅덩어리가 크고 교통이 불편해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확하고 제대로 된 제품 설명을 듣고 정보교류를 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간판 시공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12억 인도의 광고간판시장을 잡는 셈이다. 실제 이날 행사에서는 “재고를 얼마나 빨리 확보할 수 있나” “소재의 내구성이 얼마나 되느냐”는 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인도 내륙 하이데라바드에서 왔다는 비제이 파비랄라씨는 “LG 제품은 미국 3M보다 가격은 저렴한데 품질이 괜찮다”며 “네트워킹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사실 LG하우시스는 광고간판 소재 시장에서 미국의 3M과 에이버리(Avery) 등을 추격하는 입장에 있다. ‘포스트잇’으로 유명한 3M은 세계 광고간판 소재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절대 강자다. 한 국가의 광고간판 기술표준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하다. 하지만 LG하우시스는 가격경쟁력과 한국 특유의 속도와 친화력을 앞세워 인도의 인조대리석시장에서 미국 굴지의 화학기업인 듀폰을 따라잡은 전례가 있다. LG하우시스는 광고간판 소재 시장에서도 3M을 꺾는 한판 역전승을 기대하고 있다.

폭발하는 인도 소비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경쟁이 뜨겁다. 연평균 7%가 넘는 경제성장을 구가하는 인도의 인구는 중국(13억)에 이은 세계 2위인 12억명. 이 중 4억명은 중산층으로 추산된다. 어지간한 국가의 인구보다 많다. 중산층의 성장은 곧 소비로 이어진다. 요즘 인도에서 마하트마 간디로 상징되는 ‘청빈과 검소’는 이미 옛말이다. 전통의상인 사리를 휘감은 인도 여성들은 간디의 초상화가 새겨진 루피화를 물 쓰듯 쓴다. 출퇴근 시간 도로는 질주하는 오토릭샤(삼륜차)와 일제 스즈키 소형차로 넘치고, 델리의 관문인 인디라간디국제공항은 저가항공(LCC)을 타고 국내외 휴양지로 떠나는 여행객들로 인산인해였다. 중산층 소비 열기는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인도의 여름 날씨와 비슷했다.

사실 인도는 1947년 독립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만성적 물자부족에 시달려왔다.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의 수입대체산업화 정책 탓이다. 동아시아의 기적을 이뤄낸 한국 박정희의 수출주도형 성장이나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의 외자도입형 성장과는 다른 노선이었다. 사실 2차 대전 후 신생독립한 대부분의 식민지 국가들이 채택한 정책이지만 별로 성공한 사례가 없다. 결국 네루의 수입대체산업화 정책 기조는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 전 총리, 외손자인 라지브 간디 전 총리 등 소위 ‘네루·간디 왕조’의 장기집권 내내 이어졌다.

구르가온의 포르티스병원 푸드코트 선반에 시공된 인조대리석.
구르가온의 포르티스병원 푸드코트 선반에 시공된 인조대리석.

인구 세계 2위… 폭발하는 소비시장

하지만 1991년 신경제정책(NEP) 도입 이후 바뀌기 시작했다. 신경제정책은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에 비견되는 경제개혁 조치다.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만모한 싱의 주도로 이루어진 신경제정책을 추진한 직후 인도는 연평균 7%가 넘는 경제성장을 구가했다. 2001년 미국 골드만삭스의 짐 오닐이 ‘브릭스(BRICs)’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면서 인도는 브라질, 러시아, 중국, 남아공과 함께 세계 경제의 새로운 성장엔진이 됐다. 빠른 경제성장 덕에 만모한 싱은 2004년부터 2014년까지 총리를 지내며 인도를 이끌었다. 후임인 나렌드라 모디 현 총리 역시 2014년 집권 후 ‘메이크 인 인디아(Make in India)’ 정책을 표방하며 제조업 위주 경제성장을 모색 중이다.

인도 중산층의 성장을 가장 잘 목도할 수 있는 곳은 수도 델리 외곽의 구르가온이다. 델리의 관문인 인디라간디국제공항에서 서남쪽으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신도시다. 행정구역상 델리가 아닌 하리아나주(州)에 속한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 외곽의 경기도 분당쯤에 해당하는 위성도시다. LG하우시스를 비롯 삼성전자, 코트라 등 한국 및 일본계 상사나 기관 대부분이 구르가온에 둥지를 틀고 있다. 델리와 달리 최신 오피스빌딩과 특급호텔, 고층 아파트를 쉽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차창을 두드리는 거지와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물소, 돼지, 개가 공존하는 묘한 도시다.

