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신관 34층에서 인터뷰 중인 고 신격호 명예회장. ⓒphoto 서경리 조선뉴스프레스 기자
2016년 12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신관 34층에서 인터뷰 중인 고 신격호 명예회장. ⓒphoto 서경리 조선뉴스프레스 기자

지난 1월 19일 서울아산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한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불가능을 몰랐던 대한민국 창업 1세대’ 중 한 명이다. 그야말로 맨손으로 사업을 시작해 식품·유통·관광·석유화학 분야를 아우르는 대기업을 일궈낸 자수성가형 기업가다. 삼성그룹 이병철, 현대그룹 정주영, LG그룹 구인회 창업주 등과 함께 대한민국 1세대 대표 기업인으로 꼽힌다.

기자는 이 ‘거인’과 거의 1년여간 지속적인 만남을 가졌었다. 2016년 12월부터 2018년 1월까지 신격호 명예회장의 집무실과 거처를 겸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신관 34층에서 약 20차례 만났다. 1년여간 매주 1회씩 꾸준히 만난 기간도 있었고, 신 회장의 건강 문제로 수개월 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다시 만남을 이어가기도 했다.

기자가 신 명예회장을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월간조선 2017년 1월호에 실린 그와의 단독 인터뷰가 계기였다. 기자는 2016년 중반부터 신 명예회장과의 인터뷰를 추진해 그해 12월 두 차례에 걸쳐 그를 인터뷰했다. ‘마지막 남은 1세대 창업주의 무한책임 경영’이란 제목으로 나간 그 인터뷰 기사가 계기가 돼 롯데 창업주와의 값진 인연을 쌓을 수 있었다. 신 명예회장을 인터뷰하던 무렵 롯데그룹은 이른바 ‘형제의 난’이라고 불리는 창업주의 두 아들(장남 신동주 SDJ 회장, 차남 신동빈 롯데 회장) 간 경영권 분쟁으로 무척 어수선했다. 그런 시기 신 명예회장은 기자에게 많은 말을 하고 싶어 했다. 인터뷰 자리에서는 기업인으로서의 생각도 밝혔지만 일상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인터뷰라기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편하게 하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그의 측근들과 훗날을 위해 육성을 기록한다는 합의를 하고 만남을 이어갔다.

본래 신 명예회장은 자신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기자와의 단독 인터뷰도 2000년 12월 도쿄 롯데 본사에서 조갑제 당시 월간조선 편집장과 가진 인터뷰 이후 16년 만이었다. 그만큼 육성과 자신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을 꺼리는 인물이기에 기자에게 주어진 1년여의 만남은 무척이나 값진 기회였다. 그래서 기자는 당시 신 명예회장을 모시고 있던 장남 신동주 회장 측에 “기록을 남겨서 적절한 때가 되면 책으로 발행하자”는 제안을 했고 승낙을 얻어냈다. 특히 대한민국을 일군 창업 1세대의 육성을 정리해 ‘꿈을 잃어가는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는 이야기’를 전달하자고 뜻을 모았다. 동시에 한국, 일본 양국 출간을 통해 ‘한국인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신격호의 굳은 의지를 일본인에게 확인시켜주자는 의미도 부여했다.

기자는 신격호 명예회장의 예상치 못했던 별세를 맞아 회고록 발간 전이라도 1년여간의 만남을 통해 그가 털어놓은 숨겨진 얘기를 기사 형식으로 전하기로 했다. 그의 육성과 함께 그동안 회고록을 위해 폭넓게 만났던 롯데 창업 동지들과 측근들이 밝히는 숨겨진 얘기도 곁들여 소개한다.

기자와 만나는 동안 신 명예회장은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다. 좋아지고 나빠지기를 반복했는데, 대체로 하강(下降)하고 있었다. 기억의 커튼이 서서히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의사능력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판단력은 어느 정도 살아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숨겨진 진심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측면도 있었다.

여러 차례 “북한 투자하고 싶다”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기억의 커튼이 서서히 내려간다는 느낌을 받은 경험은 이런 때였다. 기자가 신 명예회장을 만나 ‘조선일보 계열사’ 소속이라고 이야기하면 그는 매번 “방우영 회장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방 회장이 2016년 5월 이미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렸다. 기자가 “얼마 전 돌아가셨다”고 이야기하면 그의 표정이 곧 어두워졌다. 대화를 이어가다가 다시 방 회장 안부를 물으면 “안부를 잘 전하겠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온전한 정신 상태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보였다.

