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3일 수천 명의 시위대가 뉴욕 5번가를 걸으며 트럼프 대통령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photo AFP·연합
지난 11월 13일 수천 명의 시위대가 뉴욕 5번가를 걸으며 트럼프 대통령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photo AFP·연합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난 주말, 이례적으로 선거 결과에 불만을 품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길거리에 나와 ‘트럼프는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Trump is not my president)’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트럼프타워가 있는 뉴욕 맨해튼 5번가도 이 시위대들로 인해 주말 내내 몸살을 앓아야 했다. 대학에 다니는 아이들의 전언에 의하면 캠퍼스는 암흑적 분위기 그 자체라고 한다.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던 미국의 가치가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에 대한 지성인들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선거 당일만 해도 민주당은 거의 축제 분위기, 공화당은 기적을 바라는 분위기였다. 민주당이 온통 유리로 둘러싸여 있는 맨해튼 최대의 전시장을 당선 축하파티 장소로 예약한 이유도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이보다 대략 2.5㎞ 떨어진 곳에 캠프를 차린 트럼프 진영은 특별한 이벤트가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수심에 잠겨 있었다. 아마 패배라는 말을 담지 않은 사람은 트럼프가 유일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결과는 트럼프의 압승은 아니라도 완승이었다. 모든 사람들의 예측이 빗나가 버렸다. 그런데 이와 같이 예측이 철저하게 빗나간 선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48년 대통령 선거가 바로 그 예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과 언론들은 공화당의 토머스 듀이가 당선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망으로 1945년 대통령 자리를 승계한 트루먼은 존재감도 인기도 별로 없는 정치인이었다. 아이젠하워가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면 러닝메이트가 될 의향이 있다고 스스로 밝혔을 정도였다. 민주당 내부에서 트루먼을 내쫓고 다른 사람을 후보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자연히 공화당은 누가 나와도 민주당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여론에 고무되어 있었다. 공화당 후보 지명전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 중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이젠하워 장군과 맥아더 장군도 들어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군인 신분으로 출마할 수 없다는 핑계로 공화당 지명전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맥아더는 만약 공화당이 자신을 후보로 지명하면 출마할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는 민주당으로부터도 출마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공화당 후보로 지명된 토머스 듀이 뉴욕주 주지사는 선거 두 달 전인 9월 여론조사에서 트루먼을 거의 17%포인트 차로, 10월에는 10%포인트 차로 앞서 나갔다. 그러다 선거 일주일 전에는 그 차이가 5%포인트가량으로 좁혀졌다. 당만 바뀌었을 뿐, 2016년 10월의 힐러리와 트럼프와 비슷한 형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루먼이 이길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들이나 언론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힐러리가 이길 것이라고 예상했듯이. 실제로 시카고트리뷴은 토머스 듀이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는 기사를 헤드라인으로 뽑기도 했다. 토머스 듀이가 시카고트리뷴을 들고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은 그래서 대통령 선거 오보 기사의 백미 중 하나이다.

그런 일이 2016년에 또 벌어진 것이다. 대체로 미국인들은 정직한 편이다. 복선 없이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출한다. 그래서 여론조사 결과도 상당히 믿을 만하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언론이 나서서 트럼프 때리기에 열을 올렸다. 그 이유는 트럼프의 주장이 미국의 가치를 저버리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가치란 흔히들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즉 마땅히 지향해야 할 가치들을 말한다. 예를 들면 인종, 종교의 차별 금지, 남녀 차별 금지 등과 같은 것들이다. 트럼프는 이런 미국의 가치에 도전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의 시선이 없지 않았다. 이것이 여론조사에서 오류가 발생한 배경이다.

트럼프가 선거전을 개시한 이래로 줄기차고도 일관성 있게 펼친 전략이 바로 기득권 때리기이다. 워싱턴 인사이더들이 주장하는 미국의 가치가 정말 옳은 것인가,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강렬한 메시지가 트럼프가 주장한 ‘미국을 다시 강하게(Make America Again)’라는 구호였다. 조금 확대 해석하자면 이 말의 속뜻은 백인들이 중심이 되어 살아가던 시절이 미국이 가장 강한 시대였고, 다시 백인이 중심이 되어 그 시절의 영화를 되살리자는 메시지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히스패닉들을 공격하고, 무슬림을 차별하며, 남성우월주의를 과시하는 것이었다.

시대착오적 메시지가 통한 이유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트럼프의 이 인사이더 때리기의 첫 번째 타깃이 공화당의 가장 강력한 후보로 거론되던 젭 부시이다. 첫 번째 당내 토론회에서 트럼프로부터 ‘맥없는 사람(Low Energy Person)’이라는 공격을 받고 그 프레임에 허덕이다 불과 두 달 후에 후보를 사퇴하고 말았다. 그렇게 그는 당내 후보 16명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공화당 후보를 거머쥐었다.

10월에 터져나온 여성 스캔들은 힐러리에게는 날개를 달아준 것 같았고, 트럼프에게는 회복 불능의 치명상을 안겨준 것처럼 보였다. 유권자의 절반인 여성표의 절대 다수가 힐러리를 지지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평면적 분석은 선거 결과 오류임이 밝혀졌다. 고졸 이하의 백인 직장여성들은 트럼프의 그런 여성 문제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를 힐러리보다 28%포인트나 더 많이 지지하였다. 트럼프의 열혈 지지층이 저학력 백인 남성으로 알려져왔고 선거 결과도 그렇게 나왔지만, 사실 실생활에서 그들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저학력 백인 여성들이다. 그들이 트럼프를 지지한 이유는 ‘닥치고 경제’였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기독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나라에서 무슬림이 활개를 치는 것에 대해, 그들과 모든 것을 동등하게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복음주의자들은 엄청난 심리적 거부감이 있었다. 이들에게는 기독교 복음주의만 부흥할 수 있다면 여성비하와 같은 메시지는 한쪽 귀로 흘릴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아들을 미국을 위한 전선에 바쳤다고 해도 무슬림이 공공연히 트럼프를 꾸짖는 것에 대해서도 그들은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밝힌 유권자의 81%가 트럼프를 지지하였다.

백인 중심의 증오와 차별과 왕따는 트럼프가 명시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일관되게 유지한 선거전략이었다. 이와 같은 시대착오적 메시지는 미국의 소외계층에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먹혀들어 갔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라 할 수 있는 저학력·저소득 계층이 그들의 이익을 더 잘 대변하는 민주당을 외면하고, 신자유주의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았고, 그런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트럼프를 지지하게 된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러니다.

자연히 백인에 의한 소수인종 린치 사건이 발생하고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이 난무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길거리에 나선 것이 아니라, 바로 국민의 일부를 무시하고 차별하려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것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도 이런 시위가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거리에서 고함을 외치는 이유는 트럼프가 지향하는 바와 다른 목소리가 미국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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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효현 경기텍스타일센터 뉴욕사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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