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쿠팡에 2조2000억원의 투자를 결정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photo 뉴시스
지난해 11월 쿠팡에 2조2000억원의 투자를 결정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photo 뉴시스

“쿠팡은 통신기술(IT) 기업이다.”

전자상거래 업체 쿠팡의 김범석 대표는 스스로를 IT 기업이라 규정한다. 2010년 소셜커머스 스타트업으로 시작한 쿠팡은 단순한 온라인 오픈 마켓 플랫폼을 넘어 IT 기업으로 변모하기 위해 지속적인 기술혁신을 이어왔다. 전체 직원 중 40%가 개발자로 구성돼 있으며, 쿠팡이 보유한 거대한 물류센터가 이 개발자들이 설계한 인공지능(AI) 알고리즘 ‘랜덤스토(Random Stow)’로 돌아간다. 랜덤스토는 AI를 통해 상품별 예측 입출고 시점, 주문 빈도, 물품 특성, 물품 운반 동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상품적재 시스템이다.

경쟁 업체와 차별화되는 기술적 혁신을 바탕으로 쿠팡은 또 한 번의 대규모 투자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쿠팡은 지난해 11월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이 조성한 ‘비전펀드’로부터 20억달러(약 2조2000억원)의 투자를 따냈다. 한국 인터넷 기업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외 투자금 유치다. 손 회장으로선 2015년 쿠팡에 1조원대 투자를 한 데 이은 두 번째 투자다. 3년 새 투자금액은 두 배로 증가했고, 쿠팡은 ‘만년 적자 기업’이란 오명을 어느 정도 씻어낼 수 있게 됐다. 쿠팡의 무엇이 손정의 회장으로부터 대규모 재투자를 이끌어냈을까.

물류 인프라와 AI 시스템 높이 평가

이번 투자의 주체는 소프트뱅크가 세계 각국 투자 주체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조성한 소프트뱅크 비전펀드(SVF)다. 비전펀드는 손 회장이 2016년 1000억달러의 자금을 조성해 만든 펀드로, 최대 출자자는 사우디 정부계 투자펀드인 공공투자펀드(PIF)이다. 이 펀드의 조성 목표를 살펴보면 이번 쿠팡의 투자금 유치 이유를 알 수 있다. “비전펀드는 하나의 테마를 향해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AI가 그 중심이 될 것이다.” 손 회장은 지난해 열린 소프트뱅크 2분기 결산설명회에서 비전펀드의 목표를 두고 “단순 수익형 펀드가 아니라 세계 IT 생태계를 구축하고 자율주행차 등 미래 기술에 대한 주도권을 직접 쥐겠다”고 말했다. 실제 비전펀드는 2016년 약 35조원을 투자해 영국 반도체 설계 회사인 ARM을 인수했다. 또 세계 최고 AI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진 미국의 엔비디아에 약 4조4500억원을 투자했다. 지난해엔 GM 자율주행차 연구에 2조5000억원을 투자했다.

이번 쿠팡에 대한 대대적 투자 결정 역시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손 회장은 쿠팡의 물류 인프라를 높이 평가했지만, 그 기반에 깔린 AI 기반의 분류·배송 시스템이 가진 잠재력에도 큰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방대한 물류센터에서 효율적으로 상품을 찾고 포장·배송할 수 있는 랜덤스토 시스템이 그 중심에 있다. 기술 기업 투자에 정통한 한 벤처캐피털리스트는 “김범석 대표가 이번 추가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손 회장을 여러 차례 만나, IT 기업으로서 쿠팡의 성장 비전을 설명하는 데 주력한 것으로 안다”며 “손 회장이 쿠팡의 효율적 물류 인프라와 AI를 활용한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을 특별히 높이 평가했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손 회장이 쿠팡의 IT회사로서의 가치를 발견했다는 분석이다.

그렇다면 손 회장은 쿠팡의 현재에서 이커머스로 시작해 세계적 IT 기업으로 성장한 아마존의 모습까지 보고 있는 걸까. 김범석 대표 역시 공식석상에서 “우리(쿠팡)는 아마존 벤치마킹을 ‘잘’ 한다”고 말해왔다. 해외 언론들이 쿠팡을 부를 때도 ‘한국의 아마존’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아마존이란 이름은 산업계에서 단순한 ‘배송 혁신’의 차원을 넘어선 의미를 갖는다. 이제는 고유명사가 돼버린 ‘아마존 효과(Amazon Effect)’는 미국 내에서 아마존을 필두로 한 전자상거래 시장의 성장으로 인해 전통적인 오프라인 업체들이 위축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아마존 당하다(Be Amazoned)’ ‘소매 종말(Retail Apocalypse)’과 같은 신종 용어들도 등장했다.