기억은 잃어가고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주관은 뚜렷하게 이야기했다. 특히 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할 때가 그랬다. 이와 관련해 1년여간의 인터뷰에서 기억에 남는 대목은 그의 북한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었다. 그는 기자에게 “북한에 투자하고 싶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다. 특히 호텔업 진출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북한의 호텔 현황에 대한 질문을 자주 던져서 미리 자료조사를 해갖고 가서 질문에 답할 때도 있었다.

그는 “북한에 호텔이 있나?”라고 묻곤 했다. “유경호텔이라고 있다”고 소개하면 “좀 더 알아보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가 북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놀라워 “북한에 투자하고 싶으세요?”라고 물으면 분명한 어조로 “그래”라고 대답했다. “왜 투자하고 싶냐”고 물으면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고향이잖아!”

신 회장의 고향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경남 울주군(현 울산광역시)이다. 자신도 고향이 울산이라는 사실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북한에 대해 ‘고향’이라고 표현했을까. 짐작건대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오래 타향살이를 했던 그로서는 아마 한반도 전체를 고향으로 여겼던 것 같다.

‘고향’에 대한 애틋한 생각은 그와의 만남에서 수도 없이 반복됐다. 그 연장선에서 북한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남북통일에 대해 생각을 밝힌 적도 있었는데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

- 통일은 언제쯤 올까요. “시간이 걸린다고. 이북은 독재잖아. 김정일(사망을 인지 못함)은 자기가 통일하고 싶어 한다고.”

- 북한에 가보고 싶으세요. “한국 사람이 살고 있잖아. 한번 가보고 싶어. 한국하고 이북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고 싶기도 하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북한에 투자를 꼭 하시라”고 권유한 적이 있는데 그때 신 회장은 농반진반으로 “(북한에 투자하면) 다 빼앗기라고?”라고 얘기해 인터뷰 장소의 배석자들을 웃긴 적도 있다. 그의 기억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느낀 순간이었는데, 농반진반의 말 속에서 상인(商人)의 날카로운 셈법이 느껴졌다. ‘다 빼앗길지 모른다’는 그에게 “북한이 안 뺏는다고 약속하면요?”라고 묻자 그의 대답은 “믿을 수가 없잖아”였다.

그에게 “북한이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은 적도 있는데 이 대답도 걸작이었다. “(웃으며) 내가 북한 가서 지도하면 빨리 발전할 거야. 10년 (지도하면) 북한이 한국을 따라잡게 할 수 있어.”

이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꼭 건강을 회복하셔서 북한도 살기 좋게 해주세요”라고 덕담을 건넨 기억이 있다.

이런 대화에서 짐작하듯 그가 한국에 투자한 것도 고향에 대한 애틋함 때문이었다. 한국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단순했고, 한국에 투자한 이유에 대한 답변 역시 간단했다. 그는 “한국이 고향이잖아. 한국에서 사업을 해보고 싶었어”라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에 (투자를) 많이 했다. 한국도 일본처럼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지. 일본에 살고 있다가, 한국에 호텔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보고 투자했지. 백화점도 하고.”

- 일본 경영진이 반대하지 않았나요. “직접 반대하는 것이 없지만도 (않았지). 가끔 그런 사람들 있다고. 그 사람들 그때는 한국에 투자한다고 하면 이상하게 보았다고. 그 시절 한국이 형편없었어. 왜 한국에 투자하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한국이 많이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했어.”

