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면 1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화이자제약 본사에 가면 메인 로비에 엘리베이터 8대가 부지런히 운행 중이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이곳엔 크고 작은 트렁크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숱하다. 가만 있자, 여기가 호텔이었던가, 회사 아니었나. 하기야 외부 방문객들은 입구에서 공항에서처럼 짐 검사대까지 거쳐야 입장 가능하니 호텔이 아니라 공항이라 해도 믿겠다. 글로벌 회사에서 출장은 특별한 게 아니라, 평범한 일상사다.

# 장면 2 지난해 12월 유럽에서 글로벌 미팅을 마치고 경유지인 프랑스 파리 공항으로 향할 때다. 역사적인 장소에서 동료들과 좋은 에너지를 한껏 나눈 뒤였는데 서울 사무실로부터 급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공항 카페에서 전화 회의를 하며 이메일을 여기저기 보내고 있는데 ‘파리행 비행기가 곧 출발하니 빨리 탑승하라’는 안내 방송에 내 이름이 나오는 게 아닌가. 미친 듯 달려가 비행기에 오르니 온몸은 땀으로 흥건했다. 잠시 후 비행기가 하늘로 솟구친 뒤 휴대폰과 이메일이 정지했다. 순간 세상으로부터 격리되는 느낌, 나도 모르게 중독돼 있는 거다. 난리법석을 떤 덕분인지 구름 속 평온이 눈물나게 고마웠다.

‘비즈니스 트립(Business trip)’이라고 하는 출장은 말 그대로 일과 여행의 만남이다. 누군가 여행을 ‘현실로부터의 탈피’라고 한다면, 이 ‘일 여행’은 그 반대점에 있을 것 같다. 일을 주제로 만나서 회사 동료나 고객들과 한 공간에서 하루종일 부대끼는 자리. 일이라는 현실을 이렇게 강렬하게 마주 대하는 게 또 있을까.

시간과 비용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전화회의나 화상회의가 일상화되고 있지만 출장은 글로벌 회사 생활의 핵심 요소다. CEO가 연초에 회사의 비전과 전략을 공유하고, 한 해 농사를 어떻게 지었는지를 보고하며, 다음해 예산 편성을 논의하기 위해 출장을 떠난다. 비즈니스 성공 사례를 배우고, 특정 주제에 대해 전략을 짜며, 교육을 받으러 출장 길에 오른다.

회사의 글로벌 미팅들은 세계 각국에서 오는 동료들이 ‘상봉’하는 자리이다 보니, 그 시간의 의미를 어떻게 하면 극대화할지에 고민이 모인다. 이른 아침 시작해 중간 휴식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은 물론, 조찬 미팅까지 끼워 넣는다.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 멋진 도시에 도착해선 이틀 밤이 지나도록 호텔 정문 밖을 못 나가본 사례가 숱하다.

지난 봄, 파리 개선문 근처의 호텔에서 열린 워크숍은 창문 없는 지하 회의실에서 하루종일 진행됐다. 해가 지고 저녁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갈 무렵였다. “그래도 파리 공기는 맡아보는구나” “호텔 밥 말고 진짜 파리 밥 좀 먹어보자”는 한 동료 말에 다들 웃음꽃을 터뜨렸다.

세계 각지에 수만 명 직원을 둔 글로벌 회사들이 연간 출장비에 들이는 시간과 경비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일 테다. 사실 글로벌 기업의 출장 관련 프로세스는 엄격하게 관리된다. 수많은 논의를 거쳐 참석자 명단을 결정하고, 항공편이나 숙소 결정은 원칙 아래 움직인다.

6시간 이상 비행 땐 신입사원도 비즈니스석

글로벌 회사에서 항공기 좌석의 결정 기준은 비용이나 직원의 직급보다는 항공시간 우선이다. 대부분 6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예를 들어 비행시간이 6시간 넘으면 한 달 전 입사한 사원도 비즈니스석을 탈 수 있는 반면, 비행시간이 그에 못 미치면 지사장이나 임원급도 일반석을 타야 한다.

