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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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 경제에 대해서는 자칫 ‘라틴아메리카 모델’로 갈 수 있다는 걱정까지 제기될 정도입니다.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는 기업이 급감했고, 건전한 해외 자본의 한국 투자 관심도가 빠르게 낮아지고 있습니다. 건전한 해외 자본의 한국 투자 축소와 이탈 조짐이 보입니다. 반면 금리 차를 이용해 수익을 노리는 투기성 단기 자본이 빠르게 증가하는 현실이 우려를 키우는 거지요. 위기설에 귀를 닫을 게 아니라 터놓고 해법에 대해 이야기할 때입니다.”

연세대 경제학부 성태윤(48) 교수가 최근 불거지고 있는 ‘한국 경제 위기설’을 진단하며 꺼낸 말이다. 그의 우려대로 2018년 여름 한국 경제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금리 역전 차이를 더욱 키우고 있는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과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보호무역 강화, 그리고 한국의 양대 교역국인 미국과 중국의 무역마찰과 GDP 기준 세계 8위인 이탈리아의 경제 위기 고조 등 만만치 않은 대외 변수로 둘러싸여 있다.

대외 변수만이 아니다. 시한폭탄의 뇌관으로 불리는 1400조원대 가계부채 문제와,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는 기준금리 정책 실기 논란이 자본시장을 흔들고 있다. 여기에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근로시간 축소 문제를 둘러싼 파열음 역시 위기감을 키우고 있다. KDB한국산업은행 등 국책 금융사들이 한계기업과 불량기업들을 대거 떠안고만 있어 우리 경제 체질 개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산업 구조조정 역시 산으로 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얼어붙은 내수와 실물경기 침체가 고용시장 악화로 이어지며 성장동력 유지에도 심각한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구조적 취약성·정책 혼선이 만든 위기설

지난 6월 20일 연세대에서 만난 성태윤 교수는 일단 지금의 경제 위기설과 관련해 “지난 20년 동안 우리 경제는 다수의 위기설에 노출돼왔다”며 “이렇게 주기적으로 경제 위기설이 불거지면서 진짜 위기로 확산되지 않게끔 대응력을 보여온 것도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0년대 초 카드사태라는 진짜 위기를 경험한 한국 경제가 이후 수시로 불거졌던 위기설을 경계의 신호로 삼아 대응하고 관리하는 모습을 보여왔다는 것이다.

사실 1997년 겨울 불어닥친 외환위기 이후 20여년 동안 한국 경제에 ‘위기’ 혹은 ‘위기설’ 꼬리표가 붙어 있지 않았던 시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세계 경기 사이클이 하강 국면에 놓이거나, 대기업 몰락 등 우리 내부에 충격을 가할 대형 돌발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한국 경제는 어김없이 위기설과 마주해왔다.

2018년 여름 커지고 있는 위기설 역시 과거처럼 대응하고 관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일까. 성 교수는 최근 위기설의 근원과 관련해 “우리 경제가 갖고 있는 고질적인 구조적 취약점과 최근 빚어지고 있는 정책 혼선들이 대내외 경제 악재들과 뒤섞이며 위기감이 높아지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한국 경제는 오래전부터 위기에 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들을 갖고 있었다”며 “이 문제의 정도가 최근 좀 더 심각해진 상황”이라고 했다.

성 교수가 말한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로는 우선 특정 산업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 꼽힌다. 특정 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심화되면서 해당 산업 경기 변동에 따라 한국 경제 전체 상황이 좌우되고 있다는 것이다. 성 교수는 “이것은 오래된 문제인데 지금은 누구나 문제라고 지적할 수 있을 만큼 특정 산업에 대한 집중도가 더 심각해졌다”고 했다.

“한국 경제는 오래전부터 특정 산업에 집중하며 의존도를 키워왔습니다. 과거에는 자동차·조선·화학·건설·반도체 등 몇몇 산업에 의존하는 경제구조였어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자동차와 화학·반도체에만 의존도가 집중된 구조로 재편되더니 최근에는 아예 반도체 하나에 집중적으로 의존하는 구조로 변해버렸습니다. 이렇게 특정 산업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진 반면 다른 산업들은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의존도가 커져버린 반도체산업이 꺾여버리면 그 자체로 위기 상황을 맞을 수 있는 것이지요.”

한국 경제에 뿌리내려버린 ‘경직성’ 문제도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로 지적됐다. 위기나 위기설은 경제 방향이 좋지 못한 쪽으로 진행되면 불거지기 마련이지만 중요한 것은 위기 대응을 위해 필요한 유연성이다. 경제구조에서 유연성은 좋지 못한 쪽으로 진행되는 경제 방향을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끔 반전시킬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경제적 경직성은 반등은 고사하고 아예 경기 자체를 부러뜨려버릴 수 있다.

