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정몽규 HDC그룹 회장. (우)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photo 뉴시스
(좌) 정몽규 HDC그룹 회장. (우)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photo 뉴시스

HDC현대산업개발이 아시아나항공을 사실상 인수하면서 범(汎)현대가 내 순위도 급변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자산규모 5조원 이상의 기업집단을 ‘공시대상 기업집단’, 자산규모 10조원 이상의 기업집단을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으로 지정한다. 지난 5월 자산 10조원을 넘겨 ‘대기업 집단’으로 불리는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에 첫 지정된 정몽규 회장의 HDC그룹은 자산 8조원가량의 아시아나항공을 비롯 에어부산, 에어서울 등 6개 자회사의 우선인수협상 대상자로 선정되면서 재계 순위가 수직상승하게 됐다.

공정위에 따르면, HDC그룹은 올해도 재계 46위(2018년 기준)에서 33위로 자산총액 기준 순위가 가장 많이 상승한 기업으로 꼽혔다. 서울춘천고속도로㈜ 등을 계열로 편입하면서다. HDC그룹은 아시아나항공을 품으면서 내년에도 이 같은 타이틀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기존에 재계 순위 18위에 올라 있던 대림(18조원), 아시아나항공을 함께 인수한 19위 미래에셋(17조원)과 엇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서게 된다.

또한 HDC그룹은 고(故) 정주영 회장이 창업한 현대그룹을 뿌리로 하는 소위 ‘범현대가 기업’ 가운데 현대백화점그룹을 제치고 현대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에 이어 세 번째로 덩치가 큰 기업이 됐다. 범현대가 기업 가운데 가장 큰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그룹은 자산 223조원으로 재계 2위,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그룹은 자산 54조원으로 재계 10위에 올라 있다.

기존에 범현대가 기업 가운데 세 번째로 덩치가 컸던 곳은 현대백화점그룹이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자산 15조원으로 재계 21위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HDC현대산업개발이 8조원가량의 아시아나항공 인수로 덩치를 크게 불리면서 내년부터는 순위가 뒤바뀔 전망이다.

범현대가의 방계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HDC그룹과 고 정주영 회장의 직계 기업 중 하나인 현대백화점그룹은 1999년에 현대그룹에서 분가한 이후 줄곧 재계 순위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해왔다. HDC현대산업개발은 서울 압구정 현대아파트 등을 지어올린 현대건설 주택사업부가, 현대백화점그룹은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등을 운영하던 금강개발산업이 전신이다.

정주영 회장의 넷째 동생인 고 정세영(포니정) 회장은 과거 자신과 아들 정몽규 회장이 이끌었던 현대자동차를 정몽구 현 회장에게 넘기는 대신 현대산업개발을 받아서 1999년 분가했다. 현대백화점 역시 같은해 정주영 회장의 셋째 아들인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이 이끌고 나왔다. 현재 현대산업개발은 고 정세영 회장의 장남인 정몽규 회장이, 현대백화점그룹은 정몽근 명예회장의 장남인 정지선 회장이 이끌고 있다.

1999년 분가 이후 순위 경쟁 치열

현대그룹이 2000년 ‘왕자의 난’을 거쳐 분가를 거듭하면서 삼성그룹에 재계 1위 자리를 빼앗긴 이후의 재계 순위 변동을 살펴보면 이 같은 흐름을 관찰할 수 있다.

2001년 재계 순위를 보면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넘겨받은 다섯째 아들 고 정몽헌 회장의 현대그룹이 자산 53조원으로 재계 2위, 둘째 아들 정몽구 회장이 이끌고 독립한 현대차그룹이 자산 36조원으로 재계 5위, 정몽혁 회장(정주영 회장의 다섯째 동생 정신영씨의 장남)이 이끌고 계열분리한 현대정유(현 현대오일뱅크)가 13위, 현대산업개발이 자산 4조원으로 22위, 현대백화점이 2조원으로 26위였다.

