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화학이 미 국제무역위원회에 SK이노베이션에 대한 ‘조기 패소판결’을 요청하면서 두 회사 간의 ‘배터리전쟁’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photo 연합
LG화학이 미 국제무역위원회에 SK이노베이션에 대한 ‘조기 패소판결’을 요청하면서 두 회사 간의 ‘배터리전쟁’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photo 연합

LG화학이 미 국제무역위원회(ITC)에서 진행 중인 SK이노베이션과의 ‘영업비밀침해’ 소송 과정에서 “SK이노베이션이 자료 삭제를 지시하는 등 광범위한 증거인멸을 지속했다”며 법원에 조기 패소판결 등의 제재를 요청했다. LG화학이 지난 4월 ITC에 ‘영업비밀침해’ 소송을 제기하자 SK이노베이션이 이메일을 통해 자료 삭제를 지시하는 등 증거인멸을 한 정황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LG화학이 제출한 67쪽 분량의 요청서와 94개 증거목록이 지난 11월 13일 ITC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됐다. 이 내용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증거보존 의무를 무시하고 조직적으로 증거인멸 행위를 했다. 또 ITC의 포렌식 명령을 준수하지 않은 ‘법정모독’ 행위도 했다. LG화학은 이를 근거로 SK이노베이션에 패소판결을 조기에 내려줄 것을 ICT 측에 요청했다. 또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의 영업비밀을 탈취해 연구개발, 생산, 테스트, 수주, 마케팅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사용했다는 사실 등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ITC는 소송 당사자가 증거자료 제출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거나 고의적으로 누락시키는 행위가 있을 경우 강한 조치를 취할 수 있으며, 실제 재판 과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원고가 제기한 조기 패소판결 요청이 받아들여지면, 예비결정 단계 이전에 피고에게 패소판결이 내려진다. 이후 ITC 위원회에서 최종결정을 내리면 원고 청구에 기초해 관련 제품에 대한 미국 내 수입금지 효력이 발생한다.

LG화학이 제출한 요청서와 증거목록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이 소송 관련 내용증명 공문을 발송한 지난 4월 8일 7개 계열사 프로젝트 리더들에게 자료 삭제와 관련된 메모를 보낸 정황이 발견됐다. 또 같은 달 12일에도 사내 75개 관련 조직에 자료 삭제 지시서와 함께 LG화학 관련 파일과 메일을 목록화한 엑셀시트 75개를 첨부한 후 이와 관련된 문서를 삭제하라는 메일을 발송했다는 것이다.

SK이노베이션이 지난 8월 21일 ICT에 제출한 ‘SK00066125’ 엑셀시트도 삭제돼 휴지통에 있던 파일이며, 이 시트 내에 정리된 980개 파일 및 메일은 소송과 관련이 있는데도 단 한 번도 제출되지 않았다는 것이 LG화학 측의 주장이다. LG화학은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해 ITC에 포렌식을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LG화학이 제출한 증거인멸 자료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이 ITC 소송을 제기한 4월 29일 ‘[긴급] LG화학 소송 건 관련’이라는 제목으로 사내 메일을 보냈다. 메일은 “경쟁사 관련 자료를 최대한 빨리 삭제하고 미국법인(SKBA)은 PC 검열·압류가 들어올 수 있으니 더욱 세심히 봐달라. 이 메일도 조치 후 삭제하라”는 내용이다.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탈취한 영업비밀을 이메일 전송과 사내 콘퍼런스 등을 통해 관련 부서에 조직적으로 전파했다고도 주장했다. “LG화학 연구소 경력사원 인터뷰 내용을 분석하고 요약한 정보에 따른 것”이라며 사내에서 공유한 이메일에 LG화학의 전극 개발 및 생산 관련 상세 영업비밀 자료가 첨부돼 있었다는 것이다.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 출신들을 채용한 이후 이들을 통해 전지의 핵심 공정 및 스펙에 관한 상세 내용 등 LG화학의 영업비밀을 전파했다는 것이 LG화학 측의 주장이다.

이에 ITC는 지난 10월 “980개 문서에서 ‘LG화학 소유의 정보’가 발견될 구체적인 증거가 존재한다”며 “LG화학 및 소송과 관련이 있는 ‘모든’ 정보를 찾아서 복구하라”며 포렌식을 명령했다. 그러나 SK이노베이션은 ITC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980개 문서가 정리되어 있는 ‘SK00066125’ 단 한 개의 엑셀시트만 조사했다는 것이 LG화학 측의 주장이다. 나머지 74개 엑셀시트에 대해서는 SK이노베이션이 9월 말부터 자체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LG화학 측은 설명했다. SK이노베이션은 포렌식 진행 시 LG화학 측 전문가도 한 명 참석해 관찰할 수 있도록 하라는 ITC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조사과정에서 LG화학 측 전문가를 의도적으로 배제시키는 등 포렌식 명령 위반 행위를 지속했다고 지적했다.

LG화학 관계자는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으로부터 탈취한 영업비밀을 이메일 전송과 사내 콘퍼런스 등을 통해 관련 부서에 조직적으로 전파해온 것으로 보인다”며 “공정한 소송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계속되는 SK이노베이션의 증거인멸 및 법정모독 행위가 드러나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에 달했다고 판단해 강력한 법적 제재를 요청하게 됐다”고 했다.

조기 패소판결 요청, 패소시 치명상

앞서 2018년 11월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은 최대 500억달러(약 59조원)에 달하는 폭스바겐의 미국 전기차 배터리 물량 수주를 놓고 경쟁을 벌였고, SK이노베이션 측이 수주를 따냈다. 이에 2차전지 업계 선두주자로 꼽히는 LG화학이 지난 4월 미국 현지에서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배터리(2차전지) 영업기밀을 빼갔다”며 소송을 제기하고 나섰다.

앞으로 소송 진행 상황에 따라 2차전지 시장을 놓고 다투는 두 회사 중 하나는 치명상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특히 SK이노베이션은 지난 3월 미국 조지아주에 폭스바겐 배터리 물량공급을 위한 신규 공장 착공을 시작했다. 패소할 경우 ‘유령공장’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은 상황이다.

2018년 5월 구본무 회장이 작고한 후 구광모 현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하면서 2차전지 사업은 LG의 대표적인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꼽혀왔다. 이에 LG화학은 2018년 11월 신학철 전 3M 수석부회장을 새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영입했다. 신학철 부회장은 LG화학이 1947년 락희(樂喜)화학공업으로 창립한 이래 처음으로 외부에서 수혈된 최고경영자(CEO)다. 신학철 부회장은 부임 직후 인력유출이 문제가 된 전지사업부의 성과급을 400~500%로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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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승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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