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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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주식시장의 심장부를 꼽을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곳이 서울 여의도다. 100개가 넘는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들의 본사가 여의도를 채우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 외국계 금융·투자사들의 한국 법인과 지점들 역시 여의도 곳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 대표적 감독기관인 금융감독원과 자본거래의 상징인 한국거래소 역시 여의도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다. 이런 이유로 여의도는 ‘한국 주식시장 1번지’로 불리며 투자시장의 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여의도가 흔들리고 있다. 최근 몇 년 대형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들이 미련 없이 여의도를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12월 말과 올 1월 초, 대형 증권사 두 곳이 여의도를 떠나자 ‘금융·투자사들의 탈여의도 현상이 앞으로 더 거세질 수 있다’는 전망이 커지고 있다.

2016년 12월 30일, 한국 증권업계 자기자본 1위 미래에셋대우(옛 대우증권)가 34년간의 여의도 생활을 접고 청계천 옆 중구 을지로로 떠났다. 미래에셋대우의 여의도 이탈은 최대주주인 미래에셋의 결정에 의한 것이다. 정부의 공적자금 회수와 금융사 민영화 정책에 따라 KDB산업은행이 대우증권을 M&A 매물로 내놨었다. 이런 대우증권을 2015년 12월, 2조4500억원을 베팅한 미래에셋이 인수해 버렸다. 그리고는 2016년 4월, 대우증권이라는 간판을 버리고 이름까지 미래에셋대우로 바꿔 버렸다. 조만간 변화가 있을 것임을 예고했다. 결국 2016년의 해가 저물기 직전이던 12월 30일 미래에셋증권과 미래에셋대우가 법적으로 완전히 합병됐다. 그리고 이날 지난 34년 동안 여의도 증권가를 지키고 있던 미래에셋대우가 미래에셋의 주요 계열사들이 모여 있는 을지로 센터원 빌딩으로 본사를 옮긴 것이다.

불과 5일 후인 2017년 1월 4일, 새해가 밝자마자 한국 증권업계 터줏대감인 자산 19조5940억원짜리 대신증권 역시 탈여의도 행렬에 합류하며 명동성당 바로 옆 중구 저동으로 본사를 옮겼다. 며칠 간격으로 벌어진 이 두 대형 증권사의 여의도 이탈에 대해 상당수 증권업계 관계자들은 “주식시장 1번지라는 여의도의 위상이 예상보다 더 빠르게 축소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예”라거나 “여의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1970년대 말 주식시장 1번지

여의도는 국회를 중심으로 한 한국 의회 정치와 주식(株式)으로 대표되는 투자시장의 중심지다. 총면적이 2.9㎢에 불과하지만 권력과 돈이 모여드는 대표적인 곳이 바로 서울의 여의도다. 이런 여의도에 한국거래소와 증권사·자산운용사 등 각종 금융·투자사들이 모여들며 증권가(街)를 형성하기 시작한 건 1970년대 후반이다. 1968년 정부와 서울시가 한강종합개발 공사를 하며 여의도 개발에 나섰고 그 개발의 한 부분으로 1979년 명동에 있던 증권거래소를 여의도로 옮겼다. 증권거래소가 여의도에 자리를 잡자 그 뒤를 이어 명동과 을지로에 있던 증권사와 투신·운용사들의 본사가 속속 여의도로 모여들었다.

재미있는 부분이다. 1980년대 초 증권사들의 여의도행에 불을 지핀 곳이 바로 지난해 12월 30일 여의도를 떠난 대우증권이라는 점이다. 1970년 만들어진 대우증권은 1982년, 전격적으로 개발이 한창이던 여의도로 본사를 옮겼다. 당시 주요 증권사 중 사실상 가장 먼저 여의도에 둥지를 틀었다. 이것을 기폭제로 이후 다른 증권사와 투신·운용사들 역시 증권거래소가 있는 여의도로 빠르게 이전해왔다. 참고로 2017년 여의도 이탈 1호 금융사인 대신증권 역시 1985년 명동에서 여의도로 본사를 옮겼다.