하지만 10년 후인 2011년 재계 순위를 살펴보면 큰 변화가 관찰된다.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그룹(2위)과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그룹(7위)이 범현대가 기업 중에서 1, 2위 구도를 형성하는 가운데, 고 정몽헌 전 회장의 부인 현정은 회장이 이끄는 현대그룹이 자산 13조원으로 21위, 현대백화점그룹이 자산 8조원으로 재계 30위, 현대산업개발이 자산 7조원으로 재계 37위에 오르는 등 순위가 바뀐다. 이후 건설경기 악화 등으로 현대산업개발이 채권단 재무구조개선약정을 체결한 직후인 2015년에는 현대백화점그룹이 12조원으로 19위, 현대산업개발이 6조원으로 33위에 오르는 데 그치면서 그 순위가 더욱 벌어진다.

지난해 지주사 전환을 통해 ‘HDC그룹’으로 재탄생한 HDC현대산업개발의 아시아나항공 인수는 현대백화점그룹과의 오랜 순위 경쟁에서 재역전하는 것과 동시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특히 HDC현대산업개발이 주력인 부동산 개발과 주택건설 외에도 유통업, 면세점, 호텔리조트, 항공 등으로 사업다각화를 추진하면서 과거 한솥밥을 먹었던 현대백화점그룹과 얼굴을 붉히는 일도 점차 늘고 있다.

HDC현대산업개발은 현재 본사를 두고 있는 서울 용산역 민자역사 개발사업과 함께 유통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유통 노하우가 부족해 상당 기간 고전을 면치 못했다. 2015년 삼성가(家)의 일원인 이부진 사장이 이끄는 호텔신라와 함께 HDC신라면세점 합작법인을 설립하고 용산 아이파크몰(옛 아이파크백화점) 내에 ‘신라아이파크면세점’을 오픈하면서 가까스로 본궤도에 올린 상태다. 신라아이파크면세점은 용산 아이파크몰의 3층부터 7층까지 5개층을 면세점으로 쓰는데, 2015년 신규 특허를 받은 서울 시내 대기업 면세점 4곳 중 흑자를 내는 몇 안 되는 곳이다.

하지만 당시 HDC현대산업개발이 삼성가에 속하는 호텔신라와 손을 잡고 용산 아이파크몰에 면세 특허를 따내면서 함께 경쟁을 벌였던 현대백화점그룹과 사이가 벌어졌다는 얘기가 나왔다. 현대산업개발이 현대그룹에서 분가하기 전인 1998년 용산역 민자역사 사업자로 선정됐을 당시 입점이 추진된 곳은 현대백화점이었다. 결국 HDC신라가 당시 면세점 특허권을 따내면서 현대백화점은 고배를 마셨다. 절치부심하던 현대백화점은 이듬해인 2016년 재도전 끝에 서울 강남구 삼성동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에 면세특허를 유치할 수 있었다.

실제 HDC현대산업개발은 범현대가의 일원임에도 호텔신라와 합작법인(HDC신라면세점)을 세우고, 지난해 대대적으로 증축한 용산 아이파크몰에 범삼성가의 일원인 신세계그룹의 이마트 용산점과 CJ그룹의 CJ CGV 본사를 두는 등 범삼성가 측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현대산업개발의 몸집 키우기에 맞서 현대백화점그룹도 덩치 키우기에 나선 상태다. 그간 가구(리바트), 패션(한섬, SK네트웍스 패션 부문), 건자재(한화 L&C) 등을 거듭 인수하면서 M&A(인수합병) 시장의 다크호스로 통한 현대백화점그룹은 지난 11월 12일에는 면세점 특허를 반납하기로 한 두산의 동대문 두타면세점을 약 618억원에 통째로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두산은 2015년 면세점 특허를 받아 2016년부터 면세점을 운영했는데, 그간 실적악화로 고전해왔다. 이로써 현대백화점은 2016년 동대문에 흉물로 있던 케레스타쇼핑몰(옛 거평프레야타운)에 현대시티아울렛 동대문점을 개설한 데 이어 두 번째로 동대문 상권에 깃발을 휘날리게 됐다. HDC그룹과 현대백화점그룹 간의 순위 경쟁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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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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