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서울창업허브 사무실의 전경. ⓒphoto 이진한 조선일보 기자
서울 마포구 서울창업허브 사무실의 전경. ⓒphoto 이진한 조선일보 기자

29살 박은수(가명)씨가 스타트업을 세운 지도 3년이 지났다. 직원은 얼마 전 합류한 개발자 한 명에 불과하다. 3년 전에 함께 스타트업을 세웠던 친구 2명은 각자 살 길을 찾아 떠났다. 지지부진한 사업 때문에 속이 탈 만도 하지만 박씨는 별다른 걱정이 없어 보였다.

박씨는 대학 동기들과 3년 전 한 광역지자체에서 지원하는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사업을 시작했다.

“대학 졸업하고 뭐 할까 고민하다가 한 친구가 괜찮은 아이디어를 냈어요. 마침 스타트업 바람이 불 때라 우리도 스타트업 한 번 세워 보자는 얘기가 나왔죠.”

사업을 시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스타트업 지원센터도 많고 프로그램도 다양했다. “그러다 ‘창업 컨설팅’을 해준다는 컨설턴트를 만났어요. ‘스타트업을 시작하려면 우선 좋은 지원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조언하더군요. 사업소개서 적는 방법, 프레젠테이션 하는 방법을 한 번 상담받고 한 지원센터에 지원했어요.” 박씨의 창업 아이디어는 ‘아이디어가 좋다’는 평가를 받으며 지원금도 받고 사무실로 쓸 업무 공간도 제공받았다.

그렇게 1년을 보냈지만 사업에는 큰 진전이 없었다.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것이 어려웠다. “개발자 한 명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돈이 없었어요. 컨설턴트에게 다시 연락을 했더니 몇몇 기업에서 스타트업에 지원금을 주는 사업을 하고 있다고 지원해 보라고 하더군요.” 박씨와 친구들은 한 기업에서 다시 지원금을 받았다. 그리고 앱을 하나 만들어 내놓았다. 별다른 반향을 얻지는 못 했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원센터에서 지내다 보니 다른 아이디어도 많이 생겼거든요. 새로 도전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아이디어를 가지고 박씨는 다른 지역의 지원센터에 다시 입주했다. 그 사이 친구 한 명은 기업에 취직했다. “친구들이 다 손을 떼면 저는 어떻게 할까 고민해 봤어요. 그런데 저는 기업에 취직해서 살 만한 사람은 아닐 것 같더군요. 사업 아이디어는 계속 생기니 이걸로 도전하다 보면 뭐 하나는 얻어 걸릴 것 같았어요.” 도전하는 동안 드는 비용은 각종 지원금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 “경험이 쌓이니 어떻게 하면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터득하게 되더라고요.”

박씨와 같은 사람이 종종 있다. 스타트업의 투자 단계에는 몇 가지 낯선 용어가 있다. 우선 스타트업이 아이디어와 사람만 있는 상태에서 투자를 받는 것을 ‘엔젤투자’라고 한다. 창업 스타트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자금 및 경영 지원을 해주는 단체는 ‘엑셀러레이터’라고 부른다. ‘벤처캐피털’은 금융 기반이 약한 벤처기업에 대해 무담보 주식투자를 하는 기관이나 자본을 말한다. 전형적인 스타트업이 성장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창업자가 아이디어를 가지고 창업하고 싶을 때 엔젤투자자로부터 투자를 받아 회사를 세운 다음 엑셀러레이터와 벤처캐피털을 통해 회사를 성장시킨다. 엑셀러레이터와 벤처캐피털은 단지 투자자 역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스타트업과 협업 관계를 구축해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다. 스타트업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기도 하고 성장 과정을 점검하며 결과적으로는 스타트업이 성공적으로 자금회수(엑시트) 과정에 이를 수 있도록 이끈다.

우리나라 스타트업 업계의 상황을 살펴보자. 2016년 3월 결성된 ‘한국스타트업생태계포럼(KSEF)’에서 내놓은 ‘스타트업 백서’를 보면 서울·경기지역 스타트업 737곳이 어떻게 사업자금을 조달했는지에 대한 조사 결과가 나와 있다. 가장 많은 자금은 스스로 마련한 것이다. 20%의 스타트업이 자신이 마련한 돈으로 사업을 꾸렸다고 응답했고, 그 다음으로 많은 경로는 기술보증기금·신용보증기금과 같은 금융기관과 중앙정부 및 정부부처의 지원 프로그램이다. 엔젤투자자나 벤처캐피털(VC)을 통해 지원받았다고 응답한 사람은 21.3%에 불과했다.

정부 주도 정책이 문제

희망사항은 달랐다. 초기 단계에서 벤처캐피털이나 엔젤투자자 및 엑셀러레이터로부터 투자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52.2%에 달했다. 그러나 2016년 중소벤처기업부의 ‘2016년 창업기업 실태조사’를 보면 2016년 창업한 스타트업이 엔젤투자나 벤처캐피털로 투자받은 경우는 0.7%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자기 자금이거나 금융권 대출이었고 그나마 정부 보조금이 엔젤투자보다 많았다.

