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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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 전자·소재 산업을 대표하던 도시바가 생존의 기로에 몰려 있다. 존망을 걱정하는 처지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사실상 망해버린 도시바가 향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판도 재편의 핵으로 떠올라 있다.

2015년 도시바는 7년 동안 벌였던 1562억엔(1조6377억원) 규모의 분식회계가 들통이 났다. 최근에는 자회사 웨스팅하우스를 내세워 추진했던 미국 원자력발전소 건설 사업의 대규모 부실까지 확인됐다. 추정 손실이 최소 6900억엔(7조2347억원)에서 최대 7934억엔(8조3198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사건은 140년 넘게 생존해온 거대기업 도시바를 궁지로 내몰고 있다. 실적 역시 자체 생존을 말하기에는 암울한 상태다. 몇 차례 연기 끝에 지난 4월 11일 내놓은 2016년 4~12월 결산 결과, 적자가 무려 5325억엔(5조5833억원)에 달했다. 영업적자도 5762억엔(6조391억원)에 이른다. 자본금을 까먹은 지는 이미 오래됐다. 지난해 말 기준 자기자본이 -2256억엔(-2조3645억원)으로, 부실을 넘어 당장 파산시켜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불량기업이다.

美·대만·日의 도시바 반도체 M&A 셈법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도시바는 주력인 반도체 사업을 떼어내 ‘도시바메모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도시바메모리를 급하게 M&A시장에 매물로 내놓았다. 돈 될 만한 사업을 팔아 그 돈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겠다는 구상이다. 어쨌든 불량기업 도시바의 알짜 사업 도시바메모리가 그렇게 M&A 매물로 나오자 전 세계 전자·전기·반도체 기업은 물론 사모펀드들까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고 있다.

현재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각광받고 있는 분야가 낸드플래시 메모리(Nand Flash Memory)다. 도시바의 반도체 사업을 인수하면, 그 즉시 낸드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시장 2위로 올라선다. 또 세계 최고 수준으로 알려진 도시바의 핵심 인력과 기술까지 한꺼번에 손에 넣을 수 있다.

세계 반도체 시장의 판도 변화 예고편쯤으로 인식되는 도시바메모리 인수전은 한국과 미국, 대만과 일본 기업들 간 격돌 양상이다. 지난 3월 29일 매각 1차 입찰 마감을 기점으로 미국의 웨스턴디지털(WD)과 대만의 훙하이그룹, 한국의 SK하이닉스와 실버레이크파트너스가 인수 후보로 살아남았다. 미국의 웨스턴디지털은 2000년부터 도시바와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도시바의 일본 내 반도체 생산거점인 미에현 욧카이치시(三重県 四日市) 공장 공동운영권까지 갖고 있다. 웨스턴디지털은 하드디스크 같은 컴퓨터 저장매체로 유명하지만 메모리 반도체 시장 영향력도 크다. 2016년 4분기 기준, 낸드플래시 메모리 세계시장 점유율이 17.7%(D램 익스체인지)에 이른다. 세계 3위다.

대만의 훙하이그룹은 애플의 아이폰을 위탁생산하는 폭스콘을 자회사로 보유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일본의 대형 디스플레이 기업 샤프를 인수해 애플의 하청업체라는 이미지를 벗고 단숨에 디스플레이와 전자산업 강자로 부상해 있다. 한국의 SK하이닉스도 후보로 나섰다. 미국계 사모펀드 실버레이크파트너스도 강력한 인수 후보다. 실버레이크파트너스는 미국의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이 도시바 메모리를 손에 넣기 위해 인수전 전면에 내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외에 4월 중순부터 일본 내에서는 일본산업혁신기구(INCJ)도 인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일본 반도체·전자 산업을 대표하는 도시바메모리를 외국 자본에 넘길 수 없다는 분위기가 커지면서다. INCJ는 사실상 일본 정부가 후원하는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또 도시바의 최대 거래사인 후지쓰와 후지필름홀딩스, 미쓰이그룹 등이 공동으로 자금을 모으면 도시바를 외국 경쟁 기업에 넘기지 않아도 된다는 설까지 파다하다.