이렇게 1980년대 중반까지 주요 증권사와 투신·운용사들이 여의도로 몰려들었다. 마침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폭등한 주식시장의 분위기와 맞물리며 여의도가 단숨에 한국 투자시장의 중심부로 떠올랐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이런 여의도의 위상에 조금씩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몇몇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들이 여의도를 떠나기 시작했다. 사실 2000년대 이전 여의도를 떠나 다른 곳으로 본사를 옮긴 증권사도 있다. 1995년 여의도를 떠난 삼성증권이다. 1992년 삼성그룹 계열사로 편입된 삼성증권은, 삼성의 계열사가 된 지 3년 만에 여의도를 떠나 서울 중구 을지로2가로 본사를 옮겼다. 그런데 이때만 해도 삼성증권은 증권업계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삼성그룹 내에서조차 변방 계열사로 꼽혔고, 특히 시장에서는 그저 금융사 하나를 갖고 싶어 하는 재벌기업 중 한 곳이 사들인 중형 증권사 정도일 뿐이라는 인식이 컸다. 삼성그룹 입장에서도 증권사란 이유만으로 굳이 삼성증권을 여의도에 둘 필요가 없었다. 특히 삼성그룹 오너와 최고경영진은 전통적으로 그룹 본사와 가까운 위치에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계열사 본사를 두는 특징이 있다. 삼성 오너가와 최고경영진의 기업 운영방식 때문이다. 1990년대 서울 중구 태평로와 을지로 일대에 이른바 ‘삼성타운’이 형성됐었던 것도 이런 이유였다. 어쨌든 삼성증권은 1995년 여의도가 아닌 삼성그룹 계열사들이 모여 있는 중구 을지로에 합류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당시만 해도 증권가에서 존재감이 미미했던 삼성증권이기에 주식시장 1번지 여의도의 위상에 상처를 내지는 못했다.

여의도 흔든 동양증권의 명동行

오히려 2004년 동양종합금융과 합병한 유안타증권(옛 동양증권)이 여의도 본사를 팔고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과 을지로3가역 사이, 흔히 명동으로 통칭되는 곳으로 이사를 한 사건이 증권사와 운용사들의 여의도 이탈 본격화의 시발점으로 꼽힌다. 동양증권은 당시 펀드투자 열풍 덕에 덩달아 인기와 호황을 누렸던 CMA시장에서 1위 증권사(종합금융사)였다. 그런 동양증권의 여의도 이탈은 비용절감과 영업 환경을 고민하던 증권사와 운용사들에 집중조명됐다. 그러면서 증권사와 운용사들의 탈여의도 바람의 시작점 역할을 한 셈이다.

동양증권의 여의도 이탈 1년 뒤인 2005년, 형식적 요식행위이긴 했지만 한국거래소가 본사 소재지를 여의도에서 부산으로 옮기는 사건이 이어졌다. 당시 정부가 추진한 공공기관들의 지방 이전 정책에 따라 한국거래소가 본사 주소지를 부산 남구 문현동으로 이전했다. 본사 주소지를 옮기긴 했지만 사실 한국거래소는 주식 등 금융·투자 상품의 거래와 부정거래 관리 등 주요기능과 부서, 또 인력 대부분을 서울 여의도에 그대로 뒀다. 하지만 실제 역할이 어떻든 한국거래소의 법적 본사 소재지가 여의도가 아닌 부산으로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의도의 위상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이후 2011년 미래에셋증권과 계열사들이 여의도를 떠나 중구 을지로 센터원 빌딩으로 모여들었다. 삼성자산운용 역시 삼성그룹의 금융계열사 집중화 전략에 따라 여의도를 떠나 중구 태평로 삼성본관으로 본사를 옮겼다. 2012년에는 금융시장 정책을 수립하고 관리·감독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 금융위원회도 여의도를 떠나 서울 시청 옆 프레스센터에 새 둥지를 차렸다. 금융위원회는 2009년 12월 여의도에 대해 “금융기관이 집적돼 있고 높은 수준의 경영 인프라를 갖추고 있어 한국의 대표적인 종합 금융 중심지로 키울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던 곳이다. 더구나 이런 계획에 따라 여의도를 금융 중심지로 조성하기 위한 세부 계획까지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랬던 금융위원회가 2012년 여의도를 탈출해 청와대와 정부종합청사, 즉 중앙권력과 더 가까운 곳에 새로 둥지를 트는 행보를 보이면서 여의도의 위상은 다시 한 번 큰 상처을 입었다.

