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입주하는 총 732가구 규모의 경기 고양 지축지구 중흥 S-클래스 조감도. ⓒphoto 중흥건설
2020년 12월 입주하는 총 732가구 규모의 경기 고양 지축지구 중흥 S-클래스 조감도. ⓒphoto 중흥건설

서울지하철 4호선 과천역 근처에는 과천주공1단지를 재건축한 ‘과천 써밋’이 입주를 기다리고 있다. 대우건설이 시공한 총 1571가구 규모의 이 아파트 단지의 이름은 ‘과천 써밋’ ‘과천 퍼스트 써밋’ ‘과천 더퍼스트클래스 푸르지오 써밋’ 등 3가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었는데 조합원들의 투표 결과 가장 많은 표를 받은 ‘과천 써밋’으로 결정됐다.

이 아파트는 분양 당시 전용 84㎡ 기준 분양가가 10억3700만원으로 3.3㎡당 3000만원이 넘었지만 14.9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기타지역 포함 기준) 한 건축설계사는 기자에게 “과천 써밋은 반포 써밋보다 더 고급 자재로 지어지며 더 우수한 수준의 커뮤니티 시설이 들어올 것”이라고 말했다. 반포 센트럴 푸르지오 써밋은 3.3㎡당 4000만원이 넘는 가격으로 분양돼 현재 전용 84㎡ 호가가 25억원에 육박하는 초고가 아파트다.

하지만 이 아파트 재건축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최근 ‘써밋’이라는 브랜드 이름을 바꿔야 할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대우건설의 프리미엄 브랜드인 ‘써밋’이 호반건설의 프리미엄 브랜드인 ‘써밋’과 겹치기 때문이다. 푸르지오의 프리미엄 브랜드인 써밋은 반포, 송파, 용산에 이어 과천이 4번째다. 호반건설 관계자는 전화통화에서 “써밋이라는 이름을 호반이 먼저 쓴 것은 사실이지만 특별한 상표가 아니라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최근 호반건설을 비롯해 지방을 거점으로 둔 중견 건설사들이 약진하면서 건설사 구조가 재편되고 있다. 광주광역시에서 시작한 호반건설이 서울 강남권 재건축 시장 수주를 위해 시공능력평가 3위권인 대우건설을 인수하려고 했던 것이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과거 서울·수도권 진출을 시도했던 지방 건설사들이 서울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에 빠진 경우가 많다는 점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관측도 나온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방식 선호

아파트 건축 분야에는 크게 세 가지 범주가 있다. 재건축, 재개발, 그리고 신도시·택지개발지구에 있는 공동주택용지를 추첨 또는 입찰받아 확보한 뒤 시공·분양하는 것 등이다. 재건축과 재개발은 조합원들이 시행사를 선택하는 구조라 ‘래미안’ ‘자이’ ‘힐스테이트’ 등 유력 브랜드를 보유한 메이저 건설사들이 대부분의 알짜 부지를 선점해왔다.

반면 호반건설은 신도시와 택지개발지구에 집중해왔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의 공동주택용지를 추첨 또는 입찰받아 확보한 뒤 시공·분양해왔다. 일반적으로 아파트 건설에 시공사로 참여해 공사를 하면 공사비만 받는 구조인 반면 땅을 사서 시행과 시공을 하면 모든 게 건설사의 수익이 된다.

현대엔지니어링의 한 관계자는 “사실 땅을 사는 데 비용도 상당히 들 뿐만 아니라 시공만 하는 것과 비교해 리스크도 커서 다른 건설사들은 잘 안 하는 방식”이라며 “상대적으로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방식이지만 호반은 이런 방식을 선호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호반이 이런 방식에 주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일단 현금이 많고 주택 건설에만 집중했다는 비결이 있다. 분양이 쉽지 않은 상가는 임대로 돌리는 방식으로 현금 보유량을 늘려왔다. 최근에는 LH가 공공택지 공급 규모를 줄이면서 기존의 공동주택용지 추첨·입찰 방식보다도 재개발 등 도심 내 정비사업에 눈을 돌리고 있다. 서울 양천구 신정 2-2구역과 성북구 보문5구역이 호반이 서울에서 수주한 재개발사업 지역이다. 지방에서도 부산, 대전, 대구 등 거점도시에서 재개발·재건축 사업을 수주하고 있다. 호반은 지난해 말 ㈜호반과 호반건설이 합병하면서 덩치를 더 키웠고 올 해는 서초구 우면동 사옥을 완공했다.

지난 3월 21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섬유센터에서 열린 2019 KLPGA 정기총회에서 KLPGA 회장을 맡고 있는 김상열 호반건설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3월 21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섬유센터에서 열린 2019 KLPGA 정기총회에서 KLPGA 회장을 맡고 있는 김상열 호반건설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분양률 90% 원칙’ 지켜와

호반은 그간 업계에서 차별화되는 경영 방식으로 주목받아왔다. 창업주인 김상열 호반건설 회장은 분양 단지의 누적 분양률이 90%를 넘지 않으면 신규 분양을 하지 않는다는 ‘분양률 90%’ 원칙과, 부채를 최소화하는 ‘무차입 경영’ 원칙을 지켜왔다.

이런 경영스타일은 국내 경제가 위기를 맞을 때마다 빛을 발했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유동성 위기에 몰린 기업들이 헐값으로 내놓은 부동산을 매입해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면서 사세를 크게 확장한 것이다.

