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주시 오창과학단지의 LG화학 전기차용 배터리 생산라인. ⓒphoto 뉴시스
충북 청주시 오창과학단지의 LG화학 전기차용 배터리 생산라인. ⓒphoto 뉴시스

최근 LG화학은 미국 현지에서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배터리(2차전지) 영업기밀을 빼갔다”며 소송을 걸었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은 최대 500억달러(약 59조원)에 달하는 폭스바겐의 미국 전기차 배터리 물량 수주를 놓고 경쟁을 벌였는데 지난해 11월 SK이노베이션 측이 승리했다. 이에 2차전지 업계 선두주자인 LG화학 측에서 지난 4월 29일 미국 국제무역위원회(USITC)와 델라웨어 연방지방법원에 소송을 걸고 나선 것이다.

소송전 진행 상황에 따라 2차전지 시장을 놓고 다투는 두 회사 중 하나는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특히 SK 측은 지난 3월 폭스바겐 배터리 물량공급을 위해 미국 조지아주에 신규 공장까지 착공한 터라 패소할 경우 새 공장을 놀려야 할 판이다. 지난해 5월 구본무 회장 작고 후 양자인 구광모 현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한 이후 이런 소송전이 벌어지자 업계에서는 “인화(人和)의 LG가 변했다” “LG가 독해졌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놓고 정작 LG그룹 내부에서는 조금 다른 얘기들도 나온다. 주간조선이 최근 LG그룹 직원들의 익명 게시판인 ‘블라인드’를 확인한 결과, 상당수 직원들은 소송전에 의외로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일부 LG 직원들은 ‘SK 가려고 화학 아들(사람들이란 뜻) 다 미친 듯이 이력서 쓴다. SK로 팔려간 (LG)실트론 아들(사람들)은 매일 만세삼창하면서 출근한다’(LG화학 직원) 등 자사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들이 적지 않았다. 실트론은 LG의 반도체 웨이퍼 기업이었다가 2017년 SK에 매각돼 SK실트론으로 사명을 바꿨다. LG그룹에 속했다가 지난 2월 매각된 S&I(옛 서브원의 일부)의 한 직원 역시 “S&I는 ‘SK와 나’라는 의미”라며 “우리도 요즘 엄청 대탈출 러시 중”이라고 자조했다. 일부 직원들은 ‘소송 비용으로 직원들 급여나 올려달라’는 식의 냉소적인 글도 올렸다.

블라인드는 2014년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소위 ‘땅콩회항’ 사태 때 기업 내부 분위기를 가감 없이 전해 주목을 끌었다. 지난해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에 대한 ‘미투’ 운동도 블라인드에서 촉발됐다. LG그룹 블라인드 역시 이번 사태의 당사자인 LG화학을 비롯 주요 계열사 직원 상당수가 가입해 있다. 익명이 보장되는 ‘블라인드’의 특성상 거친 표현도 일부 보였지만 최근 LG그룹의 전반적인 실적 악화에 침체된 내부 직원들의 공감을 얻는 글들도 많이 보였다.

지난해까지 반도체 호황으로 사상 최대의 실적을 구가한 삼성이나 SK에 비해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직원들도 많았다. 특히 LG반도체의 후신인 SK하이닉스가 지난해 매출 40조4451억원, 영업이익 20조8438억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며 최대 1700%에 달하는 성과급 잔치를 벌인 것을 부러워하는 시선이 많다. 외환위기 때 김대중 정부에서 추진한 소위 ‘빅딜’로 LG반도체를 사실상 빼앗기다시피 내놓은 LG로서는 배가 아플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구본무 전 회장 시절 LG그룹에서 떠난 LG반도체는 현대전자와 합병해 하이닉스로 사명을 바꾼 뒤 2011년 SK에 인수돼 SK그룹의 ‘캐시카우’가 됐다.

일부 직원들은 ‘소 잃고 외양간 안 고치고 소 기강 잡기’(LG전자 직원), ‘LG그룹 모든 임직원이 공통으로 느끼고 있던 것’(LG이노텍 직원), ‘상대적 박탈감에 괴롭다. 그룹 전체가 마찬가지’(LG유플러스 직원) 등의 글도 올렸다. 일부 직원들은 회사를 옮기는 것을 ‘탈쥐(脫G)’라고 표현하며 회사 처우가 개선되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퇴직 직원 개인 PC 하드까지 검사

폭스바겐 배터리 수주전으로 촉발된 국내 대표기업의 소송전은 청와대 국민청원에까지 올라와 보는 이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지난 5월 17일 LG화학 퇴직자로 보이는 한 민원인은 ‘****의 퇴직자들에 대한 잘못된 처신에 대하여 호소합니다’란 제목의 글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리기도 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운영정책에 따라 기업 이름은 별표로 처리돼 있지만 누구라도 배터리 소송 당사자인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임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LG화학에 있다가 다른 업체로 이직했다는 이 민원인은 기술유출에 대비한 퇴직자 보안조사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이직자들을 산업스파이로 묘사하는 부분은 정말 모욕감을 넘어선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며 “수년간 동고동락하며 같이 울고 웃던 식구한테까지 이렇게 매도를 해도 되는 것인가. 배신감보다는 허무함이 앞선다”고 토로했다. LG화학 CEO였던 박모 전 부회장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지난해 3월 기자간담회에서 언급한 말도 이 민원인에 의해 재차 언급됐다.

이 관계자가 밝힌 LG화학의 퇴직 절차에 따르면, 회사 측은 사내 정보보안팀 주도로 퇴직의사를 밝힌 직원에 대해 최소 한 달에서 서너 달에 이르는 개인 행보를 선(先)조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의심가는 건에 대해서는 본인 해명을 듣고 심할 경우 집안의 개인 PC 하드까지 검사할 정도로 철저하게 기술유출을 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절차를 거쳐 “이상이 없다”는 정보보안팀의 확인이 있어야만 비로소 퇴직 절차가 진행된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LG화학에 따르면, 2차전지 특허건수는 1만6685건으로 경쟁사인 SK이노베이션(1135건)을 압도한다.

까다로운 보안검사 절차만큼이나 LG화학 측은 배터리 기술유출에 대해 극도로 민감하게 대응해왔다. 2017년에도 5명의 직원이 LG화학 퇴사 후 SK이노베이션으로 이직하려고 하자, LG화학 측은 ‘전직 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결국 대법원은 올해 초 LG화학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들 퇴직자에게 ‘2년간 동종업계 취업금지’라는 판결을 내렸다. 당시 법원의 판결에 업계에서는 “한솥밥을 먹었던 식구한테 좀 과한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왔다고 한다.

LG화학 측도 SK이노베이션과의 소송전으로 촉발된 직원들의 내부 동요에 단속에 나섰다. LG화학은 지난해 11월 신학철 전 3M 수석부회장을 새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영입했다. 신학철 부회장은 LG화학이 1947년 락희(樂喜)화학공업으로 창립한 이래 처음으로 외부에서 수혈된 최고경영자(CEO)다. 신학철 부회장은 부임 직후 인력유출이 문제가 된 전지사업부의 성과급을 400~500%로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추가 인재유출을 막기 위해 내부 보상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한 셈이다.

LG화학은 지난해 28조1830억원의 창사 이래 사상 최대 매출을 올렸으나 영업이익은 2조2461억원으로 전년 대비 23.3% 감소했다. 올 1분기 실적 역시 매출은 6조6391억원으로 전년 동기대비 1.3% 증가했으나 영업이익이 2754억원으로 57.7%가 줄어들었다.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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