해외 출장이 잦은 사람들은 여기에 관한 한 하고픈 말들이 많다. 1년에 절반 정도 해외 출장을 다니는 한 글로벌 회사 대표는 “회삿돈으로 비즈니스 클래스 타고 다닌다고 남들은 부러워하는데 짐 풀었다가 싸고를 반복하는 국제 보따리장수가 따로 없다”고 했다.

나처럼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출장을 “몸은 고달파도, 더 넓고 큰 세상을 만나는 선물 같은 시간”이라고 하고, “출장이야말로 가정으로부터의 진정한 휴가”라고 말하는 동료들도 있다. ‘업 인 디 에어(Up in the air)’ 같은 영화를 보면 비즈니스맨(조지 클루니 역)이 출장길에 호텔 바에서 근사하게 위스키 한잔을 마시련만, 우리의 현실은 혼자 이메일 하다가 뻗는 모습이다. “밥벌이가 취미가 아닌데 고달픈 건 당연하지 않겠냐”는 동료 임원의 말이 지금껏 참 와닿는다.

강도 높은 미팅과 회식의 연속이지만 출장 중 누리는 여유시간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자투리 시간을 여행간 듯 즐겁게 지내고 에너지를 얻으라고 독려하기도 한다. 요즘엔 비즈니스(Business)와 레저(Leisure)의 합성어인 ‘블레저(Bleisure)’란 단어도 등장했다. 해외 비즈니스 잡지엔 “딱딱한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 시차로 고생하며 회의실에서 열심히 미팅하셨죠? 이제 남은 시간, 휴가 온 듯 즐기세요!”라며 ‘블레저 잘하는 법’을 설명하기도 한다.

출장의 핵심은 ‘어디’가 아닌 ‘누구’

출장의 핵심은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만나느냐’에 있다. 전화로, 이메일로만 알았던 동료들을 출장지에서 직접 만나고 나면, 그 다음의 업무 협조는 마법가루를 뿌린 듯 달라진다. 상사도 부하도 아닌 사람들끼리 서로 영향을 미치며 협력해야 하는 조직에서 출장 길에서의 네트워킹은 더 중요하다. 가끔 만나는 층층시하 상사들을 만나는 자리라면 자기의 존재감도 발휘하고 능력도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니 다들 반가워하면서도 긴장한 느낌이 역력하다.

홍보마케팅 회사인 시너지힐앤놀튼의 정현순 대표는 “고객인 한국 기업의 해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출장을 많이 다니는데 면 대 면 미팅을 통해 다른 국가와 문화에 대한 기본 이해를 서로 높이는 게 프로젝트 성공의 열쇠가 된다”고 했다. 소비재 분야의 한 아태 지역 대표도 “다른 마켓의 사람들과 머리 맞대고 논의를 하면서 비즈니스를 좀 더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며 “직원들의 출장 경비를 줄여야 하지만 필요할 땐 투자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다른 나라, 다른 문화 배경을 가진 동료들과 출장 길에서 일과 삶을 나눌 때 정말 글로벌 회사에 다니고 있구나를 실감한다. 같은 제품을 갖고 같은 일을 하는데도 지역마다 처한 정책 환경이 달라서 놀라고, 그럼에도 나라마다 안고 있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닮아서 다시 한 번 놀란다. 회사원으로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인생을 나눌 때엔 더 큰 깨달음과 울림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어두운 비행기 안에서 발표 자료를 준비하고, 누군가는 시차를 참으며 상사 앞에서 열심히 존재감을 내보일 테다. 또 누군가는 릴레이 미팅 자리에 참석하고 있고, 누군가는 긴장된 발표를 뒤로하고 동료들과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겠다. 나는 또 다음 출장에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배우게 될까. 나는 이렇게 글로벌 세상을 여행한다.

황성혜 한국화이자제약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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