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분기 실적을 발표하고 있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photo AFP·연합
2019년 3분기 실적을 발표하고 있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photo AFP·연합

‘소프트뱅크가 스타트업을 속였다.’

미 온라인매체인 악시오스는 2020년이 막 열린 1월 6일, 비전펀드의 투자 자세를 통렬하게 비판한 기사를 실었다. 그동안 실리콘밸리를 매료시키며 벤처캐피털 업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소프트뱅크의 비전펀드였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이끄는 이 사모펀드의 규모는 970억달러(약 121조9000억원)로 세계 최대였고 지원을 받은 스타트업들 중 상당수는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가 10억달러 이상인 비상장 스타트업)으로 성장했다.

악시오스의 기사에서는 비전펀드의 자세가 돌변한 사례와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스타트업들이 등장한다. 구글에 근무했던 세스 스템버그가 세운 호너(Honor)는 실버산업에 뛰어든 신생 기업이다. 2019년 11월 중순경, 비전펀드는 1억5000만달러 규모의 투자를 호너에 제안했고 손 회장은 스템버그 CEO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두 회사는 투자계약서까지 교환했는데 막판에 비전펀드 측에서 투자 계획을 일방적으로 철회했다. B2B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시스믹(Seismic), 햄버거 만드는 로봇을 개발한 크리에이터(Creator)도 호너와 같은 일을 겪었다.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자금도 얻지 못했고 시간까지 날려버린 최악의 사태를 겪었다. 악시오스는 “손정의 회장이 신규 투자의 속도를 늦추고 싶은 의향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악시오스 주장대로라면 그동안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투자해오던 손 회장이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는 얘기가 된다. 2017년 출범한 비전펀드 1호는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를 중심으로 소프트뱅크, 아부다비 국부펀드, 애플, 폭스콘, 퀄컴 등이 출자해 만들었다. 투자를 받은 기업은 소위 높은 가치를 지녔다는 하이테크 기업들이다. ARM을 비롯해 원웹(위성통신), 우버와 그랩(차량공유), 위워크(공유오피스), 엔비디아(그래픽처리장치), 쿠팡(전자상거래), PAYTM(모바일결제)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모 아니면 도’에 쏟아지는 회의론

당장은 이익을 보지 못하더라도 해당 분야에서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는 곳이라면 과감하게 돈을 밀어넣겠다는 게 비전펀드만의 방식이었다. 시장의 독점을 목표로 스타트업 한 곳당 최소 1억달러를 투자하는 전략을 펼쳤다. ‘모 아니면 도(Go Big or Go Home)’를 슬로건으로 내걸며 거액을 투자하자 수혜를 입은 스타트업들은 고속 성장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맹위를 떨쳤다. 그럴수록 손 회장의 ‘비전’도 찬사를 얻었다. 그리고 2019년 7월, 손 회장은 1080억달러 규모의 비전펀드 2호를 모집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외부에서 자금이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비전펀드 1호의 큰손은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였다. PIF가 투자한 돈은 450억달러로 첫 번째 펀드 규모의 절반 가까운 돈을 낸 전주(錢主)였다. 그런데 2호에는 사우디의 금고가 열리지 않고 있다. 미 IT매체인 와이어드는 “비전펀드 1호가 2019년 말 89억달러의 손실을 기록하면서 PIF가 새로운 펀드에 투자를 보류하고 있다”고 전했다. PIF 측은 비전펀드 1호의 투자 프로세스와 포트폴리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을 문제로 삼았다. 특히 손 회장의 투자 방법인 ‘먼저 쏘고 나중에 질문을 던진다’에서 문제가 비롯된 것이라고 봤다.

