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 취업준비생 김보미씨는 매일 밤 잠들기 전 릴렉스음료 ‘스위트슬립’을 한 캔씩 마신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사서 마셨는데 요즘엔 상자째 사서 먹는다. 취업 스트레스 때문에 예민해져 작은 소음에도 깨던 그는 이 음료를 마시면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오전에는 타우린과 카페인이 함유된 에너지음료를 들이켜며 취업공부를 하고, 자기 전에는 L-테아닌 성분이 함유된 릴렉스음료를 마신다.

국내 릴렉스음료시장이 커지고 있다. ‘핫식스’ ‘레드불’ ‘몬스터’ 등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하는 각성 음료의 성장세가 주춤하면서 그 반대편에 있는 릴렉스음료, 일명 ‘꿀잠 음료’가 인기를 끌고 있다. 3~4년 전부터 캐나다산 ‘슬로카우’, 스웨덴산 ‘노아 릴렉스 드링크’, 오스트리아산 ‘굿나이트’가 수입돼 관련 음료 인지도를 넓혔고, 지난 5월 롯데칠성이 ‘스위트슬립’을 내놓으면서 상승세인 릴렉스음료의 도화선이 되었다. 롯데칠성 관계자는 “최근 숙면시장과 함께 질 좋은 휴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현상에 주목하고 출시하게 됐다”고 밝혔다. 출시 초기라 판매량 집계는 아직 잡히지 않는 단계다.

릴렉스음료는 말 그대로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가 되도록 도와주는 음료다. 잠이 잘 오도록 도와주는 음료라고 내세우지만 효과에 대해서는 반신반의다. 심신이완을 돕는 허브티와 수면유도제의 중간쯤 기능을 지녔다. 에너지드링크류의 각성음료는 효과가 확실하지만 릴렉스음료의 경우 객관적인 효능을 느끼기 어렵다는 소비자가 많다. 실제로 보면 “플라시보 효과 같다”는 후기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릴렉스음료의 어떤 성분이 숙면을 도와줄까. 성분을 들여다보면 ‘L-테아닌’이 꼭 있고, 음료 종류에 따라 로즈힙, 레몬밤, 캐모마일, 비타민 B군, 비타민 C군 등이 함유돼 있다. L-테아닌은 아미노산의 일종으로 마음을 편안한 상태로 느끼게 하는 뇌파인 알파파 발생을 돕는 기능을 한다.

릴렉스음료뿐 아니다. 식품회사나 제약회사에서도 수면보조식품이나 약물을 잇따라 출시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숙면에 도움을 주는 ‘슬리피즈’를 내놨고, 광동제약에서는 ‘레돌민정’을, 중외제약에서는 ‘굿나잇 테아닌’을 선보였다. 진정작용을 하는 약초인 길초근과 호프 추출물이 함유된 레돌민정은 수면유도물질인 아데노신과 멜라토닌을 조절하도록 돕고, ‘굿나잇 테아닌’은 L-테아닌과 비타민 C를 주원료로 했다고 한다.

릴렉스라운지, 안마카페…

숙면을 돕는 ‘티’ 제품도 속속 출시됐다. ‘티젠’에서는 ‘굿나잇’을, 오설록에서는 ‘티어클락 10PM’을 내놨다. 상품들의 성분을 보면 새롭지는 않다. 캐모마일, 라벤더, 레몬버베나, 오렌지필 등이 함유돼 있다. 기존의 것과 엇비슷한 제품을 출시하면서 트렌드를 반영한 제품명을 쓴 것으로 보인다. 10시에 잠들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의미를 담은 ‘티 어클락(Tea o’clock) 10PM’이라는 이름이 재밌다. 이렇게 숙면 트렌드를 반영해 얼마 전 한 대형마트에서는 ‘릴렉스음료 모음전’ 행사를 갖기도 했다.

먹거리뿐 아니다. 공간에서도 릴렉스 트렌트가 급부상 중이다. 지친 몸과 마음을 쉬어갈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공간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다. 최신 안마의자와 안마수면, 무료 족욕 공간 등이 구비된 ‘릴렉스라운지’가 등장했는가 하면, 음료 한 잔과 함께 안마의자에서 쉴 수 있는 ‘안마카페’는 예약 경쟁이 치열하다. 30대 중반 직장인 권모씨는 “릴렉스 음료 한 잔을 마시면서 안마의자를 두 시간 동안 이용할 수 있는 패키지 상품을 예약하러 갔다. 한 달 이용권을 끊으려 했는데 예약이 꽉 찼다며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왔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숙면을 돕는 새로운 직업군도 생겼다. 잠의 패턴을 분석해주고 숙면을 도와주는 ‘슬립 코디네이터’ ‘슬립 테라피스트’ 등이 대표적. 수면패턴을 분석해주는 웨어러블기기 ‘샤오미 미 밴드’나 ‘SKT 스마트밴드’ 등도 같은 차원에서 설명된다.

숙면과 꿀잠, 릴렉스가 새로운 트렌드로 부상한 현실은 양면성을 지닌다. 정반대의 두 현상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하나는 효율성과 속도감에 대한 현대인의 피로감이다. 그 결과로 이에 대한 대척점에 있는 슬로와 릴렉스를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에너지드링크음료가 최근 급격히 하락세로 돌아선 것이 이를 방증한다. 2012년 922억원이었던 국내 에너지음료시장은 2016년에는 650억원대로 눌러앉았다. 4년간 무려 30% 가까이 하락한 것이다.

국내 수면시장 규모 1조원

한편으로는 ‘잠 못 드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반영한 현상으로 해석된다. 한국인의 수면시간은 짧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수면시간은 하루 평균 7시간49분으로, 조사대상인 OECD 18개국 중 최하위를 차지했다. OECD 국가의 평균 수면시간은 8시간 22분이었다.

불면증 환자도 매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수면장애로 병원을 찾는 환자 수는 2016년 49만4915명으로 2012년 35만8838명보다 무려 40% 가까이 증가했다. 병원을 찾지 않는 수면장애 환자까지 감안하면 실제 수면장애 환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수면장애를 겪는 이들이 늘면서 슬리포노믹스(sleeponomics·수면+경제)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숙면을 파는 사업이다. 지난 8월 현대백화점은 업계 최초로 침구 충전재 맞춤 매장인 ‘듀엣바’를 선보였다. 소비자들이 침구 충전재의 소재와 원단, 중량 등을 취향대로 골라 꿀잠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는 취지다. 향초와 조명 등도 숙면 트렌드를 타고 시장 규모가 나날이 커지고 있다. 국내 수면시장 규모는 1조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일본 등 선진국은 약 20조원에 달한다고 하니 우리나라는 초기단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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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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