젊은 시절의 신 명예회장. ⓒphoto 롯데지주
젊은 시절의 신 명예회장. ⓒphoto 롯데지주

‘형제의 난’이라는 비극

1년여의 인터뷰 기간 중 안타까웠던 순간도 있었다. 서울 소공동 롯데 신관 34층에서 잠실 롯데월드타워로 그의 거처가 옮겨지기 직전의 상황이 특히 그랬다. 당시 상황은 비극(悲劇)처럼 보였다. ‘형제의 난이라는 참극이 이런 극한 상황까지 연출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신 명예회장 거처를 옮기는 것을 두고 두 형제 진영 간에 논란이 일던 상황에서 소공동 롯데호텔은 2017년 8월부터 전면 개보수 공사를 시작했다. 급기야 2018년 1월 그의 거처를 잠실로 옮겨가기 직전에 가진 인터뷰는 엄청난 소음 속에서 진행됐다. 34층 위층과 아래층에서 공사가 동시에 진행돼 40대인 기자도 버티기 힘든 소음과 진동이 느껴졌다. 극심한 어지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당시 신 명예회장 역시 진동을 느끼고 “이게 뭐 하는 거냐”고 물었다. “공사 중이다”라고 대답하자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차라리 호통을 치든가 그만두라고 이야기했다면 나았을 것인데 회사 일이니 참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냥 고개만 끄떡인 것으로 해석됐다.

이는 평소 소신 때문이었을 것으로도 짐작했다. ‘신격호가 롯데이고, 롯데가 신격호’라는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다. 그는 그만큼 자신이 일군 회사부터 생각했다. 그의 거처였던 호텔 34층에서 바라보면 롯데백화점 주차장이 보인다. “왜 차가 별로 없어? 손님이 별로 없나 봐?” 그는 수시로 롯데를 걱정했다. 그것은 일종의 자부심이기도 했는데 이런 문답 속에서도 그의 자부심이 엿보였다.

- 젊은 시절 무엇을 하고 싶으셨어요. “롯데 만들었잖아. 롯데 내가 전부 만들었다고. 롯데 이름도 내가 지었어.”

이런 적도 있다. 신 명예회장에게 “혹시 가보고 싶은 곳이 없냐”고 물으니 “(영화 보러) 극장에 가고 싶다”고 답해 비서들이 통로를 확보해 극장으로 모시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어렸을 때 동네 천막에서 영사기를 틀어주던 영화관에 자주 갔었다고 한다. 돈이 없어 멀리 언덕에 올라가 영화를 훔쳐본 적도 많았다고 한다. 그가 말년에 “극장에 가고 싶다”는 욕구를 내비친 것도 이런 어릴 적 추억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를 극장으로 데리고 가려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가 막상 극장으로 가자고 하자 “내가 가면 (롯데 직원과 손님들이) 불편해서 안 돼”라며 거부했기 때문이다. 기억을 잃어가는 순간에도 사업과 회사를 중시하는 본능이 남아 있던 셈이다.

신 명예회장은 장남(신동주 SDJ 회장)을 눈에 띄게 아꼈다. 인터뷰 도중 갑자기 창문을 보다가 “동주가 보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차남(신동빈 롯데 회장) 입장에서는 편애(偏愛)로 느껴졌을 법하다. 이와 더불어 신동빈 회장으로서는 아버지로부터 심한 압박과 부담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신 명예회장을 직접 만나보면 타고난 카리스마로 상대방을 압박하는 스타일이라는 걸 금방 느낄 수 있다. 세세한 것을 따지면서 잘못이 보이면 거침없이 질책을 하는 스타일이다. 이로 인한 압박과 부담을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가는 차남 신동빈 회장은 오롯이 혼자서 감당했을 것이다. 그걸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형제간 쌓인 감정의 골이 깊었다. 이런저런 오해가 쌓이면 솔직한 대화로 풀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한쪽에서 통화를 하려 하면 다른 쪽에서 받지 않았다. 신 명예회장은 감성적이면서도 냉철한 결단력이 있었는데 두 형제는 아버지의 한 부분만을 닮은 것으로 비쳤다. 이러한 기질의 차이도 형제간 싸움에 영향을 미쳤다.

말년의 시련 형사재판

신 명예회장과 친분이 두텁던 일본 동포 기업인들을 만나면 신 명예회장의 말년과 관련해 가장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를 옭아넣었던 형사재판이었다. “회장님이 재판을 받고 있는 이유를 알려달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은 업무상 횡령·배임 혐의로 기소된 신 명예회장에게 항소심과 똑같이 징역 3년과 벌금 30억원을 확정했는데 당시 재판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 같았다. 모두가 신 명예회장이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설령 유죄가 나오더라도 수형생활을 단 하루도 견딜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실제 대법원에서 판결이 내려졌음에도 그에 대해서 ‘형 집행정지’가 결정되었다. 결과적으로 그 재판은 신 명예회장의 ‘명예’만을 빼앗았을 뿐이다.