이들 중 현재 가장 강력한 인수 후보로는 웨스턴디지털과 훙하이그룹이 꼽힌다. 웨스턴디지털은 2000년부터 제휴 관계로 도시바의 반도체에 상당한 영향을 끼쳐왔다. 특히 도시바가 정확히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투자자이자 반도체 공장 공동운영자인 웨스턴디지털의 동의 없이 반도체 사업을 일방적으로 매각할 경우 법적인 문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웨스턴디지털도 이 점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일본 정부 역시 일본계 기업이나 자본 이외의 도시바메모리 인수 후보들 중 웨스턴디지털에 가장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도체는 일본의 전략산업이다. 경쟁국 기업, 특히 반도체산업 후발 사업자에게 전략기업이던 도시바메모리 매각을 승인할 경우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일본계 기업이나 자본이 도시바메모리를 인수하지 못하면, 차라리 제휴 관계에 있고 일본 내 생산공장을 공동운영하는 웨스턴디지털의 손을 들어주는 게 (매각 승인이) 덜 부담스럽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웨스턴디지털에 결정적 약점이 있다. 돈이다. 경쟁자들에 비해 자본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정확히 공개되지 않고 있지만, 1차 입찰에서 웨스턴디지털은 2조엔이 조금 안 되는 인수희망가를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쟁자들이 2조~3조엔대 인수희망가를 제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어, 이 정도로 도시바메모리를 손에 넣기란 쉽지 않다. 웨스턴디지털 스스로 이런 약점을 잘 알고 있어 일본계 금융사나 펀드를 투자파트너로 끌어들이려 한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낸드플래시 메모리 와이퍼 ⓒphoto 뉴시스
낸드플래시 메모리 와이퍼 ⓒphoto 뉴시스

인수 즉시 낸드플래시 시장 2위 돼

대만 훙하이는 돈을 앞세워 도시바메모리를 삼키려 하고 있다. 1차 입찰에서 훙하이는 3조엔을 넘는 돈을 써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장 돈이 급한 도시바로서는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다. 여기에 폭스콘을 통해 연결된 애플을 인수전에 끌어들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고 일본 자본 중 M&A에 적극적인 소프트뱅크와도 협상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대만 기업의 일본 전략산업 인수에 대한 일본 내 반감이 커지고 있어 훙하이 역시 고민스러운 상태다.

사모펀드 실버레이크파트너스도 1차 입찰에서 2조엔 넘는 가격을 써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버레이크파트너스는 사실 사모펀드를 앞세운 미국 반도체기업 브로드컴의 도시바 인수 전략 카드로 평가된다. 반도체 기술과 인력 유출에 대한 일본의 반감을 희석시키기 위해 브로드컴과 실버레이크파트너스도 미즈호파이낸셜그룹, 스미토모미쓰이파이낸셜그룹 같은 대형 일본 자본을 투자파트너로 끌어들이기 위해 나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SK하이닉스도 인수전에 나섰지만 쉽지 않다는 분석이 대세다. 인수 후보 중 자금 동원력과 시장 영향력이 가장 열세다. 이트레이드증권은 “SK하이닉스 단독 입찰은 부담스러운 상황”임을 언급하기도 했다. 더구나 대만 이상으로 한국의 경쟁 기업에 반도체 사업을 넘겨줄 수 없다는 게 일본의 분위기다. 일부 시장 관계자들은 “SK하이닉스가 불리한 조건이라도 미국이나 일본계 대형 자본을 파트너로 끌어들이고 싶어한다”며 인수전 분위기를 전해줬다.

부실기업으로 전락해 있는 도시바의 반도체 사업을 손에 넣기 위해 전 세계 유력기업들이 도대체 왜 수십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자금을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것일까. 사실 도시바의 반도체 사업은 썩 나쁘지 않다. 낸드플래시 메모리 분야에서 도시바는 삼성전자와 함께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곳이다. 2016년 4분기 기준, 시장점유율 18.3%로 2위다. 그러니 인수 즉시 삼성전자에 이은 시장 2위가 된다.