과정이 쉽게 납득되지 않더라도 결과가 좋다면 괜찮을 법했지만 비전펀드 1호는 결과도 신통치 않다. 2019년 6월까지만 해도 비전펀드가 공개한 성적은 괜찮았다. 당시 기준으로 위워크에 130억달러, 우버에 77억달러 등 83개 스타트업에 투자했는데 로이터에 따르면 당시 투자 수익은 202억달러를 기록했다. 2019년 6월 말에는 투자자에게 64억달러의 수익을 배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위워크 변수가 터졌다. 한때 기업가치가 470억달러로 평가받으며 스타트업의 신화로 추앙받던 위워크는 기업공개를 준비하면서 거품이 드러났다. 창업자 애덤 뉴먼의 방만경영에 매출을 웃도는 순손실 등이 드러나면서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결국 2019년 9월 위워크는 기업공개를 연기했고 470억달러의 회사 가치는 80억달러로 뚝 떨어졌다.

비전펀드의 지원을 받아 상장에 성공한 곳도 최근 성적이 좋지 않다. 8개 기업 중 기업공개 당시 주가를 웃돌고 있는 곳은 드물다. 대표적인 곳이 우버인데, 공모 당시 45달러였던 주가는 하락을 거듭하더니 현재는 35달러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38.5달러의 공모가로 시작한 슬랙의 주가 역시 지금은 25달러 근처에서 형성돼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사업을 접은 곳까지 등장했다. 온라인 생활용품 상거래 업체인 ‘브랜드리스’는 2018년 비전펀드로부터 2억4000만달러를 투자받았다. 그런데 지난 2월 10일 투자받은 지 불과 2년 만에 “현재의 비즈니스 모델은 지속불가능하다”며 폐업을 알렸다. 비전펀드 투자처 중 폐업을 선언한 곳은 여기가 처음이다.

이런 일들이 연이어 터지자 투자 물음표는 커져갔다. 위워크나 우버 등 투자 규모가 큰 곳들이 나쁜 성적을 거두면서 투자자들은 비전펀드가 투자한 기업들의 가치를 예의주시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PIF가 비전펀드 2호에 참가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소프트뱅크는 “투자가 건강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그동안 말해왔지만 투자자들이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평가액을 검증하는 방법이 불투명한 게 문제였는데 비전펀드 1호의 투자 대상 스타트업은 대부분 비상장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위워크 CEO에서 물러난 애덤 뉴먼 공동창립자. ⓒphoto 뉴시스
위워크 CEO에서 물러난 애덤 뉴먼 공동창립자. ⓒphoto 뉴시스

소프트뱅크에 조심스러워진 일본 은행들

비전펀드 1호가 벽에 부딪히자 2호의 미래도 불투명해졌다. 불과 6개월 전인 2019년 8월 실적 발표에서 손 회장은 “새롭게 출범하는 비전펀드 2호는 1호 이상의 자금이 모일 것 같다”며 자신만만했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성공적이지 못한 투자라는 게 증명되면서 신규 투자 길이 막혔다. 비전펀드 1호는 투자액의 7%를 외부 투자자에게 우선적으로 배당해야 한다. 게다가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기업공개라는 상장 절차가 필수적인데 위워크가 실패하면서 배당과 투자금 회수 방법 등이 문제가 됐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는 과거 블룸버그와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가 비전펀드에 투자한 450억달러에서 이익을 얻을 수 없다면 PIF가 비전펀드에 더 투자하지는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비전펀드 1호는 2019년 9월 기준 88개 스타트업에 707억달러를 투자했다. 로이터가 2019년 11월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이 포트폴리오의 가치는 776억달러다. PIF는 그들의 생각만큼 이익이 실현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있는 셈이다.

