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 박승직

1864년 6월 22일(음력)

경기도 광주군 탄벌리에서 태어남

1896년 박승직상점 창업

1905년 광장주식회사 창립 발기인

1907년 국채보상운동 지원

1919년 고종 승하 시에 상민봉도단장

1925년 경성상공협회회장

1946년 박승직상점을 두산상회로 재개업

1950년 12월 20일 경기도 광주군 둔전리에서 별세

연강 박두병

1910년 10월 6일

서울 종로4가 92번지에서 태어남

1932년 경성고등상업학교 졸업

1932년 조선은행 입사

1936년 박승직상점 상무로 취임

1948년 동양맥주주식회사 사장에 취임

1951년 주식회사 두산상회 사장에 취임

1967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취임

1970년 아시아상공회의소 연합회 회장

취임

1973년 8월 4일 서울 연지동 자택에서 별세, 경기도 광주군 선영에 안장됨

매헌(梅軒) 박승직(朴承稷)은 한국 최고(最古) 기업으로 꼽히는 두산그룹의 창업주다. 그는 개항(1876년) 초기 객주와 보부상 등 밑바닥 장사꾼으로 상업에 투신하여 본격적인 상업자본을 축적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매헌의 맏아들 연강(蓮岡) 박두병(朴斗秉)은 매헌이 이룩한 자본축적과 기업이념을 이어받아 글로벌 기업으로 부상한 두산그룹의 주축을 세운 주인공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부상이셨던 조부님의 근검절약 정신을 이어받아 선친께서 실현하신 기업가의 시대정신을 우리 후손들은 철저하게 계승하려고 힘쓰고 있지요. 선친께서 시대 추세에 걸맞은 기업 발전을 위해서는 과감히 창업 업종인 포목상조차 떨쳐버리고 동양맥주로 재창업에 나서신 것처럼, 우리는 동양맥주를 넘기고 두산중공업 등 기간산업 위주의 글로벌 기업을 지향하고 있습니다.”(연강의 3남인 박용성 두산중공업 전 회장)

매헌, 연강 이후 오늘의 두산그룹은 혁신과 변모를 거듭해오고 있다. 전자소재 사업의 확대발전을 위해 코오롱전자를 인수하였으며, 2001년에는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2005년에는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2007년에는 소형건설 부문 세계 1위인 미국 기업체 밥캣을 인수하여 재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가기간산업을 이끄는 대기업으로 부상한 두산그룹은 요즘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스마트공장, 협동로봇, 드론사업 등 다양한 첨단 디지털 분야로 판도를 확장하고 있다.

현재 두산그룹을 이끄는 박정원 회장은 재계 최초의 4세대 리더로 각광받으면서 2016년 3월 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지만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가장 젊은 기업이 바로 두산”이라면서 ‘혁신’과 ‘도전’을 유난히 강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영철학과 120여년 기업사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두산은 발전용 대형 가스터빈, 수소연료전지에서 풍력발전에 이르기까지 선두기술을 갖추고 친환경에너지 분야에서 새로운 도전의 날개를 펼치고 있다.

300냥 밑천으로 시작한 면포 장사

매헌은 1864년 6월 22일(음력) 경기도 광주군 탄벌리에서 박문회와 김해 김씨 사이의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8세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나 신학문을 접하지 못한 듯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향리에서 20여리 떨어진 송파장을 왕래하며 장터 상거래를 눈여겨봤다. 남의 땅에서 소작으로 농사짓는 것은 발전이 없다고 보고 1880년대 초에는 이미 상인으로 나선다. 처음 취급한 물품은 등잔용 석유와 가죽물품이었다.

17세 때 매헌은 전남 해남 군수로 부임한 민영완을 따라 해남으로 내려간다. 약 3년간 해남에서 상업의 묘리를 터득하며, 격랑의 세월을 보내면서 상인으로서의 꿈을 키운다. 1883년 고향으로 돌아와 모은 돈 300냥을 밑천으로 제물포(인천)에서 면포를 사서 경기도 산간지방과 강원도 일대까지 가서 팔았다. 1886년 무렵 강원도 산길을 다닐 때 두 달 동안 오직 감자만 먹으며, 상도의 기본인 근검절약 정신을 골수 깊이 체득하기도 한다.

세계로 뻗어가는 중공업 기업그룹으로 뿌리를 내린 두산의 밑바탕은 매헌이 다진 바로 이 보부상 정신이다. 보부상은 전국을 발로 뛰며 조선시대 경제활동을 촉진했던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를 말한다. 그들은 윤리경영을 강조하며 시장의 상도의를 수호했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유통망을 국민 구호의 그물망으로 활용한 민간 사회복지기구 역할도 했다.