냉장고 표면재시장 40% 장악

지난 7월 7일 찾아간 구르가온의 가전제품 양판점 크로마(Croma). 크로마는 인도 최대 재벌인 타타(TATA)그룹이 호주의 대형마트인 울워스와 함께 설립한 가전제품 양판점이다. 크로마에 들어가자 화려한 색감의 인도 전통의상 사리를 온몸에 휘감은 여성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이 중 인도 주부들의 눈길을 독차지한 것은 가전양판점 한쪽에 줄줄이 늘어서 있는 원도어, 투도어의 소형 냉장고였다. 인도 가전시장 1위의 LG전자를 비롯해 삼성전자, 미국의 월풀, 중국의 하이얼, 인도의 고드리지(Godrej) 등이 소형 냉장고를 일렬로 늘어세워 놓고 인도 주부들의 여심(女心)을 공략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 중 LG, 월풀, 고드리지의 냉장고 문짝에는 LG하우시스가 납품한 ‘고광택필름’이 표면마감재로 부착돼 있었다. 고광택필름은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의 표면에 부착해 제품 표면을 보호하고 고급스럽게 만들어주는 필름이다. ‘백색가전’이란 말처럼 과거에는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의 표면이 하얀색 페인트로 도장됐다. 하지만 페인트 도장방식은 디자인이 단조롭고 표면 품질이 균일하지 못해 최근 국내에서는 저가제품에만 적용된다. 반면 고광택필름을 냉장고 표면에 부착하면 다양한 디자인을 구현할 수 있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난다. 인도에서는 여전히 페인트 도장방식이 많지만, 점차 고광택필름으로 옮겨가는 추세다.

LG하우시스는 화사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인도 주부들의 특성을 고려해 고광택필름에 와인색, 커피색, 보라색 바탕의 화려한 꽃무늬를 집어넣었다. 인도 가전 소비자들의 취향을 철저히 분석해 LG전자와 함께 개발한 디자인이다. 이 고광택필름은 델리 동남쪽 노이다에 자리한 LG전자 현지 생산공장에서 냉장고 문짝에 부착돼 인도 전역으로 실려 나간다. 과거 LG전자가 자물쇠가 달린 냉장고로 인도 시장 1위에 오른 데 이은 후속작품인데, 대박 조짐이다. 앞서 가정부와 원숭이가 냉장고에서 함부로 음식을 꺼내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자물쇠 냉장고는 대박을 쳤다.

매장 관계자에 따르면, 요즘 인도 주부들의 눈길이 가장 많이 가는 냉장고는 꽃무늬의 고광택필름을 부착한 원도어 제품이다. 이는 크로마뿐만 아니라 기자가 둘러본 릴라이언스나 샤르감, 비재이 등 다른 경쟁 가전양판점에서도 비슷한 현상이다. 요즘은 경쟁사들마저 비슷한 꽃무늬 디자인의 고광택필름을 LG하우시스에 요청할 정도로 인기다. 덕분에 LG하우시스는 인도 냉장고 표면재시장의 40% 이상을 장악할 수 있었다. LG하우시스의 비솨 나라얀 프라사드 매니저는 “기술적인 면을 주로 생각하는 남성과 달리 여성들은 색상과 디자인을 중시한다”며 “인도에서도 가전제품을 결정하는 것은 여자들의 몫”이라고 했다.

고광택필름시장은 무궁무진한 성장가능성을 갖고 있다. 인도 전체의 냉장고 보급률은 아직 20%가량에 그친다.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소득수준이 낮은 농촌 탓이다. 무덥고 습한 기후와 종교적인 이유로 소고기와 돼지고기 등 상하고 변질되기 쉬운 육류를 거의 먹지 않고, 당일 조리해 당일 먹는 습관, 부족한 전력 때문에 냉장고 사용이 보편화되지 않았다. 주력 제품 역시 문짝이 네 개나 달린 포도어까지 진화한 한국과 달리, 인도는 아직까지 원도어, 투도어 등 190~220L가량의 소형 냉장고가 주력 제품이다.

하지만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벵갈루루(옛 방갈로르)와 첸나이(옛 마드라스) 등 남부 대도시 중산층 소비자를 중심으로 냉장고 보급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주로 병음료를 비롯해 디저트, 과일 등을 저장보관하는 데 쓰인다. 이 같은 소비흐름이 최근에는 농촌까지 이어져 수확기가 끝나면 소액대출 등을 통해 소형 냉장고가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도시의 중산층을 상대로는 아래위 투도어, 양문형 투도어 식으로 냉장고시장의 교체수요 역시 시작되고 있다. LG하우시스 인도법인의 이동근 부장은 “12억 인구의 냉장고 문짝에만 고광택필름을 붙여도 엄청난 시장이 열리는 셈”이라고 했다.

