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7가와 37가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재봉틀을 돌리는 남자상’. ⓒphoto 황효현
맨해튼 7가와 37가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재봉틀을 돌리는 남자상’. ⓒphoto 황효현

뉴욕 맨해튼에는 정식 행정구역은 아니지만 그 지역의 특성에 맞게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다. 첼시, 소호, 미트패킹 디스트릭트, 그리니치빌리지 등이다. 그중 하나가 가먼트 디스트릭트(Garment District)이다. 동서로는 맨해튼의 6가부터 9가 사이, 남북으로는 34가로부터 42가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여기가 세계 패션의 4대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뉴욕의 패션 센터이다.

가먼트 디스트릭트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7가와 39가가 만나는 광장에는 이곳의 특징을 한눈에 보여주는 동상이 두 개 있다. 하나는 단추에 실을 꿰는 듯한 바늘 동상이 그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옷을 만들고 있는 재봉사 동상이다. 등을 구부린 채 재봉틀 밟기에 열중하고 있는 이 동상에서 우리는 가먼트 디스트릭트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동상의 주인공은 남자다. 그리고 그는 꽤 나이가 들어 보인다. 게다가 한눈에도 그가 유대인임을 알 수 있는 키파(KIPPAH·유대인이 머리 위에 쓰고 다니는 창이 없고 평평한 모자)를 착용하고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북미대륙에 도착한 유대인들은 그럴듯한 일거리가 없었다. 그들이 찾아낸 삶의 방편이 바로 봉제였다. 기계 하나만 있으면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옷을 만들었다. 재봉틀 한 대의 가내공업은 곧 봉제공장으로 발전하였고, 봉제로 돈을 벌어 빌딩을 사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1세대가 지나가자 2세대는 거의 대부분 빌딩 임대업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지금 맨해튼의 주요 빌딩과 그 빌딩에 입주해 있는 패션 기업의 소유주들이 대부분 유대인인 배경이다.

뉴욕은 세계 패션의 수도이다. 뉴욕시 경제개발공사(NYCEDC)에 따르면 약 900개의 글로벌 패션 기업이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다. 나아가 뉴욕은 미국에서 가장 큰 소매시장으로 규모는 매년 150억달러(약 18조원)를 초과한다. 뉴욕시에서 패션 유관 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는 대략 18만명 정도이며, 이들이 연간 받는 급여는 110억달러(약 13조2000억원), 그들의 세금 기여액만 해도 20억달러(약 2조4000억원)에 달한다. 매년 봄과 가을에 열리는 패션위크 기간 동안에는 전 세계에서 약 18만명 이상이 뉴욕을 방문하며, 패션위크가 뉴욕시의 경제에 기여하는 규모는 9억달러 이상으로 이것은 뉴욕 마라톤(3억4000만달러), 2014년 뉴저지에서 개최된 수퍼볼(5억5000만달러), US OPEN 테니스 대회(8억달러)를 초과한다. 패션은 뉴욕의 중심산업이다.

이런 대단한 숫자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패션산업은 엄청난 지각변동에 직면해 있다. 그 배경은 불황이다. 미국 경기는 전반적으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견실하게 회복, 성장해왔다고 하는데 패션산업 분야는 그렇지 않다. 금융, 자동차 등 미국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 기간산업들은 금융위기 후 신속한 구조조정을 통해 부실을 과감히 정리하고 새로운 틀을 마련하여 위기에서 짧은 시간 안에 벗어났다.

그러나 패션 분야는 상대적으로 구조조정이 늦어졌다. 그 이유는 판매가 조금씩 줄어들면서 경영자들이 시황을 착각한 데 있다. 매출이 전년대비 약간 줄어들고 수익도 약간씩 줄어드는 정도에 그침에 따라 강력한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회사가 수익이 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인력을 해고한다든지, 직영 소매점을 닫아버린다든지 하는 단기 처방에 골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실적 부진이 2~3년 계속되자 자연히 재고가 누적되고 현금흐름에 이상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비로소 패션 기업들도 구조조정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015년이 되자 카셰, 존스뉴욕 같은 대기업들이 부도를 내기 시작했다. 다른 분야보다 5~6년 늦어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마존의 패션시장 진출에서 보듯이 온라인의 시장 확대는 자연히 오프라인의 위축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수많은 기업들이 유통단계를 줄임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스토어 바이어들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 외에도 실질적으로 수익도 눈에 띄게 개선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2015년과 2016년, 메이시스, 치코스, 갭, 더 리미티드 등과 같은 키 브랜드들이 전국적으로 수백 개씩 소매점을 폐쇄해 버렸다.

미국 옷값이 싼 진짜 이유

오프라인이 판매의 중심이었을 때는 트렌드를 예측하고, 사전주문을 받아서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생산할 수 있었지만 온라인 중심으로 바뀌면서 이러한 여유 있는 기획도 사라지고 있다. 발주에서 납품까지 8주를 요구하는 기업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8주 납품은 이상적인 목표이기는 하지만 생산지에서 시장까지의 물류에 들어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대단히 공격적인 주문이다. 초단납기(短納期) 요구와 함께 대량 발주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소매점 수가 줄어들면서 그 공간을 채워야 할 기본 물량도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미국 백화점에 가보면 옷값이 정말 싸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소비자들은 행복하겠지만 이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10년 전 가격대를 유지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 생산단가를 줄이는 것이다. 봉제공장은 과거 일본, 한국을 거쳐 중국과 동남아로, 이제는 아프리카까지 진출하고 있다. 그런데 생산단가에서 가격경쟁력을 유지하려던 노력도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결과가 내부 인력 조정이다. 이전에 각자 내부 인력으로 하던 일을 이제는 아웃소싱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패턴과 샘플 제작, 원단 소싱, 제품 생산, 물류센터까지의 납품, 그리고 그것에 따르는 금융 등을 일괄 서비스해주는 풀 패키지 기업들이 점점 더 영역을 확장하면서 브랜드 위에 군림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36가와 40가 사이에 밀집해 있는 빌딩에는 많은 패션 기업들이 입주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브로드웨이 극장가는 이 위치보다는 약간 북쪽, 타임스스퀘어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패션 기업들이 여기에 둥지를 틀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일 수 있겠으나 가장 그럴싸한 추론이 싼 임대료설이다. 1980년대 뉴욕을 다녀간 사람들은 이 지역이 얼마나 우범지대였는지 아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전 세계 어디나 비슷하지만 역이나 터미널 근처는 아무래도 유동인구가 많다보니 우범지대가 되기 쉽다. 임대료도 상대적으로 저렴했을 것이다. 게다가 여기서 한두 블록만 뒤로 가면 봉제공장이 즐비했으니 입지로는 그만이지 않았을까.

이곳에 쇼룸을 가지고 있는 기업들은 직원이 사장 포함 4~5명인 경우가 많다. 이 정도 규모의 회사들이 연간 만들어내는 매출은 대략 2000만달러에서 3000만달러가량 된다.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다. 디자인과 판매 외의 모든 기능은 아웃소싱으로 처리함으로써 수익성을 유지한다.

세계 패션의 중심지라는 뉴욕은 오로지 디자인이라는 소프트파워에 의지하여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패션은 디자인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아웃소싱에 의존하고 있는 뉴욕의 패션산업은 다가오는 환경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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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효현 경기텍스타일센터 뉴욕사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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