행상으로 다져진 매헌의 근검절약 정신은 밥상머리교육으로 면면히 집안에 이어 내려오고 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검소하게 식생활을 하셨던 이유는 보부상 시절 두 달 동안 감자만 씹으며 강원도 산골을 헤매던 때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옛날 산골에서는 어딜 가나 주민들이 감자로 끼니를 때웠습니다. 쌀밥을 먹어본 지가 하도 오래되어, 어느 날 아버지께서 형편이 좋아 보이는 여관에 들어가자마자 주인에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돈을 낼 테니 쌀밥을 좀 해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주인이 주방에 대고 소리쳤지요.

“서울에서 온 손님이 쌀밥을 원하시니 쌀로 지어드려라.”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상 위에 오른 것은 노란 좁쌀밥이었습니다. 워낙 쌀이 귀한 곳이라 그들은 좁쌀을 쌀이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좁쌀도 쌀이지.”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않고 좁쌀밥을 드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과 어려운 주변 사람들의 사정을 잊지 않기 위해서 평생토록 혼식을 실천하셨지요. 우리 가족은 옷도 늘 검소하게 입었습니다. 집에서는 늘 바지저고리 차림이었는데, 그것도 광목으로 된 옷이었습니다. 상점에는 비단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지만 그것으로 옷을 지어 입는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겨울이 되어도 솜을 넣어 입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박두병처럼' FKI미디어)

1896년 종로4가에 연 ‘박승직상점’

매헌은 1896년 8월 1일 서울 종로4가 15번지에 ‘박승직상점’을 연다. ‘배오개 거상’이라는 별칭을 얻은 매헌이 한인 상계의 대표적 본보기로 성장함에 따라, 정부는 1900년 12월 성진 감리서 주사라는 벼슬을 내린다. 1905년에는 육품에 승서되고, 이듬해에는 중추원 의관에 선임, 정삼품에 승서된다.

매헌은 1906년 1월부터 1911년까지 한성상업회의소(대한상공회의소의 전신) 상의원으로 재임하면서 면포업계 상인들의 권익옹호와 사업신장에 힘쓴다.

이듬해 매헌은 일본으로부터 얻은 1300만환의 차관을 갚기 위해 거족적 국민운동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동참, 70여환을 모금해 당시 이 운동을 주도했던 대구 광문사에 기부한다.

이때의 기부로 두산그룹은 2001년 ‘서상돈상’을 받는다. 국채보상운동을 벌이던 서상돈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으로, 박용성 회장이 수상했다. 당시 변형윤 심사위원장은 “IMF 금융위기에 앞서 구조조정에 솔선수범을 보였을 뿐 아니라 기업 발전, 수입 대체 및 외자 유치를 통한 외화 획득, 체육 발전 등에 공이 큰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 겸 두산중공업 회장을 본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1919년 1월 고종 황제가 승하하자 당시 경성포목상조합장이던 매헌은 이 단체를 중심으로 ‘조선상민봉도단’을 결성해 국장의 여사군(輿士軍)으로 참여한다. 이어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각 상인단체들은 경성포목조합에 모여 매헌을 단장으로 하는 봉도단을 결성한다.

면포를 주로 취급하던 박승직 상점에는 ‘박가분’이라는 이색적인 제품이 등장한다. 박가분은 1915년 4월부터 매헌의 부인 정정숙이 사업 내조의 일환으로 집안에서 수공으로 제조한 것이었다.

1915년, 박두병 가족이 아직 종로 4가에 살고 있던 어느 날 정정숙은 입정동에 살고 있던 친척 할머니 댁에 놀러갔다. 할머니는 방안에서 쭈그리고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가만 보니 벽지에다가 흰 가루를 놓고 조그만 봉지로 열심히 싸고 있었다. 신기해서 한동안 보고 있던 정정숙이 물었다.

“할머니, 그 가루가 뭐예요?”

“분가루라는 거야.”

가족이 없이 홀로 살던 친척 할머니는 분가루를 만들어 생계를 꾸렸다.

“찾는 사람이 많은가요?”

“애그, 예뻐지기 싫어하는 여인도 있나?”

“할머니, 저도 좀 가르쳐주세요.”