아마존이 시도한 물류 혁명은 산업 전반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아마존은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기법으로 전통 상거래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기존 물류배송업에선 사람의 경험·노하우가 중요한 운영 자산이었다면, 아마존은 사람의 판단이 지배하던 영역을 데이터로 대체했다. 아마존은 고객의 소비 행위에 대한 데이터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이를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사업의 전 영역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상품 추천부터 빠른 배송까지 데이터가 활용됐다. 아마존은 판매자들의 물건을 자사 물류센터에 보관해뒀다가 신속하게 배송해주는 ‘풀필먼트(Fullfillments)’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전 세계 전자상거래 및 물류업체들이 이 서비스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쿠팡도 마찬가지다. 쿠팡의 ‘아마존 따라잡기’는 물류처리 시스템을 넘어서서 직매입 확장 등 전자상거래 시장을 공격적으로 개척하고 배송의 영역까지 서비스를 확장하는 데까지 이어지고 있다. 쿠팡은 지난해 10월 물류 자회사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를 설립하고 본격 택배업 진출을 선언했다. 지금으로선 자사 배송에만 주력할 방침이지만 향후에는 3자 물류까지 확대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매출 성장세도 무섭다. 매년 70%대의 매출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추정 매출이 5조원대임을 감안하면 올해 7조~8조원대 매출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다. 2019년 1월 월매출 1조원을 넘어서면서 매출 10조원 시대를 열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 2월 7일 청와대에서 열린 혁신벤처기업인 간담회에 참석한 김범석 쿠팡 대표이사(가운데). ⓒphoto 뉴시스
지난 2월 7일 청와대에서 열린 혁신벤처기업인 간담회에 참석한 김범석 쿠팡 대표이사(가운데). ⓒphoto 뉴시스

매년 70% 매출 성장에도 커지는 적자폭

하지만 쿠팡의 앞날에 긍정적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각에선 쿠팡의 만성적인 적자 구조에 대한 우려를 표한다. 그동안 쿠팡은 매출이 늘어나는 만큼 손실도 커졌다. 2014년 3485억원 매출에 1215억원 적자를 기록한 쿠팡은 2015년엔 매출 1조원을 넘겼지만 5470억원 적자를 기록해 적자폭이 더 커졌다. 2조6814억원 매출을 달성한 2017년엔 6388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2018년엔 약 5조원의 매출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적자 폭은 크게 개선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의 자금은 로켓배송 서비스를 유지·강화하는 데 들어갔다는 게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팡은 여전히 배송·물류 서비스를 개선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거대한 혁신 유통 플랫폼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투자와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는, 김범석 대표의 자신감 혹은 믿음을 엿볼 수 있는 행보다. 실제로 1995년 설립된 아마존도 2003년에야 흑자로 돌아섰다. 김 대표는 쿠팡의 적자 구조에 대한 지적에 대해 공공연히 “계획된 적자”라 표현하곤 했다. 당장의 이익보다 미래의 성장을 위한 투자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셈이다. 김 대표가 손 회장에게 이런 비전을 충분히 설명했고 손 회장이 거기에 베팅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소프트뱅크로부터 2조원대의 추가 투자를 이끌어낸 쿠팡은 올해 대대적인 투자를 바탕으로 새로운 서비스를 속속 선보이고 있다. ‘아마존 프라임’을 벤치마킹해 지난해 10월 론칭한 유료 배송 멤버십 서비스 ‘로켓와우’는 당일배송·신선식품 새벽배송까지 영역을 넓혔다. 신선식품 배송에 국한돼온 ‘로켓프레시’도 올해 일반 상품으로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로켓프레시는 자정 전 주문하면 다음날 오전 7시 이전에 배송하는 서비스다. 이런 쿠팡의 공격적 행보는 기존의 대형마트 온라인 시장에 상당한 위협이 될 전망이다. 김명주 미래에셋대우 연구원은 “쿠팡의 신선식품 취급 종류가 8000개 수준이 되면 대형마트의 온라인 시장 강화 노력이 효과를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쿠팡이 도발한 신속배달 과열 경쟁

전문가들은 이번 쿠팡의 투자 유치와 새로운 기술 혁신들을 필두로, 미국의 아마존에서 시작된 물류 혁명이 한국에서도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전자상거래 배송업체들 사이에선 이미 경쟁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새벽배송’을 앞세워 무서운 기세로 성장 중인 마켓컬리가 등장한 데 이어 신세계 SSG의 당일배송 서비스, 롯데마트와 롯데슈퍼의 ‘3시간 배송카드’ 등이 속속 선보이고 있다. 롯데마트는 올해 3월 ‘30분 배송’ 시범 서비스까지 시작할 예정이다.

유통업계 내에선 배송 경쟁이 너무 과열됐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배송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물류 시스템 확충·유지·운영 비용이 커지면서 출혈경쟁 2라운드에 돌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금력이 약한 중소 스타트업이 자금 출혈경쟁의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대기업과 새로운 ‘유통고래’로 성장한 쿠팡의 ‘조 단위’ 싸움에 중소업체들은 등이 터진다는 말이 나온다. 실제 새벽배송 서비스를 도입하고 시장을 키워온 배민찬, 헬로네이처 등은 이미 매각 절차를 밟고 있거나 다른 기업에 인수된 상황이다. 홍춘욱 키움증권 투자전략팀장은 “미국의 총 소매시장에서 온라인 비중은 9%(2017년 기준)에 불과했지만 아마존에 밀려 수많은 중소 상거래업체들이 사장됐다”며 총 소매시장 중 온라인 비중이 18.2%(2017년 기준)로 더 높은 한국에서 벌어질 일들은 미국의 경우보다 더욱 강하게, 단기간에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경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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