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최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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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 박사는 지난 8월 말 한국화학연구원(KRICT) 창립 42주년 기념식에서 ‘올해의 KRICT인 상’을 받았다. 공로는 디스플레이와 반도체의 핵심 소재 중 하나인 옥심계 광(光)개시제(photon-initiator) 개발 및 상업화이다. 지난 9월 19일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의 한국화학연구원에서 전근 박사를 만났다. 전 박사는 경희대 화학과 77학번. 그는 “젊은 연구자가 많은데 나까지”라며 인터뷰하러 온 데 대해 겸손해했다.

전 박사가 개발했다는 ‘광개시제’라는 말이 낯설다. 전 박사에 따르면, 광개시제는 빛을 받으면 화학반응을 시작(개시)하게 한다. 광개시제가 섞인 감광수지(photeresist)에 빛을 쪼이면, 불포화기를 갖고 있는 단량체(단분자·Monomer)가 고분자화합물(Polymer)로 바뀐다. 이후 단단하게 굳으면서 원하는 형태의 구조가 된다. 전 박사가 개발한 화합물은 광개시제 중에서도 ‘옥심계 광개시제’이고 ‘옥심계 광개시제’ 중에서도 ‘플로렌 구조’를 기본 골격으로 한다.

옥심계 광개시제는 반도체 업계와 디스플레이 업계가 광개시제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감광수지를 이용한 미세패턴 형성이나 투명절연막, 오버코트 제조공정에서 광개시제가 들어가 있는 ‘감광수지’를 사용한다.”

그동안 옥심계 광개시제 시장은 독일 화학 업체 바스프가 석권해왔다. 바스프는 2002년 제품 개발에 성공했다. 때문에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강국인 한국은 바스프가 만든 옥심계 광개시제를 전량 수입해왔다. 옥심계 광개시제의 시장 규모는 세계적으로 1000억원대. 한국 시장 규모는 이 중 절반인 500억원대이다. 전 박사는 500억원대 시장을 대체할 새로운 ‘플로렌 구조의 옥심계 광개시제’를 개발했고, 이는 바스프 제품의 거의 절반 가격으로 시중에서 팔리고 있다. 상업화는 화학 업체인 ㈜삼양사가 했다.

바스프의 특허를 뚫어라

“바스프가 옥심계 광개시제 특허를 광범위하게 등록해 놓아 이를 뚫기가 힘들었다. 바스프는 카바졸 구조를 골격으로 하는 옥심계 광개시제를 시장에 내놓았으나, 다른 구조를 사용해 옥심계 광개시제를 만들 수 있는 연구도 했고, 이를 모두 특허로 등록해놓았다.”

전 박사는 한국화학연구원 계면재료화학공정연구센터 소속. 동료 연구자인 신승림·신종일·안경룡 박사와 함께 바스프의 카바졸 구조 화합물을 먼저 연구했다. 기존 제품을 파고들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카바졸 구조를 기본으로 화합물을 만들었다. 예상했던 광개시제 효과가 나왔다. 이때부터 신규물질 특허를 획득할 방법이 있는지 찾았다고 한다.

“많이 만들어봤다. 그런데 개시제로서의 물질 특성, 즉 물성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연구자가 실패한 것도 그게 힘들어서였다. 나프탈렌 유도체 등 다양한 구조의 화합물을 많이 합성하였으나 원하는 물성을 얻을 수 없었다. 1년여를 그렇게 보냈다. 그러다가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개똥도 약에 쓸 데가 있다고, 내가 전에 수행한 ‘플로렌계 블루형광체’ 연구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전 박사는 푸른색을 내는 ‘블루형광체’가 빛에 민감하며, 기존에 합성해 봤던 블루형광체는 플로렌 구조라는 걸 생각했다. 그렇다면 플로렌 구조가 빛에 대한 민감성이 있다는 것인가. 플로렌 구조를 기반으로 옥심계 광개시제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플로렌 구조를 기반으로 한 화합물을 만들었다. 대전 대덕에 있는 삼양사 중앙연구소에 보내 물성 실험을 해봤다. 이미 수백 번 반복한 일이다. 전 박사가 화합물을 만들어 삼양사 연구소에 보내면 연구소 측이 감광수지에 적용하여 물성이 나오는지를 확인했다. 광개시제로서의 우수한 물성이 나타났다. 성공이었다.

화학식 구조를 그리는 작업은 캠드로라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한다. 플로렌 구조 분자식을 화면에 띄워놓고, 여기에 하나씩 하나씩 새로운 구조를 붙여가며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물질을 향해 나간다. 플로렌 구조 옥심계 광개시제를 만드는 데는, 플로렌 구조에서부터 5단계의 합성을 해야 했다.

플로렌 구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전 박사는 화학물질 검색 데이터베이스인 사이-파인터(Sci-Finder)에 들어가 자신이 만든 게 기존에 나와 있는 것인지 여부를 확인했다. 없었다. 특허 검색을 통해 바스프 특허와는 관련 없는 신규화합물인지도 체크했다. 새로운 화합물에 ‘SPI-02’라는 이름을 붙였다. 바스프 제품과 빛 민감도는 같았고 투과율은 4%나 좋았다.

그 다음 작업은 특허등록 작업. 2012년이었다. 대전에 있는 특허청에 특허를 신청했다. 그런데 바스프가 법률법인 김앤장 쪽을 통해 이의를 제기했다. 기존 특허를 침해한다고 했다. 등록에 3년 정도 시간이 걸렸다. 절차가 끝난 건 2015년이었다. 외국에서는 특허등록 과정이 더 빨리 끝났다. 대만, 미국, 일본, 중국에 특허등록된 특허의 공식 이름은 ‘새로운 옥심 에스테르플로렌화합물, 이를 포함하는 광중합개시제 및 포토레지스트 조성물’이다. 이후 ‘SPI-03’ ‘SPI-07’ 개발에도 성공했다.

기존의 절반 가격으로 시장에 공급

“일본 화학 업체인 다이토가 우리와 똑같은 화합물을 몇 달 뒤에 특허출원했다. 나중에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특허 경쟁에서 늦을 뻔했다.”

제품 상업화는 성공적이었고, 한국화학연구원은 삼양사로부터 기술이전료로 수억원을 받았다.

전 박사는 색깔을 만들어내는 염료와 안료를 오래 연구해왔다. 경희대 화학과에서 석사학위를 한 다음 해인 1987년 한국화학연구원에 들어갔다. 그는 입사 당시를 돌아보며 “당시는 섬유산업에서 활용하는 염·안료가 중요했다. 한국 화학산업은 황무지였다. 수준이 낮아 선진국 기술을 카피하는 데 급급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전자산업이 부상하면서 전자재료로 사용되는 염·안료의 중요성이 부상했다.

전 박사는 광개시제 연구와 관련 “계속 앞으로도 연구해야 한다. 전자 재료 소재 특성상, 경쟁 업체가 새로운 우수한 제품을 내놓으면 기존 제품은 시장에서 바로 퇴출되고 만다. 그러지 않으려면 우수한 물성을 가진 제품을 찾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최준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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