정씨는 노인의 말을 꼼꼼이 받아 적었다.(‘박두병처럼' FKI미디어)

처음에는 이 박가분을 면포 상품 고객에게 사은품으로 주었으나 뜻밖에 여성들의 반응이 좋아 상품으로 본격 시판했다. 박가분 제조본포는 1918년 8월 특허국으로부터 상표등록증을 교부받았으며, 1923년부터는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광고를 내기도 했다.

1926년에서 1930년까지 전성기를 누리던 박가분은 분에 포함된 납 성분의 유해성이 발견되어 생산을 중단했다.

매헌은 상점에서나 집안에서나 늘 청결하고 단정할 것을 몸소 실천했다. 근검절약을 생명으로 여기돼 베품에는 인색하지 않으며,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관용과 화목을 우선했다.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 밥 얻으러 온 사람이 대문 간에 나타나면 그는 “밖에 손님 오셨다!” 하고 안채를 향해 소리쳤다. 나중에는 아예 아침마다 행랑채에 한두 개의 밥상이 차려졌고, 겨울에는 검정물들인 광목에 솜을 두툼하게 누빈 바지저고리가 수십 벌씩 준비되었다.(‘한국자본주의의 개척자들’ 2003년 월간조선)

<strong></div>1</strong> 1934년에 2층으로 증축, 새롭게 단장한 박승직상점.<br/><strong>2</strong> 1936년 연지동에서 3대가 한자리에. 박승직 창업주가 아들 두병, 맏손자 용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br/><strong>3</strong> 박승직상점 현판<br/><strong>4</strong> 1970년 5월 13일 박두병 회장이 제3차 아시아상공회의소 연합회 총회에서 회장 당선 후 취임사를 하고 있다.
1 1934년에 2층으로 증축, 새롭게 단장한 박승직상점.
2 1936년 연지동에서 3대가 한자리에. 박승직 창업주가 아들 두병, 맏손자 용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3 박승직상점 현판
4 1970년 5월 13일 박두병 회장이 제3차 아시아상공회의소 연합회 총회에서 회장 당선 후 취임사를 하고 있다.

저포전 딸과 결혼한 연강

연강은 1910년 10월 6일 서울 종로4가 92번지에서 태어났다. 위로 딸만 여섯을 두었던 매헌으로서는 늦둥이 아들이 여간 대견하지 않았다. 뒤에 아우 셋이 태어났으나 둘은 일찍 작고했고 바로 밑의 동생 우병만이 살아남아 두산그룹 경영에 함께 참여했다.

매헌 부부는 당시 이웃 연동교회의 독실한 신자로서 일찍이 미국 선교사 게일이나 함태영 목사와 서로 집안을 내왕하는 친밀한 사이였다. 연강은 이런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자랐고, 매헌의 깊은 관심과 치밀한 배려 아래 상인의 길, 기업가의 길로 인도되었다.

거상의 아들로 태어난 연강은 6세 때 덕혜옹주가 다녔던 경성유치원에 입학한다. 이어 ‘일본 사람을 알아야 그들을 이길 수 있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4년제 한국인 보통학교가 아닌 6년제 일본인 학교 동대문심상소학교에 입학한다.

연강은 동대문심상소학교를 마친 후 경성중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차례로 졸업한다. 경성고상 졸업반이던 1931년 5월 서린동에서 저포전(紵布廛)을 경영하던 명태순(明泰淳)의 딸 계춘(桂春)과 결혼한다. 숙명고녀 시절 정구시합에 나선 모습에 반해 연강이 프러포즈했다고 하며, 그녀의 오빠 명계완은 후에 서울대 의대 학장을 지낸 명의다.

매헌은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동대문시장과 상점을 한 바퀴 돌았다. 값이 싼 새벽시장에서 채소나 과일, 생선 등을 사가지고 돌아와서는 일일이 며느리에게 요리법까지 일러주곤 했다. 생일 때면 “나는 잔치보다 여행이 더 좋다” 하고는 손님 수발로 고생할 며느리를 배려해서 온천이나 명산을 찾아 떠났다고 한다.

1932년 연강은 조선은행에 입사한다. 그가 어렵게 들어간 조선은행 본점 계산계는 결코 화려하거나 재량권이 많은 부서는 아니었다. 다른 직원들이 퇴근한 뒤에도 남아서 수천 장의 전표를 맞추고 도장을 찍었다. 오후 7시가 넘어야 퇴근할 수 있었고 연말이면 일이 몰려 밤 12시까지 야근을 하기도 했다.

바로 그 계산계에 은행 내에서 불가사의 인물로 통하는 후배 한국인 박주희(후일 금융통화위원회 위원)가 있었는데 연강과는 특히 친하게 지냈다.