통계에서 보듯이 우리나라 스타트업은 민간보다는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받아 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스타트업 지원정책을 총괄하는 ‘K-스타트업’에서 해마다 발간하는 창업지원사업 안내책자를 보면 중앙 정부부처와 지방자치단체를 합쳐 180여개의 지원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스타트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중기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뿐 아니다. 문화체육관광부, 농림축산식품부, 금융위원회, 교육부 같은 부처에서도 스타트업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게 다가 아니다. 중기부 담당자는 “각 정부부처와 지방자치단체에서 ‘K-스타트업’을 거치지 않고 별도로 진행하는 사업은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약 7000억원 넘는 예산이 매년 스타트업을 위해 지원되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이런 지원에 비해 성적은 썩 좋지 않다. 스타트업의 3년 생존율은 통계 집계 기관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평균 30~40%를 오간다. OECD 평균이 57.2%이고 호주의 스타트업 3년 생존율은 62.8%, 미국은 57.6%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낮은 수치다. 왜 지원에 비해 낮은 성과를 올리는 것일까.

문제는 정부 주도의 스타트업 지원사업에 있다는 것이 현장의 지적이다.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자발적인 경쟁이 건강한 스타트업 생태계를 만들 수 있는데 지금 우리 정부는 ‘위에서 아래로’ 무조건 지원금을 뿌리고 시장을 만들어가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부 지원과 보조금으로 만든 스타트업시장은 시작 시점에서는 활발할지 몰라도 성장하기는 어렵다. 정확히 3년 만에 사업을 접은 안민규(가명·31)씨의 설명이다.

“워낙 지원 프로그램이 많기 때문에 누구나 처음에 사업 시작할 때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것이 좋을 거라고 판단하고 준비합니다. 그런데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과정이라는 게 정말 관료사회다워요.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하고 행사에 참석해야 하고 일일이 증명이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야 하고 영수증 처리를 하나라도 빠트리면 골치 아파지고. 창의적이고 자유롭게 발전하는 스타트업이 아니라 서류에 파묻힌 회사가 되었더라고요. 그래서 정부 지원을 안 받고 다른 곳에서 투자를 받아보려 했는데 대부분 투자는 아이디어 단계의 초기 스타트업에만 집중이 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두 가지다. 우리나라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은 아주 초기 단계, 아이디어를 지원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고 그마저도 정부에서 지원금을 중심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단계에만 집중해서 지원금을 주는 것에 머물러 있다 보니 창업은 할 수 있는데 성장은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급기야 지원금만 적당히 받아 사업체를 열어 두는 ‘체리피커(실속만 챙기는 사람)’이나 지원금과 지원 공간을 찾아 떠도는 ‘스타트업 낭인’들까지 등장하고 있다.

창업한 지 3년이 넘었고 업계에서 이름이 어느 정도 알려진 한 스타트업 대표의 말이다. “우리나라 스타트업시장은 스타트업 창업자나 지원하는 정부 기관이나 기업을 경영하는 방법, 성장하는 과정보다 아이디어 그 자체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조언을 구하러 오는 예비 창업자들을 보면 아이디어만 덜렁 있지 어떻게 구현하고 회사는 어떻게 성장시킬지에 대한 고민은 거의 안 보입니다.” 아이디어만 제공하는 창업자와 덮어놓고 지원하는 정부가 합쳐지면 시작 지점에서 쳇바퀴 맴돌듯 발전이 더딘 시장이 만들어진다.

스타트업 생태계 튼튼하게 하는 법

최근에는 스타트업시장에 필요한 것이 성장 잠재력을 보고 성장 과정을 도와주는 민간투자 자본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창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지 ‘엑시트’ 과정까지도 고려돼야 한다는 것도 중요하다. 실제로 민간자본으로 이뤄진 벤처캐피털의 투자액도 늘어나는 추세다. 2012년에 밴처캐피털 투자액은 4827억원이었지만 지난해에는 2조188억원에 달했다. 여러 민간창업 지원센터가 만들어지고 있고 스타트업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정부 기관의 규제를 점차 없애겠다는 정책도 하나둘 등장하고 있다. 8월 30일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창업·중소기업인과의 간담회에서 “벤처펀드 출자에 대해 위험가중치를 낮춰 은행이 벤처기업에 좀 더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을 검토해 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스타트업 생태계가 정부의 ‘덮어놓고 지원’에서 벗어나 스스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게 전문가의 지적이다. 임정욱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센터장은 “외국의 벤처캐피털을 보면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기관인 동시에 멘토링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좋은 벤처캐피털은 성장 가능성이 있는 좋은 스타트업을 골라낼 뿐 아니라 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안팎에서 지원해줄 줄 안다는 얘기다. “스타트업이 초기 단계를 벗어나 성장할수록 거액의 민간 투자가 필요한데 언제까지나 관(官)에 요구할 수만은 없습니다. 스타트업 생태계 내부에서 성장동력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대기업과 기술 제휴가 필요한 스타트업이 있다고 한다면 벤처캐피털이 아는 대기업 담당자를 연결해주고 상장이 필요하다면 효율적으로 상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곤 해야 합니다.”

글로벌 벤처캐피털인 알토스벤처스와 간편 송금서비스 ‘토스’를 개발한 스타트업 비바리퍼블리카의 성장 과정이 이런 사례에 속한다. 알토스벤처스는 아이디어 단계의 토스에 과감히 투자한 것을 시작으로 단계별로 필요한 투자를 진행했다. 토스는 알토스벤처스의 투자 계획에 힘입어 최근에는 앱 1000만 다운로드를 달성했고, 다른 금융서비스로도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토스는 좋은 스타트업은 역량 있는 벤처캐피털과 함께 자라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런 스타트업이 한국에 더 늘어나야 한다.

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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