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중국 총리로 점쳐지던 쑨정차이(孫政才) 전 충칭(重慶)시 서기가 지난 7월 15일 돌연 낙마하면서 현대차그룹의 중국 사업에 비상등이 켜졌다. 쑨정차이 전 충칭시 서기는 25명의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원 가운데 현대차와 가장 돈독한 인연을 구축한 정치인으로 꼽혔다. 오는 가을 19차 당대회에서 7인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진입은 당연시됐고, 오는 2022년 20차 당대회에서는 후춘화(胡春華) 광둥성 서기와 함께 6세대 지도부의 양대 핵심(당총서기, 국무원 총리)으로 공공연히 거명돼온 차세대 주자였다. 이런 쑨정차이가 지난 7월 19일 현대차의 중국합자법인인 베이징현대차의 첫 번째 중국 서부 충칭공장 생산개시기념식을 4일 앞두고 낙마한 것이다.

결국 지난 7월 19일 열린 충칭공장 생산개시기념식은 1인자였던 쑨정차이가 빠지고 2인자인 장궈칭(張國淸) 시장(부서기)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쑨정차이가 빠지면서 생산개시기념식에 참석한 한국 측 인사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아들인 정의선 부회장으로 하향 조정됐다. 우리 정부 측 인사도 충칭지역을 관할하는 안성국 주청두(成都) 총영사가 오는 데 그쳤다. 현대차의 중국 서부 첫 생산공장 생산개시기념식치고는 너무나도 조촐히 열린 행사가 되었다.

이는 지난해 10월, 허베이성 창저우(滄州)의 베이징현대차 제4공장 준공식 때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직접 참석하고, 자오커즈(趙克志) 허베이성 당서기와 김장수 주중 한국대사가 직접 준공식에 참석했던 것과도 대비된다. 정의선 부회장은 충칭공장 생산개시기념식 직전 설영흥 현대차 고문(전 부회장), 이원희 현대차 사장과 함께 천민얼(陳敏爾) 신임 충칭시 서기를 식전에 잠깐 예방하는 데 그쳤다. 현대차그룹의 한 관계자는 “요즘 대외활동은 정의선 부회장이 많이 주관한다”며 “공장 건립할 때마다 정몽구 회장이 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현대차와 쑨정차이와의 인연은 2002년 현대차의 중국 진출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진출 후발주자로 당초 중국 최대 소비시장인 상하이를 노렸던 현대차가 이리저리 밀려 자리 잡은 곳이 베이징이다. 중국으로서는 수도 베이징의 자동차시장을 ‘의화단의 난’(1900) 때 ‘8국 연합군’의 일원으로 베이징을 점령한 독일·일본·미국 업체에 내주는 일이 자존심 상했다. 결국 한국 업체인 현대차가 어부지리를 얻은 것. 이때 현대차가 생산공장으로 낙점한 베이징시 동북부 외곽인 순이구(順義區)의 구장(구청장)이 바로 쑨정차이였다.

마침 쑨정차이는 현대차의 중국 진출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설영흥 당시 현대차 고문(전 부회장)과 산둥성 룽청(榮成) 동향이었다. 농과대학 출신인 쑨정차이는 베이징 순이현(순이구의 전신) 현장(부서기)을 맡으면서 일선 공직에 나섰고,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순이구의 구장을 지냈다. 쑨정차이와의 인연은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자칭린(賈慶林) 당시 베이징시 서기로 이어진다. 결국 현대차의 첫 중국 공장 부지는 2001년 10월 정몽구 회장과 자칭린 당시 베이징시 서기와의 베이징 회동에서 베이징시 순이구로 낙점됐다.

