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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버스토리] 무엇이 아베의 난을 불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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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제
[2566호] 2019.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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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무엇이 아베의 난을 불렀나

문 정부는 과유불급의 우를 범했다

신지호  전 국회의원·게이오대 박사 

▲ 7월 21일 치러지는 참의원 선거 유세에 나선 아베 일본 총리. photo 뉴시스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다더니 역대 최악이라는 한·일 관계가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다. 그동안 한·일 관계는 정치-군사-역사라는 한 축이 흔들려도 경제-문화-민간교류라는 또 다른 한 축이 지탱해왔던 정경분리 원칙에 입각해 있었다. 하지만 한·일 관계의 이런 이중구조는 아베 정권의 경제보복 조치로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한국 경제에는 비상등이 켜졌다. 가히 ‘아베의 난(亂)’이라 할 만하다. 이 싸움은 기본적으로 승자가 없는 ‘마이너스 섬 게임’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한·일 양국에만 상처를 남기는 것이 아니다. 양국의 동맹인 미국에도 적지 않은 타격이 된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은 이 싸움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을 듯하다.
   
   전후 70년이 지났건만,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처럼 성숙한 동반자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독일·프랑스의 역사적 화해와 미래지향적 협력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라는 집단안보와 유로존이라는 경제통합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한·일 양국은 각각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 군사협력은 정보공유라는 초기 단계도 버거울 정도이며, 2015년 한·중 FTA 발효에도 불구하고 한·일 FTA는 요원하기만 하다.
   
   
   대만의 친일과 한국의 반일
   
   세계적으로 침략과 식민지배의 역사는 무수히 많으나, 한·일 관계만큼 그 뒤끝이 오래 지속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한반도에 대한 일제의 식민통치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잔혹한 무단통치였다는 점에 있다. 일부 일본인들은 대만의 친일(親日)과 한국의 반일(反日)을 비교하곤 한다. 식민 지배를 받은 건 같은데 이후 반응은 다르다며 한국인들의 ‘뒤끝’을 은근히 비판한다. 이런 비교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만에서는 메이지(明治)시대의 위대한 행정관이라 불리는 고토 신페이(後藤新平)가 현지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문민통치를 한 반면, 한반도에서는 자신의 반대자들을 단호하고 즉각적으로 굴복시키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정신을 이어받은 조슈 군벌(우두머리가 육군대장과 총리대신을 지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다) 출신의 총독들이 무단통치를 행하였다. 아베는 동향 출신의 요시다 쇼인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다.
   
   한·일의 화해를 어렵게 만든 또 다른 요인은 일본의 불철저한 과거 청산이었다. 많은 이들이 일본은 왜 독일처럼 하지 못하냐고 묻는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독일은 나치체제를 역사의 뒤안길로 퇴출시킴으로써 과거에 얽매임 없이 새 역사를 써 나갈 수 있었던 반면, 일본은 군국주의 정치체제였던 천황제가 존속됨으로써(현재의 천황은 국민통합의 상징적 기능을 한다)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사실 미국은 일본의 천황제를 없애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허락지 않았다. 미국은 1945년 8월 6일과 9일, 한 달 전에 실험성공한 원자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했고, 소련은 8월 9일 0시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향해 남하(南下)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8월 10일 천황제의 유지를 조건으로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뜻을 연합군 측에 전달했고, 미국은 이를 수용하였다. 미국은 왜 그랬던 것일까? 일본의 항복이 늦어지면, 소련군이 만주로부터 화북지방과 한반도를 점령하고 일본 본토에도 상륙할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요컨대 소련의 남하 저지라는 전략적 목표가 천황제를 살린 것이다. 당시 소련군이 만주를 거쳐 한반도 북부에 들어온 것은 8월 12일이었다. 미군이 오키나와 및 일본 본토 전투에 묶여 있던 상황에서 일본의 항복이 늦어졌다면, 38선은 37선으로 바뀌었을지 모른다.
   