은행권의 태도도 변했다. 투자 그룹으로 성격이 변하고 있는 소프트뱅크그룹 입장에서는 비전펀드의 성적은 기업가치로 이어진다. 비전펀드가 부진하면 손 회장과 소프트뱅크그룹을 향한 시선도 변하기 마련이다. 일본 내 미즈호 파이낸셜 그룹, 미쓰비시 UFJ 파이낸셜 그룹, 미쓰이 스미토모 신탁그룹 등 일본 내 대형 금융기업의 소프트뱅크그룹 대출 잔액은 2019년 3월 기준 약 1조4000억엔에 달한다. 2019년 말 소프트뱅크그룹은 이들과 추가 대출을 협의하고 있었는데 블룸버그는 “한 일본 대형은행 측에서 추가 대출을 하기 전에 납득할 만한 위워크 재건 계획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다른 은행의 임원들도 추가 대출에 신중함이 필요하다며 손 회장의 투자 방법에 의문을 표했다는 게 블룸버그의 얘기다. 소프트뱅크그룹은 올해 2월 들어 자사 주식 약 30%를 담보로 해 금융기관 16곳에서 최대 5000억엔을 조달하기로 했다. 하지만 과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엿보인다. 다나카 미치아키 릿쿄대학 경영대학원 교수는 “지금까지 일본 은행들은 소프트뱅크와 거래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하지만 위워크 문제를 계기로 위험 요인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는 시각이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헤지펀드의 길 vs 벤처 투자의 길

6개월 만에 만약 13조원을 손해본다면 사람은 얼마나 침착할 수 있을까. 하지만 지난 2월 12일 손 회장은 담담한 얼굴로 연단에 올라 소프트뱅크그룹 실적 발표를 했다. 2019 회계연도 3분기(10~12월) 소프트뱅크그룹의 영업이익은 25억8800만엔(약 286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같은 기간 4380억엔과 비교하면 무려 99%나 급감했다. 그나마 이 영업이익도 소프트뱅크그룹이 주식을 보유한 중국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의 주가 상승에 따른 것이었다. 순이익도 전년 동기 대비 92%가 감소한 550억엔을 기록했다. 이익이 급격하게 줄어든 건 비전펀드 1호의 손실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지난해 2분기(2019년 7~9월, 9703억엔)에 이어 3분기(2019년 10~12월, 2251억엔)에도 적자를 기록한 게 결정적이었다. 비전펀드가 6개월 새 기록한 손실이 1조1954억엔(약 13조1700억원)에 달했다. 교도통신은 이날의 실적을 두고 “거액의 자금을 해외 첨단 기업에 투자하는 손 회장의 전략에 역풍이 불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해만 해도 더 큰 비전펀드 2호를 꿈꿨던 손 회장은 불과 6개월 뒤인 이날의 실적 발표 자리에서 “여러 반성을 포함해 펀드 규모를 축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입장을 바꿨다. 악시오스의 기사에 등장했던 스타트업들은 이런 태도 변화에 피해를 입은 셈이었다. 손 회장은 일단 적은 액수로 시작한다는 계획을 내비쳤다. 1~2년 동안 운용할 자금을 브리지로 모아 실적을 올린 뒤 2호 펀드를 정식으로 설립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반면 투자에 관한 철학의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소프트뱅크 내부에서 나오고 있는 건 주목할 지점이다. 블룸버그는 “고위 임원 중 일부는 초조해하며 투자 전략에 대해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이견도 있다”고 전했다.

이견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 움직임이 나올지도 모른다. 지난 2월 16일 파이낸셜타임스는 “비전펀드 운영 총괄 책임자인 라지브 미스라가 상장 주식에 투자하는 수십억달러 규모의 펀드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는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국부펀드인 무바달라개발공사, 카자흐스탄과 함께 40억달러 정도의 펀드 조성을 검토하고 있다. 미스라의 청사진은 상장 기업에 투자하는 건데, 이는 손 회장이 찬사받아온 스타트업 투자 철학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비전펀드 내부에서는 의견 불일치란 없다는 입장이지만 더 이상 부정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비전펀드 투자 실패 이후 사업 방향을 두고 소프트뱅크 내부의 긴장이 더욱 높아질 우려가 있다”고 진단했다. 비전펀드의 방향을 두고 손 회장의 비전이 재평가를 받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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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권 국제·IT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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