인조대리석 역시 인도 중산층 시장을 겨냥한 제품이다. 인조대리석은 한국의 아파트 주방이나 식당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마감재다. 플라스틱 합성수지를 돌가루와 적당히 혼합해 대리석과 비슷한 질감을 만들어낸 건축 소재다. 천연대리석은 고급스러운 느낌은 나지만, 물기를 머금으면 물때가 끼고 부식하기 쉽다. 인조대리석은 물기를 흡수하지 않아 행주나 걸레로 ‘쓱’ 닦아내기만 하면 그만이다. 이로 인해 물을 많이 사용해 물때나 곰팡이가 끼기 쉬운 주방이나 식당 등지에서 선호됐다. 사실 인조대리석 사업을 먼저 시작한 곳은 미국 굴지의 화학회사 듀폰이다. LG는 듀폰보다 수십 년 늦게 인조대리석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인도에서는 지난해부터 기술력과 전국적인 유통망을 앞세워 듀폰을 꺾고 1위 업체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7월 9일 인도 고아에서 LG하우시스가 광고간판업체를 대상으로 연 제품설명회.
지난 7월 9일 인도 고아에서 LG하우시스가 광고간판업체를 대상으로 연 제품설명회.

선발주자 미국 듀폰 꺾고 1위

구르가온 시내에서는 은행과 병원, 전철역 곳곳에서 LG하우시스가 납품했다는 인조대리석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구르가온 후다시티센터역 인근의 포르티스병원. 400병상 규모의 이 병원은 인도 최대 제약사인 란박시 출신들이 세운 체인형 전문병원이다. 시설 수준이 구르가온에서도 손꼽히는 대형병원이다. 지난 7월 7일 찾아간 포르티스병원 곳곳에서는 LG하우시스가 납품했다는 인조대리석 ‘하이막스’를 찾아볼 수 있었다. 우선 병원 입구의 안내데스크를 비롯해 병원 내 실험실, 병원 한쪽에 마련된 푸드코트의 선반은 모두 인조대리석으로 시공돼 있었다. 세계 최대 결핵국가일 정도로 위생수준이 열악한 인도에서 종합병원은 그나마 위생요구가 엄격한 몇 안 되는 곳이다. LG하우시스 인도법인에서 인조대리석을 취급하는 디네시 싱 사업개발매니저는 “병원 곳곳에 일반 대리석보다 얼룩이나 오염을 제거하기 쉬운 인조대리석을 사용했다”며 “대리석이나 일반 페인트칠 벽에 비해 때가 잘 안 묻고, 닦아내기도 좋다”고 말했다.

인조대리석은 구르가온 시내의 전철역인 후다시티센터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후다시티센터역은 구르가온에서 뉴델리역까지 이어지는 옐로라인 전철의 시종착역이다. 역사 1층에는 서울의 여느 전철역과 같이 스타벅스 등 상업시설이 입점해 있었다. 살인적인 무더위와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해 역사 1층 스타벅스에 들어가니 이곳에도 커피를 건네받는 카운터와 음료와 쓰레기를 버리는 곳에 검정색 계열의 인조대리석이 부착돼 있었다. 수많은 통근자들이 이용해 때가 묻기 쉬운 역사 내 계단 등도 하얀색 인조대리석으로 시공돼 있었다.

일찍이 하얀 대리석으로 타지마할을 지어올렸을 정도로 대리석이 흔한 인도라 아직은 인조대리석이 천연대리석보다 비싸다. 하지만 기능성 면에서 인조대리석은 공항, 호텔, 병원 등 상업시설과 공공시설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고 있다. 돌에 비해 둥글고 복잡한 디자인으로 가공하기 쉬운 것은 최대 장점이다. 최근에는 건물 외부장식이나 심지어 힌두교사원에까지 인조대리석을 납품하고 있다. 힌두교사원 등에는 돌을 가공해 만든 코끼리와 같은 복잡한 모양의 장식품이 많다. 돌을 일일이 쪼아서 만들기에는 시간도 오래 걸릴 뿐더러 제작과정에서 상할 수도 있다. 인조대리석을 쓰면 가공시간도 짧고, 복잡한 모양을 금세 만들 수 있다. LG하우시스 인도법인의 장완규 차장은 “접합 부위는 같은 물성의 소재를 사용한 전용접착제로 이어붙이기 때문에 이음매를 육안으로 찾아내기가 힘들 정도”라고 말했다.

인도는 마지막 남은 12억 황금시장이다. 기후나 위생, 치안 등은 아직 열악하지만, 영어가 원활히 통하는 몇 안 되는 시장이다. 최근에는 LG뿐만 아니라 삼성, 현대차 등 한국 기업의 진출이 늘면서 현지 한인식당에는 주재원들을 위한 ‘다금바리’와 ‘통영멍게’ 같은 싱싱한 횟감까지 공수될 정도로 사업환경이 좋아졌다. 항공편은 기존에는 대한항공이 뭄바이, 아시아나항공이 델리로 시장을 나눠 먹고 있어 공급도 부족하고 가격도 비쌌다. 오는 12월부터는 대한항공이 델리에 취항할 예정이라 공급력 증대는 물론 가격경쟁까지 기대된다. 영국은 인도를 바탕으로 대영제국 번영의 기틀을 닦았다. 한국 경제의 활로 역시 인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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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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