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페스 바이러스 ⓒphoto 유튜브
헤르페스 바이러스 ⓒphoto 유튜브

살면서 입술 한번 헐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어처구니없게도 입술을 헐게 하는 ‘헤르페스’ 바이러스가 전혀 관계가 없을 듯한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일으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주목을 끌고 있다. 대체 이 바이러스는 어떻게 치매에 관여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 6월 22일자 뇌신경 분야 국제학술지 ‘뉴런’에는 ‘헤르페스 바이러스가 치매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미국 마운트시나이 의대 조엘 더들리(Joel Dudley) 교수의 연구가 실렸다. 뇌 속으로 침투한 헤르페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알츠하이머병이 유발될 가능성이 높다는 내용이다.

보통 ‘치매’라고 하는 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중 가장 흔한 것이 알츠하이머병으로 전체 치매의 약 55%를 차지한다. 그동안 과학자들은 알츠하이머성 치매 주범을 뇌의 특정 노폐물 단백질로 지목해왔다. 나이가 들면서 ‘베타 아밀로이드’ 같은 비정상적 단백질이 과다하게 생성돼 뇌세포에 쌓이면서 신경세포가 죽게 되어 인지기능과 공간기억력이 나빠진다는 것이다. 아밀로이드는 당과 단백질이 뭉쳐진 덩어리다.

하지만 베타 아밀로이드의 응집을 억제하는 치료제들이 수없이 개발됐지만 특별한 치료효과를 보지 못했다. 학계 일각에서는 ‘베타 아밀로이드 가설’ 자체가 잘못됐다는 의견도 분분했다. 노폐물 단백질이 치매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나 증세일지 모른다는 반론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과학자들은 바이러스 감염과 같은 새로운 원인을 밝히려는 연구에 뛰어들었다.

더들리 교수팀도 그중의 하나다. 교수팀은 본래 바이러스와 치매 사이의 연관성을 찾으려고 연구를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알츠하이머병 초기 단계에 있는 사람들의 뇌에서 그 질환을 유발하는 비정상적 유전자를 찾아내려는 게 목적이었다. 그래서 사후 기증받아 마운트시나이 뇌 은행에 보존돼오던 944명의 뇌 조직을 조사했다. 알츠하이머성 치매 환자 622명과 건강한 사람 322명의 뇌를 비교·분석하기로 한 것. 유전자, 단백질, 지방, 기타 조직 구성요소 데이터를 모두 평가한 다음 이를 복잡한 컴퓨터 수학 모델을 통해 정량화했다.

헤르페스 6·7형 바이러스의 작용

그런데 컴퓨터 모델 분석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현상이 나타났다. 헤르페스 6·7형(HHV-6A와 HHV-7) 바이러스와 알츠하이머 환자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유전자 네트워크가 발견된 것이다. 알츠하이머병 환자였던 사람의 뇌에서 6·7형 DNA와 RNA가 일반인보다 2배 이상 많은 반면 정상인에게는 헤르페스 바이러스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헤르페스는 피부나 입술, 눈, 성기 등에 물집을 만드는 단순포진 바이러스다. 사람처럼 DNA 이중나선을 게놈으로 갖고 있는데 염기가 10만이 넘고 유전자도 많게는 160개나 되는 꽤 큰 바이러스다. 80여종에 이르지만 사람에게 감염해 문제를 일으키는 종은 8종에 불과하다.

이 중 주로 입 주위나 얼굴에 물집을 만드는 것은 1형(HSV-1) 단순포진이고, 2형(HSV-2)은 성기 주변에 물집을 유발한다. 1·2형은 그래도 얌전한 녀석이다. 굉장히 고통스럽다는 대상포진은 3형(HHV-3)이 일으킨다. 더들리 교수팀이 확인한 6·7형은 거의 모든 사람, 특히 유아기에 감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다. 아이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발진인 장미진(roseola)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수팀은 뇌 속의 6·7형 헤르페스 유전자들이 인간 유전자들과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를 살폈다. 결과는 6·7형 헤르페스 바이러스가 치매와 연관 있는 유전자를 포함, 일부 숙주 유전자들과 상호작용하며 뇌 네트워크를 방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는 이 바이러스 유전자들이 치매 관련 유전자들의 스위치를 켜고 끄면서 구조를 변형시킬 수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더들리 교수는 밝혔다.

헤르페스 바이러스는 전 세계 65개국에 걸쳐 인구의 80%가 감염돼 있는 아주 흔한 바이러스다. 주로 입맞춤이나 성행위 같은 피부접촉에 의해 감염된다. 일단 한번 감염되면 평생 보균자가 돼 완치되지 않는다. 힘들고 피곤하면 입술이 부르트는 사람은 입술 헤르페스에 감염된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무작정 알츠하이머 발병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헤르페스에 감염되었다고 해서 모두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헤르페스의 어원인 그리스어 ‘herpin’은 ‘잠복’이라는 뜻이다. 평소 면역세포가 닿지 않는 감각신경절에 숨어 잠복하다가 인체 면역력이 떨어지면 활성화해 입술과 생식기에 물집(포진)을 유발한다. 6·7형도 어린 시절 감염되어 오랜 기간 잠복한다. 헤르페스는 중추신경계와 뇌의 기억중추인 해마가 포함된 대뇌변연계를 손상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항바이러스로 치매 치료 가능해질까

치매-바이러스 연관설은 벌써 수십 년 전부터 제기됐다. 그러다 1991년에 최초로 8명의 알츠하이머병 환자와 6명의 정상인을 대상으로 뇌의 측두엽, 전두엽, 해마를 검사해 환자군의 뇌에서 헤르페스 1형 DNA를 확인했다. 최근 스웨덴 우메아대학 의과대 후고 뢰브하임 박사의 연구에서는 헤르페스에 감염되었던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치매 위험이 2배 높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60세 이상의 경우와 여성들이 위험도가 높았다. 감염 횟수가 많으면 발병 가능성도 높아졌다.

더들리 교수팀의 이번 연구는 지금까지의 치매-바이러스 연관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증거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더들리 교수는 “현재로선 헤르페스 바이러스가 치매의 1차적 원인인지는 잘 모르지만 알츠하이머병을 일으키도록 뇌 네트워크를 방해하는 것은 분명하고, 치매 발병의 직접적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며 “알츠하이머병이 바이러스에 의해 생긴다는 학설이 다른 위해 요소에 묻혀 있지만 다시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알츠하이머성 치매는 현대 의학의 가장 큰 도전 과제 중 하나다. 뚜렷한 치료법도 없고, 정확한 원인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더 답답하다. 만약 더들리 교수의 연구처럼 헤르페스 감염이 알츠하이머병의 원인이라면 치매 치료는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될 것이다. 이를테면 오래전부터 단순포진 치료제로 사용되면서 효과와 안전성이 입증된 항(抗)바이러스제로 치매를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더들리 교수팀은 바이러스가 직접 알츠하이머병을 일으키는지의 인과관계를 정확하게 밝히기 위해 현재 추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항바이러스 약물로 알츠하이머병을 치료할 수 있는지도 알아볼 계획이다. 교수팀의 연구를 통해 별다른 치료법이 없는 치매 치료에 전기가 마련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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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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