   여하튼 위와 같은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한·일의 화해는 쉽지 않았지만, 미국의 거중 조정과 중재 등에 힘입어 1965년 수교 이래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다. 특히 1998년 김대중·오부치의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파트너십 선언’은 과거사 문제에 종지부를 찍은 역사적 사건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후 과거로의 회귀 현상은 재발되었고, 양국 관계는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점점 과거의 늪에 빠져들어갔다.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 없이 한·일 관계의 진전이 어렵다는 경직된 자세를 취하였다. 이로 인해 교착상태가 장기화되자 미국은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위안부 합의가 탄생하였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이를 외교 적폐로 몰아 합의사항을 무력화시켰다. 작년 10월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은 설상가상의 수준을 넘어 양국의 우호관계에 불을 지른 격이었다. 강제징용 피해 배상 문제는 1965년 한·일 협정으로 해결되었다는 역대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 법원에 의해 뒤집힌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삼권분립을 들어 어쩔 수 없다고 했지만, 이근관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에 의하면 이는 ‘외교 문제에 대한 사법 자제(judicial self-restraint)’ 원리를 훼손한 것으로 일본의 반발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한국 정부가 거부한 개인 보상금
   
   온전한 역사인식은 불편한 진실과도 마주한다. 한·일 양국은 1965년 수교에 이르기까지 14년 동안 협상을 진행했다. 강제징용 피해 배상 문제에 대해서는 1952년 재산청구권 위원회를 설치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한국 측은 8개 항에 이르는 ‘대일 청구 요강’을 제출했는데, 5항에서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및 기타 청구권을 변제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일본 측이 징용 피해 개인에 대해 일본 정부가 직접 배상하는 방안을 거론하자, 한국 측은 “개인에 대해서는 일본으로부터 보상금을 받은 후에 한국 내에서 처리하겠다”며 ‘일괄보상협정(lump-sum settlement)’ 방식을 주장하였다. 한국 정부가 이러한 방식을 주장한 이유는 수교 자금을 경제개발에 우선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1965년 수교로 획득한 무상 3억달러, 장기 저리 차관 2억달러는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소양강댐 등을 건설하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개인에 대한 보상은 1974년 대일민간청구권 보상법이 시행된 이후 이루어졌는데, 강제징용 피해자 중 사망자에 한해 1인당 30만원을 지급하였다.
   
   강제징용 피해자의 배상 청구권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2005년 노무현 정부가 한·일 협정 교섭 관련 외교문서(총 161권)를 전면 공개하면서다. 노 대통령은 그해 3·1절 기념사에서 “피해자들로서는 국가가 협정을 체결하며 국민 개개인의 청구권을 일방적으로 처분한 것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틀 후 국무총리실 산하에 ‘한·일 회담 문서 공개 민관 공동위원회’가 설치됐다. 이해찬 국무총리와 훗날 대법원장이 되는 이용훈 변호사가 공동위원장을 맡아 1965년 체결된 청구권 협정의 효력 범위와 이에 따른 정부 대책을 논의했다. 문재인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도 참여해 활동하였다. 공동위는 같은 해 8월 26일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에 대한 배상 청구권은 해결되지 않았으나,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해서는 1965년 협정으로 이미 해결됐다는 입장을 밝혔다. 청구권 협정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달러에 강제징용 배상이 포함되었다며, 정부는 당시 충분히 보상받지 못한 피해자들을 구제할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박정희 정부가 대부분의 자금을 경제개발에 투입하다 보니 당시 피해자들에게 돌아간 돈은 92억원에 불과했다. 이에 노무현 정부는 피해자 7만2631명에게 6200억원의 위로금을 지급했다. 과거 정부가 지불했어야 할 돈을 이제야 집행한다는 취지였다.
   
   
   문재인 변호사의 강제동원 소장
   
   이처럼 강제징용 배상 재청구는 ‘정의가 패배하고 불의가 득세한 역사’를 바로잡고자 했던 노무현 정부에서조차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문 대통령은 2000년 변호사 시절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히로시마 기계제작소에 강제로 동원된 피해자 6명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한국 법원에서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 최초의 제소였다. 문재인 변호사는 직접 소장을 제출했고 서면 준비, 증거 자료 제출 등을 수행하였다. 이랬던 변호사가 청와대 민정수석이 되어 관련 업무에 참여했으니, 어떤 결론을 바랐는지는 긴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문재인 민정수석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반전의 계기는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재판거래, 사법농단이라는 휘발성이 강한 소재가 발견된 것이다. 양승태 대법원의 숙원사업인 상고법원 설치와 박근혜 정부의 관심사항인 일본 기업의 강제징용 배상 재판이 부당하게 거래되었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이는 결국 강제징용된 개인에 대한 배상은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기업이 한국인 피해자들에게 개별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로 이어졌다.
   