‘경직성’ 한국 경제 부러뜨릴 수 있다

성 교수는 지금 우리 경제, 특히 노동시장의 경직성 문제가 최저임금 인상·근로시간 단축 논란과 얽히며 더욱 뚜렷하게 위기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노동시장의 경직성 문제와 관련해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정책 방향이 틀린 것은 아니다”며 “문제는 경제 원칙과 상황을 무시한 채 일단 적용부터 하겠다는 것이 경직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최저임금 인상·근로시간 단축 문제에 대해 이해관계가 복잡한 노동시장에서 조율과 조정을 건너뛰고 적용부터 하겠다는 정책이 반발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이런 반발이 경직성을 강화시켜 노동생산성과 고용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최근 우리 경제 동력 약화에 한몫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성 교수는 “과거 3% 정도이던 실업률이 최근 4% 정도로 높아지고 있다”며 “이것이 우리 노동시장이 빠르게 경직되고 있다는 신호”라고 했다. 그는 한국 경제의 경직성이 비단 노동시장의 문제만은 아니라고도 했다. 산업과 기업 구조조정 등 다른 경제 부문에서도 경직성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성 교수는 오래전부터 한국 경제 부실의 진원지이자 위기의 뇌관으로 꼽혀온 취약한 ‘금융’도 언급했다. 사실 부실한 금융은 한국뿐 아니라 많은 국가들에서도 위기를 불러온 핵심 원인으로 지목돼 왔다. 심지어 미국과 유럽 국가들조차 부실한 금융이 경제는 물론 국가 위기까지 불러온 사례가 부지기수다.

숨겨진 뇌관 자영업자 담보대출

이와 관련 성 교수는 좀 더 구체적인 부분을 지목했다. 오랫동안 우리 금융권 전반에서 관행적으로 규모를 키워온 ‘담보 위주’ 대출이 위험 수위를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성 교수는 “그동안 자영업자들이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조건의 대출이 담보대출이었다”며 “하지만 내수 침체와 자영업 경기 악화가 지금보다 더 심각해지면 이들의 담보대출이 위기의 핵으로 부각될 것”이라고 했다.

“자영업자들에 대한 담보대출은 한국 금융권의 오래된 관행입니다. 이것은 자영업자의 신용이나 사업 내용과 전망, 성공 가능성에 대한 평가 없이 진행됩니다. 단순히 담보만 맡기면 대출을 해주는 식이지요. 문제는 내수가 지금보다 더 악화되거나, 지금 같은 침체 상황이 지속될 때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들이 금융권에 맡긴 담보의 가치가 하락할 수밖에 없고, 자연히 담보 부실이 가속화되겠지요. 담보 가치 하락이 부실 대출로 이어지며 금융권을 압박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성 교수는 언론이 많이 지적하고 있는 부동산대출보다 자영업자의 담보대출 부실이 지금 한국 경제에서는 더 큰 충격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 같은 한국 내부의 위기 요소들과 함께 외적 요인들도 최근 위기설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는 것이 성 교수의 분석이다. 특히 한국의 주요 교역 파트너인 미국 등 일부 선진국들의 나쁘지 않은 경기 상황이 역설적이게도 한국 경제에는 위기감을 키우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성 교수는 “미국 등 선진국들이 자국 중심의 경제 정책을 강화하면서 내부적인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문제는 이들이 거두고 있는 최근의 경제적 성과가 교역 파트너들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수출주도형 산업구조를 가진 우리 경제가 미국 등 주요 교역국들의 경제 성과 키우기의 정책적 희생양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다. 이것이 최근 한국 경제를 억누르는 외부 압박이자 위기설의 주요한 원인으로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성 교수는 기업들의 투자 부진 역시 심각한 징후라고 지적했다. 한국 경제를 억누르는 구조적 문제들과 대내외적 압박이 복합되면서 기업 투자, 특히 국내 투자가 얼어붙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일자리가 늘지 않는 문제는 단기적 위기일 뿐”이라며 “이런 현상이 혹 한국 기업들의 장기수익성 악화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 문제를 국제투자자들이 특히 빠르게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아주 우려되는 부분입니다. 최근 만나본 국제투자자들 중에는 ‘한국 어디에 투자해야 좋을까’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있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건전한 장기 성향의 국제 자본들이 한국에 대한 매력과 관심을 잃어가는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미 투자된 것을 유지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은 물론, 앞으로 한국에 투자할지 말지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위기 반복 남미 모델

성 교수는 건전한 국제투자자들의 한국 시장 관심도는 낮아지고 있는 반면, 투기적 성향이 강한 단기 자본의 한국 시장에 대한 관심도가 커지고 있다는 점도 우려했다. 그는 “우리 경제가 자칫 투기성 자본의 놀이터로 변질돼, 위기가 반복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 모델로 가고 있는 게 아닌지를 걱정해야 할 부분”이라고 했다.

성 교수는 경제 위기설을 가라앉히고 안정을 유지할 대응책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경제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경제 정책을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닌 경제 원칙에 맞게 구상하고 유지하고 운영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경제 원칙에서 벗어난 경제 정책이 단기적 부양은 가능하게 만들겠지만, 반복적으로 위기설을 키워온 구조적 문제들은 풀어낼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위기설에 귀를 닫을 게 아니라 터놓고 해법을 고민할 때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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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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