그 죄라는 것도 사실 그와 사실혼 관계에 있던 서미경씨를 먹고살게 해주려고 챙겨준 데서 비롯됐다. 그것도 영화관 팝콘 영업권을 준 것으로, 이미 오래전 공정위가 문제 삼았던 사안이었다. 공정위 등에서 문제 삼을 것이 우려되어 감정평가를 거쳐 적정액으로 평가해 서미경씨 등에게 넘겼는데 다시 문제가 된 것이다. 물론 수익이 보장된 사업이기에 경쟁입찰을 거치지 않은 것을 엄격한 법의 잣대로 들여다보면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생 대기업을 일군 공로가 있는데, 이 정도를 갖고 법의 칼날을 들이대는 것이 온당하냐고 보는 시각도 많았다.

1년여간 신 회장을 만나면서 서미경씨를 끝까지 책임지려는 그의 태도는 인상적이었다. 신 명예회장의 측근으로부터 서씨가 소공동 34층 집무실을 찾아온 일화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 미리 서씨가 34층을 찾겠다고 알려오자 비서진이 이를 보고했고 신 회장은 “며칠 후에 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약속대로 서씨는 34층을 찾았다가 조용히 돌아갔지만 서씨가 돌아간 후 신 명예회장은 안타깝게도 서씨가 왔다간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서씨가 다녀간 후에도 서씨가 언제 오냐고 묻기도 했다. 비서가 “이미 ‘혼자’ 다녀갔다”고 이야기하면 그는 “내가 비서와 운전기사까지 마련해줬는데 왜 혼자 왔다갔어”라고 말했다. 서씨에 대한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대목으로, 그가 서씨를 끝까지 책임지고 싶어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때서야 비서들이 그의 속뜻을 읽고 “비서가 서씨를 수행했다”고 알리면 그제서야 그는 안심하는 표정이 되었다고 한다.

1998년 고 신격호 명예회장이 고향인 울산 둔기리에서 가족들과 찍은 사진. 왼쪽부터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 신격호 명예회장, 장손 정훈, 맏딸 신영자, 신동주, 큰며느리 조은주, 딸 규미를 안고 있는 신동빈, 둘째 며느리 시게미쓰 마나미, 신동빈의 아들 유열과 차녀 승은. ⓒphoto 롯데그룹
1998년 고 신격호 명예회장이 고향인 울산 둔기리에서 가족들과 찍은 사진. 왼쪽부터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 신격호 명예회장, 장손 정훈, 맏딸 신영자, 신동주, 큰며느리 조은주, 딸 규미를 안고 있는 신동빈, 둘째 며느리 시게미쓰 마나미, 신동빈의 아들 유열과 차녀 승은. ⓒphoto 롯데그룹

포철 최초 제안… 리베이트 요구로 포기

신 명예회장의 꿈은 중공업 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특히 규모가 큰 사업을 하고 싶어 했다. 지난 1월 20일 신 회장 빈소가 마련된 서울 아산병원에서 황각규 롯데지주 대표이사(부회장)도 “신 명예회장이 제철 사업을 하고 싶어 했다”고 밝혔다. 황 부회장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 롯데는 제철 사업을 하기 위해 50명으로 태스크포스(TF)를 꾸린 적도 있다고 했다. 당시 박정희 정부에 제철 사업 제안을 했으나 제철 사업은 국가 주도로 해야 한다는 정부 결정 때문에 무산됐다고 한다.

측근들에 따르면, 포항제철은 원래 신 명예회장이 먼저 추진하던 사업이었다. 역사는 ‘순수한 애국심’에서 정부의 요청에 따라 그가 포철 사업을 정부에 넘긴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비사(秘史)와 남다른 사정이 숨어 있다. 롯데가 제철업 진출을 추진하던 당시 신 명예회장을 대신해 정부와 협상을 했던 핵심 측근을 2018년 일본 도쿄에서 만나 당시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제철사업 진출을 포기했던 진짜 이유는 (박정희 정부로부터) 리베이트를 요구받았기 때문이었다”고 증언했다. 요구받았던 구체적인 액수까지 당시 인터뷰에서 언급됐다. 이 인사는 자신이 정부로부터 받았던 요구조건을 신 명예회장에게 전했는데 당시 그는 이를 거부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난 그런 식으로는 안 해.”