2013년에는 자산운용사들의 여의도 이탈이 두드러졌다. 펀드 전성기 증권가의 스타로 불렸던 강방천 회장의 에셋플러스자산운용이 여의도를 떠나 본사를 성남시 분당으로 옮겼다. 메리츠자산운용 역시 미국에서 건너온 존 리를 CEO로 임명하며 여의도를 떠났다. 그리고는 증권가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종로구 북촌으로 본사를 전격 이전했다. 2014년에는 유가증권 예탁 기능을 하고 있는 한국예탁결제원이 한국거래소의 본사 주소지 이전에 영향을 받아 역시 부산으로 본사를 옮겼다. 그리고 지난해 말 여의도 증권가의 터줏대감이던 대우증권의 후신 미래에셋대우가 34년의 여의도 생활을 청산했고, 올 1월 초 대신증권까지 여의도를 떠났다.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등 금융·투자사들이 왜 주식시장 1번지라는 여의도를 떠나고 있는 것일까. 삼성증권처럼 계열사의 지배·관리가 상대적으로 쉬운 집적화를 선호하는 그룹 오너가와 최고경영진의 경영 방식 때문인 경우도 있고, 미래에셋대우처럼 기업이 M&A를 통해 통째로 팔리면서 여의도 본사를 이전한 경우도 있다. 또 미래에셋과 대신증권처럼 보유하거나 투자한 서울 시내 부지에 현대식 고층빌딩을 지어 이곳으로 본사를 이전하는 사례도 있다. 이 경우 상당수 금융·투자사들이 표면적으로 여의도의 협소한 업무공간 문제 해소를 내세우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개발 사업을 통해 투자하거나 보유한 자산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은 물론 향후 투자와 임대 수익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대신증권 본사가 여의도를 떠나기 직전 여의도 주식시장을 상징하던 황소상을 철거하고 있는 모습. ⓒphoto 뉴시스
지난해 12월 대신증권 본사가 여의도를 떠나기 직전 여의도 주식시장을 상징하던 황소상을 철거하고 있는 모습. ⓒphoto 뉴시스

여의도 증권가의 구태와 영업 환경 변화

물론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한국의 인터넷망, 또 주식과 선물 등 금융상품 거래에서 수익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결제 및 체결 시스템의 비약적 발전과 다양한 투자 기법 도입 역시 금융·투자사들이 2000년대 이후 굳이 여의도를 고집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로 꼽힌다.

서울 구도심 지역으로 본사를 옮긴 한 자산운용사의 관계자 중 한 명은 기자에게 “인터넷 보급률이 낮고 전산망이 불안하던 1990년대만 해도 증권거래소와 각종 금융사·투자사들이 모여 있는 여의도의 주식투자 인프라가 필요했던 게 사실”이라 “하지만 지금은 굳이 여의도에 본사를 두지 않더라도 여의도에 본사를 둔 증권사나 운용사들과 비교해 금융 업무와 투자 활동에서 전혀 차이를 느낄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효과적 경영이라는 면에서 불편한 교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서울 속 섬인 여의도에 굳이 본사를 유지할 필요성이 적다는 것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치열해지고 있는 영업 환경도 증권사와 운용사들의 여의도 이탈 이유”라며 “LG그룹 정도를 빼면 대기업 본사를 찾기 힘든 여의도에 비해 재벌그룹과 대기업들의 본사 대부분이 집중된 종로나 을지로, 강남 지역이 대형 법인 영업을 하기에 훨씬 유리한 게 현실”이라고 했다. 여의도보다 좀 더 유리한 영업 환경과 더 많은 돈이 모여드는 동네를 찾아 여의도를 떠나는 금융·투자사들이 있다는 것이다.