그는 계산이라면 질색을 했고, 주판만 보면 머리를 아파했다. 은행원이, 그것도 계산계에 있으면서 계산을 싫어하다니…. 박두병보다 2년 늦게 입사한 박주희는 경북 대구 출신으로 4년 내내 학생운동을 했고, 이제는 독립운동에 투신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상과를 전공하고 조선은행에 지원한 것도 상하이 지점에 발령을 받아 임시정부와 접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병으로 앓아 눕는 바람에 모든 것이 틀어졌다. 결국 서울 본점에 발령을 받아 좋아하지도 않는 주판을 튕기며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러니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계산을 하면 거의 매번 실수가 생겼다.

그 덕에 괜한 고생을 하는 사람은 박두병이었다. 박두병은 언제나 자기 일을 마치고 나서 박주희가 한 일을 다시 한 번 검토했다. 계산계는 그날 전표 숫자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져야 퇴근을 할 수 있어 박주희가 한 일을 다시 한번 검토했다.(‘박두병처럼’ FKI미디어)

재계의 중추가 되는 조선은행 인맥들

연강이 조선은행에서 함께 근무한 입사동기 및 선후배는 장차 연강의 재계 활동에 주요 역할을 한 중추적 인맥이 되어 왔다. 연강의 위로는 10년 연상의 대선배 구용서(후일 한국은행 총재)가 수입계 주임이었고, 안명환(후일 상업은행장)이 계산계 주임이었다. 연강의 후배로 1934년에 장기영(후일 한국은행 부총재, 경제기획원 장관), 백두진(후일 국무총리), 김영찬(후일 상공부 장관) 등이 연강과 가까이 지낸 박주희(후일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의 동기로 입행했다.

연강은 1936년 부친의 요망에 따라 조선은행 생활의 미련을 끊고 박승직상점 일을 맡는다. 점포 청소에서 포목 가위질까지 3개월간의 밑바닥 수습기간을 마치고 상무취체역(오늘날의 이사)에 취임한다.

매헌은 아들 두병의 이름 첫 자인 말 ‘두(斗)’ 자에 묏 ‘산(山)’ 자를 붙여 ‘두산’이란 새 상호를 짓는다. ‘한 말 한 말 차근차근 쉬지 않고 쌓아올려 산같이 커져라’라는 의미다.

그러나 박승직상점의 맥을 이은 두산상회는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최악의 불황을 맞아 쇠퇴의 길을 걷다가, 광복 직후의 혼란상 속에서 영업활동을 중단한다.

광복 후 1945년 10월 연강은 미 군정청으로부터 귀속재산 업체인 ‘소화기린맥주’의 관리 지배인으로 임명된다.

연강은 당시 살인적인 인플레에 맞서 미군정 책임자와 협의하여 근로자들에게 맥주 배급제를 실시하면서 생필품과 식량 가격의 폭등에서 이들을 구제한다. 일제의 회사명을 바꿔 우리 이름인 동양맥주주식회사를 탄생시킨다.

연강에게 모든 기업자산을 물려주고 은퇴하여 은거하던 매헌은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1950년 12월 20일 86세로 별세했다.

귀속재산처리법이 공포된 후 연강은 1951년 전시하의 임시수도 부산에서 공개입찰에서 단독 응찰로 낙찰받아 동양맥주의 주인이 된다.

2016년 3월 그룹회장에 취임한 박정원 회장이 두산중공업 창원공장을 방문해 터빈을 살펴보고 있다. ⓒphoto 이오봉 사진작가
2016년 3월 그룹회장에 취임한 박정원 회장이 두산중공업 창원공장을 방문해 터빈을 살펴보고 있다. ⓒphoto 이오봉 사진작가

임시수도 부산에서 낙찰받은 동양맥주

이어 연강은 전쟁 중에 시설과 건물이 50% 이상 파괴된 영등포공장의 재건에 힘써 1953년 6월 생산작업에 돌입하여, 8월에 맥주 출하를 재개한다. 맥주의 본고장인 독일에서 전문가를 초빙하거나 사내 기술자를 독일 현지에서 연수시켜 품질 향상에 몰두한다.

휴전 후 동양맥주의 OB는 라이벌 조선맥주보다 한 달 앞서 시판하고서도 판매실적은 그 절반에 불과한 열세에 힘겨워했다. 광복 전 조선맥주의 선조인 대일본맥주는 이미 시장점유율이 70%에 달했다. 게다가 6·25전쟁 기간에 동양맥주가 입은 피해가 조선맥주보다 훨씬 심각했다.