그는 포철을 포기한 것이 억울할 수도 있었지만 이후 그런 뒷얘기를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생전에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을 아무 조건 없이 도와준 데도 이런 스타일이 녹아 있는지 모른다. 실제 신 회장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특히 1970~1980년대 일본에서 공부하던 한국 유학생 중 상당수가 그의 도움으로 공부했다. 기술이 필요해 일본에 무작정 찾아왔던 기업인들에게는 기술을 가진 일본 기업을 소개해줬다. 일본 정부와의 협상에서도 정부를 대신해 그가 나선 경우가 적지 않았다.

평소 신 명예회장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에게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느냐”고 물으면 “그래, 한국인은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잖아.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2017년경 그가 기업 경영에서 물러날 즈음부터 롯데를 향해서는 곤란한 질문이 계속돼왔다. ‘롯데가 한국 기업인가, 일본 기업인가?’ 이 질문은 사실 롯데 측에 “한국 기업이다”라고 말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이 질문에 대해 신 명예회장은 뭐라고 답했을까. 그는 생전에 “롯데는 반은 한국, 반은 일본 기업이다”라고 자주 이야기했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이 말을 반복했다.

- 롯데는 한국 기업인가요, 아니면 일본 기업인가요. “반반이지. 한국, 일본 반반이라고. 일본에서 출발해서 한국에 왔잖아.”

사실 이것이 정답일 것이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고, 더 나은 조건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신 명예회장은 한국 투자를 시작할 때 “한국에서 번 돈을 일본에 가져가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이 약속을 확실하게 지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히려 일본 측에서 투자금 회수를 하지 않느냐는 불만이 생길 정도였다. 신 명예회장의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아마 일본의 이런 불만을 누를 수 있었을 것이다. 기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그에게 직접 질문한 적이 있다.

- 한국에서 번 돈을 일본에 안 가져갔나요. “안 가져갔어. 다 한국에 투자했잖아.”

- 일본에 가져가면 안 되나요. “그거는 자유야.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유지.”

- 일본 정부가 싫어하지 않을까요. “관계없잖아. 자유라고.”

대중에 나서지 못한 속사정

신 명예회장은 ‘은둔의 경영자’였다. 가급적 언론에 나서지 않았고, 가능하면 노출을 피했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이는 어쩔 수 없었던 측면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 한창 사업을 할 때 그는 한국인을 만나도 일본어로 대화했다. 이상할 수도, 비난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인이 일본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감당해야 했던 어려움이 그의 행동 속에 깔려 있다. 그가 처음 일본에 발을 들여놓았던 때는 나라도 잃은 상태에서 혹시나 차별받지 받을까 가슴 졸였을 때였다. 일본에서 사업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일본은 조센징이라고 욕은 해도 차별은 하지 않았어.”

신 명예회장은 한국어 사용이 어눌했다. 오랜 일본 생활로 단어의 사용이나 선정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리고 이를 굳이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공개된 곳에 나서봐야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또 스스로 한국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는 반일 감정이 끓어오르면서 롯데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던 시기에 롯데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생각을 거꾸로 기자에게 묻기도 했다.

“롯데에 한국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나. 좋게 보고 있나 나쁘게 보고 있나.”(신 명예회장)

“어린 시절에 롯데월드에서 즐겁게 놀았던 추억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롯데에 있습니다.”(기자)

그는 사람들이 롯데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기를 무엇보다 원했다.

신 명예회장은 남을 험담하거나 비난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간혹 감정이 격해져서 말의 강도가 세지면 기록하지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소개하고 싶다. “한국은 아주 보수적이야. 다 반대한다고.”

우리 사회가 기업인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불만의 표출이었다.

신 명예회장은 기업가정신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사회봉사 하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야. 회사를 많이 발전시켜서 종업원들을 많이 (고용하면), 그 사람들 실업자가 되지 않잖아.”

대부분의 1세대 창업주들이 생각하는 이른바 ‘기업보국’은 이런 것이다. 이제 안타깝게도 신격호를 마지막으로 그 1세대가 모두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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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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