한 외국계 금융사의 한국 법인 관계자는 “소문과 정보에 의존한 투자와 영업 방식 익숙한 오래된 여의도의 풍토가 쉽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라며 “효과적 투자라는 점에서 지금의 여의도에 후한 점수를 주기는 쉽지 않다”고 있다.

중구·종로 개발에 본사 이전 숟가락 얹기

이렇게 여의도를 떠나는 증권사와 운용사 등 금융·투자사들이 새로운 본사 이전지로 삼고 있는 곳은 주로 어디일까. 이들 중 일부가 서울 강남이나 경기도 성남으로 본사를 이전하기도 하지만 상당수는 중구 을지로와 명동, 또 종로구 일대로 모여들고 있다. 중구와 종로구는 서울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 중 하나다. 동시에 대기업의 본사가 가장 많이 집중돼 있는 곳으로 증권사들에는 여의도에 비해 법인 영업에 유리한 환경이다. 자산운용사 입장에서도 대규모 투자자금 모집에 용의하다. 또 시중은행 본점과 주요 대형 보험사의 본사들이 몰려 있고, 여의도보다 양호한 교통망 등 이미 금융 인프라까지 갖춰져 있다. 1970년대 후반까지 주식시장 1번지로 인정받았을 만큼 증권사와 투신사들이 번성했었던 기억 역시 여의도를 이탈한 금융·투자사들이 이곳에 새 둥지를 틀고 있는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진행되고 있는 서울시의 구도심 개발도 한몫을 하고 있다. 이 개발 계획에 따라 청계천과 명동 등 을지로, 종로 일대에 현대식 고층빌딩들이 새롭게 들어서고 있다. 금융·투자사들 입장에서 협소한 여의도의 기존 공간 대신 본사로 활용할 수 있는 대규모 공간을 좀 더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지역인 셈이다. 더구나 본사로 활용하기 위해 매입하거나 투자해 놓은 부지에 실제로 고층빌딩을 세워 자신들이 직접 둥지를 틀면 투자 자산의 인지도와 가치 상승까지 노릴 수 있고, 이에 따른 투자 수익과 향후 임대 수익까지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투자금 운용으로 수익을 내야 하는 금융·투자사들 입장에서 개발 의지가 크고 개발에 따른 수익성이 좋은 종로와 중구 일대가 여의도 이탈 후 본사 이전 지역으로 선호되고 있는 이유다.

현재 여의도에는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등 금융·투자사가 얼마나 있을까. 기자가 이 수치를 조사했다. 토종과 외국계를 합쳐 증권사 중 29곳, 자산운용사 중 80곳이 여의도에 본사를 두고 있다. 한국에서 영업하고 있는 증권사 중 53.7%, 자산운용사 중 59.3% 등 절반 이상이 여전히 여의도에 본사를 두고 있다. 한국 주식시장의 심장부라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주식시장의 핵심부다. 물론 2000년 이후 이 수치가 빠르게 낮아지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한 현실이다.

한국의 월스트리트와 아시아 금융허브의 꿈을 키우기도 했던 여의도. 그런 여의도의 위상이 흔들리며 중구 명동과 을지로, 종로구 청계천 주변이 1970년대 말 이후 30여년 만에 다시 주목받고 있다. 주식시장 1번지를 두고 향후 여의도와 서울 구도심이 어떤 변화를 맞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조동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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