사실 도시바는 낸드플래시 메모리 산업의 개척자 역할을 해왔다. 세계 최초로 낸드플래시 메모리 상용화에 성공했다. 경쟁력과 기술력에서 삼성전자 바로 뒤란 평이다. 여기에 낸드플래시 메모리 시장의 성장세까지 폭발적이다. 세계 스마트폰 시장과 노트북·데스크톱·태블릿 컴퓨터 시장의 지속적 성장이 낸드플래시 메모리 시장을 빠르게 성장시키고 있다. 그동안 이들 기기의 저장장치로 주로 사용되던 D램을 낸드플래시 메모리가 빠르게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IT 분야 리서치 기업인 가트너는 2015년부터 2020년까지 5년 동안 D램 시장은 연평균 7% 축소되지만 낸드플래시 메모리 시장은 연평균 7.3% 성장한다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니 낸드플래시 메모리 기술과 인력을 이미 축적해 놓은 도시바에 전 세계 전자·반도체·소재 기업들이 군침을 흘리는 것이다.

반도체 사업에서 드러나고 있는 도시바의 이 같은 특수성은, 이 기업 인수로 시장 주도권을 단숨에 손에 쥘 수 있는 지름길로 갈 수 있다는 인식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낸드플래시와 D램 등 메모리 반도체가 주력인 한국 기업들에 달가운 상황이 아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점유율 뺏길 악재

현재 낸드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시장 1위는 시장점유율 37.1%(2016년 4분기 말, D램 익스체인지)인 삼성전자다. 만약 웨스턴디지털이 도시바메모리를 인수하면 시장점유율이 36%대로 치솟는다. 삼성전자를 위협하는 상황이 된다.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기반으로 만드는 저장장치 SSD(솔리드 스테이트 드라이브) 시장 역시 삼성전자가 위협을 받게 된다. 이 SSD 시장의 점유율 2위 웨스턴디지털이 3위 도시바를 인수하면 순식간에 삼성전자의 턱밑까지 따라붙게 된다.

훙하이의 도시바메모리 인수 역시 웨스턴디지털의 인수만큼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 위협적이다. 스마트폰 시장과 노트북 시장의 강자인 애플과의 연합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아이폰과 맥북에 장착할 메모리 반도체 상당량을 훙하이가 공급하게 된다. 18.3%인 도시바의 시장점유율이 훙하이로 인수 후 더 높아질 수 있다. 반대로 삼성전자는 점유율이 그만큼 낮아질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의 매출과 이익률 등 실적 역시 상처를 입게 된다.

SK하이닉스 상황은 삼성전자보다 더 심각해진다. D램익스체인지나 가트너 등 조사 업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SK하이닉스의 낸드플래시 메모리 시장 점유율은 9~11%대다. 5위권이다. 1~3위와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도시바의 반도체 사업을 SK하이닉스가 아닌 다른 기업이 인수하고, 그 기업이 낸드플래시 메모리 사업을 더 키우려 할 때다. 이렇게 되면 세계시장에서 중소 사업자인 SK하이닉스의 점유율이 가장 빠르게 잠식될 가능성이 크다. SK하이닉스는 삼성전자처럼 주도적으로 가격 인하나 생산량 증가 등 시장 경쟁에 맞불을 놓을 상황이 안 된다. 자본력 역시 열세다. 도시바메모리 M&A가 끝난 후 벌어질 시장 재편과 주도권 경쟁이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도시바의 반도체 사업 인수전이 끝나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판도 재편이 불가피하다. 1위 삼성전자와 도시바메모리 매수 기업 등 상위 기업 간 시장 재편 주도권 쟁탈전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사실상 망해가는 도시바가 시장의 판도 재편에 불을 지피고 있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대응책 마련이 필요하다.

조동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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