   일본 사회는 격하게 반발하였다. 이미 결론이 났고 이후 한국 정부에 의해 재차 확인된 것들을 뒤집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 행위라고 분노했다. 그간 한국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사람들조차 대부분 돌아섰다. 이들의 논지는 분명했다.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회피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처리하기로 합의하고 약속한 것들을 어떻게 깨뜨릴 수 있느냐는 약속과 신의에 대한 물음이었다.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의 문제에서 국가 간 약속과 신의의 문제로 프레임이 이동한 것이다. 야마구치(山口)현 출신의 아베는 자국민의 이러한 정서를 자신의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해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이 분명하다.
   
   지난 7월 1일 일본의 수출제한조치가 발표되자 국내에서는 참의원 선거를 앞둔 일본의 국내 정치용 조치로 선거가 끝나면 달라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일본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안이하기 짝이 없는 주관적 희망일 뿐이다. 아베 정권이 3연임에 성공해 장수하는 이유는 이른바 ‘헤이세이(平成) 불황’으로부터의 탈출을 견인하고 있는 아베노믹스에 대한 기대와 지지 때문이다. 그런데 아베의 궁극적 목표는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전후체제를 청산하고 ‘보통국가’ 일본을 만드는 것이다. 마침 레이와(令和)로 연호도 바뀌었다. 그럼에도 헌법 개정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현재의 교착상태를 뚫고 나갈 외부 자극이 필요한데, 아베는 한국 변수를 어떤 형태로든 활용할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이다. 우리는 분명 피해자고 일본은 가해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요구나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대에게 빌미를 주어 가해자 신분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구를 강화시킬 뿐이다. 고도의 절제력에서 우러나온 정제된 요구만이 상대에 대한 구속력을 발휘한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는 과유불급의 우(愚)를 범했다. 아무리 외교는 국내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지만, 도가 지나쳤다. 그 결과, 과거사라는 대일 외교의 중요한 레버리지는 효력 상실의 위기에 처했다. 삼권분립 국가의 사법부 판단이라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은 통용되기 힘들다. 오히려 사법부가 행정부의 영역인 외교 사안에 개입하여 삼권분립을 교란시킨 사례로 언급될 가능성이 높다. 유일한 해결책은 대법원 판결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분명히 한 후, 정부가 나서 부족했던 배상을 책임지는 것이다.
   
   과거사 카드의 효력은 시간이 가면서 약해질 수밖에 없다. 할 만큼 했다는 일본 내부의 피로감, 일본 전후세대의 등장 및 주류화 등이 그렇게 만드는 요인이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다고, 문재인 정부는 아베 정권에게 귀중한 명분을 선물(?)했다. 앞으로의 싸움은 ‘과거사 반성을 모르는 일본 vs 약속을 뒤집는 한국’의 구도로 진행될 것이다.
   
   
   미국은 누구의 편일까?
   
   국제사회는 이 같은 프레임 전쟁에 어떻게 반응할까? 두말할 것 없이 미국의 반응이 제일 중요하다. 이와 관련, 미 국방부가 지난 6월 1일 발표한 ‘인도·태평양 전략보고서(Indo·Pacific Strategy Report)’는 많은 점을 시사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7년 11월 11일 베트남 다낭에서 열린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미국은 인도·태평양에서 오랫동안 친구, 파트너이자 동맹이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럴 것”이라면서 “미국은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을 구축하겠다”고 선언했다. 인도·태평양 전략은 인도양에서 태평양까지 걸쳐 있는 지역에서 법의 지배,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역내 항행의 자유 등을 공유하는 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차단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기존의 ‘아시아·태평양’을 ‘인도·태평양’이라는 명칭으로 바꿔 부르고, 태평양사령부도 인도·태평양사령부로 이름을 변경했다. 그런데 국방부 보고서는 미·일동맹을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번영의 초석(the cornerstone of peace and prosperity in the Indo·Pacific)’으로 언급한 반면, 한·미동맹을 ‘한반도와 동북아에 있어서 평화와 번영의 축(linchpin of peace and prosperity in Northeast Asia, as well as the Korean Peninsula)’으로 언급하였다. 한국을 다루는 약 2쪽 분량에 인도·태평양이란 단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오바마 정부 시절 한·일 양국의 국제정치학자들이 초석(cornerstone)과 축(linchpin) 중 어느 쪽이 중요한가를 놓고 논쟁한 적이 있는데, 이제는 논쟁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위상의 차이가 확연해졌다. 더불어 최근 미국의 반(反)화웨이 전선에 일본이 재빨리 동참한 반면, 한국은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 점도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외교는 국민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이익을 실현하는 것이다. 적폐청산이라는 국내 정치의 당파적 목표가 국익과 국격을 훼손하는 현실이 깊은 한숨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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