호반건설은 지난해 초 ‘대우건설 인수설’이 나오면서 주목받았다. 당시 시공능력평가 순위 13위권이던 호반건설이 3위권 수준의 대우건설을 인수할 수 있다는 관측에 ‘새우가 고래를 삼킨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삼성물산의 한 관계자는 “메이저 건설사들이 신규 공급을 줄이자 이 틈새를 치고 와서 성장한 회사가 호반인데 현재는 우리 래미안 쪽 인력도 그쪽으로 많이 이직한 것으로 안다”며 “아파트가 아직 돈이 많이 남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삼성물산의 경우 주택부문에서는 재건축·재개발 사업에만 집중하고 있고 본래 건축사업부, 주택사업부로 나뉘어 있던 조직도 주택본부로 축소했다. KCC 등 다른 기업에 주택본부, 혹은 건설부문 전체를 매각한다는 소문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중흥 S-클래스’ 브랜드로 서울과 수도권에 대단지를 건설·분양하고 있는 중흥건설 역시 본사를 광주에 둔 지방 거점 건설사로 요즘 건설업계에서 ‘잘나가는 곳’으로 꼽힌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해 성장한 회사라 아파트를 지을 때도 단일 브랜드의 복합 대단지 아파트만 짓는 것이 특징이다. 광교, 세종, 청라 등 대규모 택지지구에 진출해 아파트를 지어왔다.

중흥건설 역시 호반건설처럼 현금이 많고 무리한 대출을 시도하지 않는 회사로 유명하다. 업계에서는 ‘3년치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로도 통한다. 자산총액 9조5000억원으로 재계 37위다.

중흥과 SM도 광주 연고 건설사

재계 35위인 SM그룹 역시 광주 연고인 삼라건설이 모태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보수적으로 사업을 벌이다가 헐값에 쏟아진 수도권 택지를 매입해 큰 이득을 봤다. 2008년 금융위기 때 보수적인 경영으로 이득을 봤다. 2010년 이후에는 건설보다는 M&A(인수합병)를 통해 주로 성장해왔다.

2010년대 초까지도 대부분 중견 건설사들은 돈을 빌려서 사업을 키워왔다. 아파트를 짓고 분양하는 데 필요한 공사대금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건설사들은 프로젝트파이낸싱(PF) 기법을 이용해 은행에서 돈을 빌린 뒤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지어 분양해왔다.

이 같은 방식은 부동산 경기가 좋을 때는 분양률이 높아 빌린 돈을 갚을 수 있었지만 부동산 경기가 나빠져 미분양이 속출하면 얼마 버틸 수 없다. 1990년대 후반의 IMF, 2000년대 후반의 글로벌 금융위기 등 충격이 가해졌을 때 건설사들이 제일 먼저 줄도산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과거 무리하게 외부에서 자본을 끌어쓰다 경영이 어려워진 지방 거점 건설사들이 반면교사가 된다. 청구·우방·보성건설 등이 대표적이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대구 경북을 기반으로 한 건설사들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청구건설은 1997년 외환위기로 부도가 난 뒤 화인캐피탈에 인수돼 재기를 노렸지만 2010년 다시 부도가 나서 완전히 청산됐다.

대구 경북에서 잘나가던 건설업체 우방도 외환위기 때부터 부동산 시장이 위축되면서 부도 위기로 법정관리를 받으며 주인이 몇 차례 바뀐 뒤 현재는 SM그룹에 인수됐다. 현재는 우방 아이유쉘이라는 이름으로 아파트를 분양하고 있다.

호반과 중흥 등 현재 ‘잘나가는’ 건설사들은 부지를 직접 매입해 자체 공사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형 건설사가 재건축·재개발 등 정비 사업에 열을 올릴 때 중견 건설사들은 부지 매입에 공을 들였다.

LH나 지역도시공사에서 매각하는 공공택지를 주로 사들였다. 기반시설이 잘 갖춰져 있으면서도 비교적 싼값에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건축·재개발에 비해 사업 진행 속도가 빠른 것도 공공택지를 선호하는 이유였다. 광교신도시, 세종시 등에서 부지를 다수 입찰받았고 대규모 아파트를 시공·분양해왔다.

2013년 후반부터 아파트 분양 시장의 활황이 시작되자 호반건설과 중흥건설이 공격적으로 공급을 늘릴 수 있었던 배경도 부지를 많이 확보하고 있었던 데서 찾을 수 있다. 자체 부지가 있으면 분양 시장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공급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호반과 중흥, SM그룹은 공시 대상 기업집단으로 지정돼 준대기업으로 분류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분류한 2019년 공시 대상 기업집단에 포함되기 때문에 사실상 대기업에 준하는 규제를 받는다.

이들에게도 아직까지 진출하지 못한 미개척 분야가 있다. 국내 최고가 주택들이 밀집한 서울 강남이다. 강남은 서울시와 국토교통부의 각종 규제가 중첩돼 재건축 외 신규 아파트 공급이 어려운 곳이다. 재건축 조합원들의 눈높이도 까다로워 래미안, 자이, 힐스테이트, 아이파크 등 메이저 건설사의 브랜드가 아니면 수주가 어렵다.

지난해 호반이 대우건설을 인수하려고 했을 때 호반 측에서는 대우건설의 해외사업 수주와 시공 능력을 내세웠지만, 업계에서는 대우건설의 ‘푸르지오’ 브랜드를 활용해 강남 재건축 시장에 입성하려는 숨겨진 의도가 있다고 봤다. 한 건축사무소 설계사는 “건설사는 대부분 자기자본으로 공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리스크가 크다”며 “자기자본이 튼튼하고 현금 창출 능력이 우수한 기업은 다르지만 그렇지 않은 건설사의 경우 외부 충격이 닥치면 언제든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배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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