이후 현대차는 자칭린과 쑨정차이의 전폭적 지원을 등에 업고 후발주자로서의 낮은 인지도를 급속히 극복했다. 특히 자칭린이 2002년 당 서열 4위의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으로 중앙정치국 상무위에 입성하면서 현대차의 황금시대가 도래했다. 이와 동시에 쑨정차이도 불과 39세의 나이에 베이징시의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비서장으로 영전하면서 자칭린의 후임 서기인 류치(劉淇)를 보좌한다. 정몽구 회장이 2003년 한국인 최초로 베이징 명예시민이 된 것도 이 즈음이다. 이후 현대차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택시교체 작업을 벌일 때 표준모델로 채택되고, 경찰차 등 관공서 차량을 납품하는 데도 성공하며 ‘현대속도’란 신조어를 만들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제2의 자칭린·쑨정차이는 누구

자칭린, 쑨정차이를 두 축(軸)으로 한 현대차의 대(對)중 관시(關係)는 2012년 자칭린이 정치국 상무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됐다. 쑨정차이라는 중국 정계에 새롭게 떠오르는 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쑨정차이는 2006년 원자바오(溫家寶) 당시 총리에 의해 최연소 농업부장(장관)으로 발탁됐다. 2009년에는 지린성 당서기, 2012년에는 장더장(張德江) 당시 충칭시 서기(현 전인대 상무위원장)의 뒤를 이어 충칭시 서기로 승승장구했다. 부장급(장관급) 중앙부처 경력과 성급 지방정부 2곳 근무란 최고지도부 입성 조건을 갖추면서 차기 정치국 상무위 진입은 떼어놓은 당상이었다.

현대차가 중국 서부의 첫 번째 생산거점으로 충칭을 택한 것도 쑨정차이를 의식한 선택이다. 현대차의 제4공장 건립 계획이 흘러나온 것은 2013년 5월. 기존 사업기반인 베이징 외부의 첫 번째 완성차 생산거점인 탓에 그만큼 조심스러웠다. 지역마다 말과 문화가 생소한 중국에서는 더할 수밖에 없다. 결국 제4공장 입지는 2014년 3월 정몽구 회장이 충칭을 방문해 ‘전략합작기본협의’를 체결하면서 충칭으로 낙점됐다. 하지만 그 와중에 지방정부 간에 현대차 공장을 유치하기 위한 물밑경쟁이 이뤄졌고, 허베이성 창저우가 뜬금없이 가세하면서 일이 복잡해졌다. 창저우는 쑨정차이의 상관이었던 자칭린의 고향이자, 자칭린의 동생인 자파린(賈發林)이 부시장으로 있었다.

결국 현대차의 중국 제4공장은 허베이성 창저우로, 제5공장은 충칭으로 교통정리가 이뤄졌다. 결국 창저우공장은 2015년 4월 첫 삽을 떠서 2016년 10월 준공됐고, 충칭공장은 이보다 2개월 늦은 2015년 6월 착공해 지난 7월 19일 준공됐다. 창저우공장과 충칭공장은 각각 연산 30만대로 생산능력이 같다. 하지만 베이징 1·2·3공장과 지역기반이 겹치는 창저우공장은 어디까지나 기존 생산거점을 보완하는 개념이었고, 방점은 현대차의 첫 번째 중국 서부 생산거점인 충칭이었다. 중국 사업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마지못해 끌려간 창저우보다 인구 3000만명의 중국 최대 도시인 충칭이 더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산개시기념식 4일 전, 십수년간 믿었던 쑨정차이가 낙마하면서 현대차는 새로운 ‘관시’ 찾기에 비상이 걸렸다. 창저우의 자파린 전 부시장도 2016년 3월자로 교체된 상태다. 새로운 관시 구축 작업을 담당할 인사들도 2014년 2선 후퇴를 했다가 다시 비상임 고문으로 경영에 복귀한 설영흥 고문(전 중국사업총괄 부회장)을 필두로 담도굉 부사장(중국지원사업부장), 설호지 상무 등 현대차그룹의 화교(華僑) 출신 임원들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설영흥 고문의 아들인 설호지 상무는 1976년생으로 현대차 그룹 최연소 임원으로, 대(代)를 이어 현대차의 대중국 공략을 담당하게 됐다. 최근 중국 시장 점유율 하락으로 고전 중인 현대차의 손을 잡아줄 귀인(貴人)이 언제 나타날지 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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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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