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의 한 아파트 노인정. 평일 낮 시간을 보내고 있던 노인 11명에게 평소의 영양 섭취 상태와 건강·기호식품 섭취 여부에 대해 물어봤다.

11명 노인 중 가장 어린 사람은 71세인 정금희씨였다. 여자 노인은 11명 중 7명, 자녀와 함께 사는 노인은 1명에 불과했다. 청소·경비·폐지 수집 등으로 수입이 있는 노인은 6명이었고 배우자 없이 홀로 사는 노인도 1명 있었다.

이들에게 요즘 식품시장은 “완전히 다른 세상 이야기”다. “대형마트나 편의점이나 다 가 봐도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은 거의 없어. 얼마 전에 아들이 요즘 유행하는 거라고 빵 같은 걸 사들고 왔는데 딱딱해서 먹을 수가 없더라니까.” 74세 김명자씨가 한 얘기다.

11명 노인 모두는 ‘노인을 위한 식품’을 접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대답했다. 대신 10명은 건강식품을 섭취하고 있었다. 마침 약통과 약봉지를 들고 있던 윤수철씨와 김숙희씨의 건강식품을 살펴봤다. 올해 여든 살인 윤씨는 50세 이상 장년층 남성에게 좋다는 비타민 제품을 먹고 있었다. 79세인 김씨의 홍삼 제품에는 섭취하면 좋은 연령대가 딱히 적혀 있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말 기준으로 보면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699만명에 달한다. 만 14세 미만 인구가 692만명이니 전체 인구 중 아동 인구보다 노인 인구의 비율이 더 커진 셈이다. 유통업계에서 노인 인구를 주목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2017년 유통업계 트렌드를 발표했는데 ‘1인 가구 증가’ ‘식품 안전’과 더불어 ‘고령친화식품’이 중요한 키워드로 떠올랐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고령친화식품 시장 규모는 2020년 17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고령친화식품이란 말 그대로 노인들을 위한 건강·기능·기호식품을 말한다. 노인들에게 좋다는 각종 건강식품만 일컫는 것이 아니다. 소화가 힘든 노인들을 위해 곱게 간 죽, 특정 영양소를 강화한 식사 같은 기능식품도 고령친화식품이다. 또 노인들이 좋아하는 곡물가루를 이용한 떡이나 빵, 군것질거리 등 기호식품도 포함한다.

우리보다 고령화 진행 속도가 빠른 일본의 경우 다양한 고령친화식품이 출시되고 있다. 유제품으로 유명한 모리나가유업(森永乳業)은 계열사 구리니코(クリニコ)를 통해 고령친화식품을 잇따라 출시하고 있다. ‘야와라카테이(やわらか亭)’ 시리즈 제품을 보면 노인들의 입맛에 맞게 데우지 않고도 먹을 수 있는 불고기덮밥, 카레라이스 등 다양한 제품이 있다. 일본 야쿠르트(ヤクルト)는 노인에게 좋은 글루코사민, 로열젤리 등을 함유한 ‘야쿠르트 골드(ヤクルト ゴールド)’를 출시해 큰 성공을 거뒀다.

우리나라에서도 2006년 정부가 ‘고령친화산업 진흥법’을 만들고 고령친화식품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취지의 정책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고령친화식품 시장은 좀처럼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노인들 영양불균형 심각

진현정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의 2012년 연구 결과를 보면 CJ, 농심, 남양, 롯데 등 12개 식품 대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고령친화식품 생산을 늘릴 예정이 있다’고 대답한 기업은 10곳에 달했다. CJ는 실제로 2015년 실버 전문 식자재 브랜드 ‘헬씨누리’를 만들어 고령친화식품을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제품 개발 속도는 느린 편이다.

김기향 한국보건산업진흥원 고령친화산업지원센터장은 “식품업계가 고령친화식품을 제조·판매하고 싶어도 기준이나 규격이 마련돼 있지 않고 표시 기준도 없어 쉽게 상품 출시를 못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는 고령친화식품을 ‘유니버설 디자인 푸드(UDF)’라고 부른다. 이미 2003년에 정한 ‘유니버설 디자인 푸드 자체 규격’이 있다. 예를 들면 UDF는 4가지 구분으로 나뉘는데 ‘구분 1’에 속하는 음식은 쉽게 씹을 수 있는 것이다. ‘구분 4’는 안 씹어도 되는 제품이다. 일본 개호식품협회가 2011년 소비자를 대상으로 이에 대해 알고 있는지 조사해 본 결과 75%의 소비자가 “알고 있다”고 응답할 정도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노인들이 앓고 있는 영양불균형 문제는 다른 나라보다 더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박기환 중앙대 식품공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노인들은 심각한 영양불균형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서 “신체적 기능이 떨어지는데 여기에 맞게 조리된 식사가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영양실조로 병원에 가는 노인 환자들도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노인들이 평소 식사에 어려움을 느끼는지 살펴보자. 신광진 세종대 조리외식경영학과 교수의 2016년 연구 결과를 들어보자. 신 교수가 서울 시내 노인종합복지관에 다니는 노인 165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본 결과 “음식을 먹는 데 불편이 없다”는 노인은 31.5%에 불과했다. 대부분 육류를 씹거나 소화시키기 힘들어했고, 해산물이나 채소류를 먹는 것도 어렵다는 노인이 많았다. 먹기 어렵다 보니 고기를 먹는 빈도도 낮았는데 먹고 싶은 음식을 묻는 질문에는 고기를 먹고 싶다는 응답이 월등히 높았다.

일반적으로 나이를 먹으면 미각이 둔화돼 맛을 느끼기 어려워진다. 80세 이상 노인 중에는 냄새를 잘 구별할 수 없는 노인이 늘어난다. 또 치아가 빠지고 치근막이 상실되기 때문에 자연히 씹기 어려운 음식은 피하게 된다. 소화기능도 약해지기 때문에 소화장애가 일어나기 쉽다. ‘티 앤 토스트 신드롬(Tea and Toast Syndrome)’이란 말까지 생길 정도로 노인들의 영양불균형 문제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김초일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연구위원은 이와 관련해 “노인의 영양소 섭취량은 다른 연령대 성인의 60~80%에 불과하다”며 “특히 지방, 단백질, 칼슘 등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인들이 먹을 만한 음식은 부족하다. 노인들의 영양 섭취 방식은 다른 연령대와는 다르다. “막상 외식을 나가도 먹을 음식이 없어서 다시 집에 들어온다”고 여든세 살 박용성씨는 말한다. 대부분 노인들은 빈곤에 시달린다. 이 때문에 구하기 쉽고 저렴한 재료로 늘 비슷한 음식을 해 먹는다는 게 노인들의 설명이다.

고령친화식품이 개발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인의 건강 문제가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지만 그 기본이 되는 고령친화식품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는 게 관련 전문가들의 비판이다. 충분한 영양 섭취가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적절한 식사를 할 때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많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고령친화식품은 만성질환자를 위한 유동식 위주로 개발돼왔다. 그러나 이제 노인들이 행복감을 느끼며 식사할 수 있도록 일반 식품을 개발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일 때다.

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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