동양맥주는 대대적인 선전활동으로 시장 점거전을 벌인다. 미스코리아, 유명 무용가 등 인기인을 모델로 한 컬러 캘린더를 제작해 배포한다. 여세를 몰아 생맥주 조끼, 재떨이, 성냥, 부채 등과 선전시설물을 내세워 총력전을 벌인다. 그런 한편 대리점주의 신의나 금전적인 신용을 앞세운 연강의 차별경영으로 OB맥주는 1957년 유엔군에 공식 납품하며, 이듬해 마침내 OB 57대 크라운 43으로 역전시킨다.

이런 기반 위에 연강은 1960년대에 동산토건, 한양식품, 윤한공업사를 잇따라 설립하고 한국병유리 인수 등으로 두산그룹의 근간이 되는 주요 회사들을 출범시킨다. 1961년에는 합동통신사를 인수함으로써 언론 사업에도 나선다.

연강은 1967년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선출된다. 매헌이 일찍이 경성포목상 조합장, 중앙번영회 회장, 경성상공협회 회장 등을 역임한 맥을 이었으며, 이후 3남 용성에 이어 5남 용만이 현재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연임되어서 활동 중이니, 명실상부한 한국의 대표 기업 명가를 이룬 셈이다. 연강은 1970년 아시아상공회의소 회장으로 피선되어 아시아 지역의 경제협력과 한국 기업의 수출 지역 확대에도 기여한다.

연강은 1973년 8월 4일 서울 연지동 자택에서 별세하여 경기도 광주군 선영에 안장된다.

연강은 명계춘과 사이에 6남1녀를 두었다. 장남 용곤(1932~2019·워싱턴대 졸)씨는 정원(58·보스턴대 MBA, 두산그룹 회장), 혜원(57·이화여대 졸, 두산매거진 부회장), 지원(55·뉴욕대 MBA, 두산중공업 회장)씨를 두었다. 장녀 용언(87·이화여대 졸)씨가 있으며, 차남 용오(뉴욕대 졸, 성지건설회장 역임)씨는 작고했다. 3남 용성(80·뉴욕대 MBA, 중앙대이사장 역임)씨는 진원(52·뉴욕대 MBA, 두산메카텍 부회장), 석원(49·뉴욕대 MBA, ㈜두산 부사장)씨를 두었으며, 4남 용현(77·서울대의대 졸, 두산연강재단 이사장)씨는 태원(51·뉴욕대 MBA, 두산건설 부회장), 형원(50·조지워싱턴대 MBA, 두산밥캣 부사장), 인원(47·하버드대 MBA, 두산중공업 부사장)씨를 두었으며, 5남 용만(65. 보스턴대 MBA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씨는 서원(41·뉴욕스쿨오브비쥬얼아트 졸, 오리콤 부사장), 재원(35·뉴욕대 졸, 두산인프라코어 상무) 씨를 두었으며, 막내 용욱(60·미 페퍼다인대 졸, 이생그룹회장)씨가 있다.

이현재 전 국무총리가 본 매헌과 연강

외유내강형 박두병 회장, 강한 사람도 부드럽게 풀었다

매헌 박승직은 개항 초기에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전국을 발로 뛰며 일생을 바쳐 상업자본을 축적하고 오늘날 글로벌 두산그룹의 기초를 이룩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분의 생애는 근검절약을 삶의 지표로 삼은 조선보부상, 나아가 조선상인의 자존심을 보여준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구한말에는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는가 하면, 고종황제나 순종황제가 승하했을 때 경성포목상 조합장이던 매헌은 조선상민봉도단을 결성해 국장의 여사군으로 참여한 애국 민족상인이기도 하다.

매헌의 맏아들로 그 뜻을 이어받아 두산그룹을 키워온 연강 박두병은 자기 원칙이 확고하면서도 부드럽고 차분하게 접근하는 외유내강형 리더였다. 강한 사람과 마주쳐서도 일을 부드럽게 풀어나가는 분이었다. 1967년 연강이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했을 때 나는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부설기관이었던 한국경제연구센터 일에 참여하여 연구보고서도 내고 얇은 팸플릿도 냈다. 소공동 사무소에 들를 때마다 그분은 공사다망하고 복잡한 문제가 많았을 텐데도 늘 반갑게 맞아주셨다. 매헌은 서울대 상과대학의 전신인 경성고상 출신으로 대선배이기도 하여 내가 참 사랑을 많이 받은 셈이다. 뵙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서면 항상 방문 앞까지 따라나오시면서 “어려워하지 말고 자주 들러”라고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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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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