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梅軒) 박승직(朴承稷)은 한국 최고(最古) 기업으로 꼽히는 두산그룹의 창업주다. 그는 개항(1876년) 초기 객주와 보부상 등 밑바닥 장사꾼으로 상업에 투신하여 본격적인 상업자본을 축적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매헌의 맏아들 연강(蓮岡) 박두병(朴斗秉)은 매헌이 이룩한 자본축적과 기업이념을 이어받아 글로벌 기업으로 부상한 두산그룹의 주축을 세운 주인공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부상이셨던 조부님의 근검절약 정신을 이어받아 선친께서 실현하신 기업가의 시대정신을 우리 후손들은 철저하게 계승하려고 힘쓰고 있지요. 선친께서 시대 추세에 걸맞은 기업 발전을 위해서는 과감히 창업 업종인 포목상조차 떨쳐버리고 동양맥주로 재창업에 나서신 것처럼, 우리는 동양맥주를 넘기고 두산중공업 등 기간산업 위주의 글로벌 기업을 지향하고 있습니다.”(연강의 3남인 박용성 두산중공업 전 회장)
매헌, 연강 이후 오늘의 두산그룹은 혁신과 변모를 거듭해오고 있다. 전자소재 사업의 확대발전을 위해 코오롱전자를 인수하였으며, 2001년에는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2005년에는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2007년에는 소형건설 부문 세계 1위인 미국 기업체 밥캣을 인수하여 재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가기간산업을 이끄는 대기업으로 부상한 두산그룹은 요즘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스마트공장, 협동로봇, 드론사업 등 다양한 첨단 디지털 분야로 판도를 확장하고 있다.
현재 두산그룹을 이끄는 박정원 회장은 재계 최초의 4세대 리더로 각광받으면서 2016년 3월 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지만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가장 젊은 기업이 바로 두산”이라면서 ‘혁신’과 ‘도전’을 유난히 강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영철학과 120여년 기업사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두산은 발전용 대형 가스터빈, 수소연료전지에서 풍력발전에 이르기까지 선두기술을 갖추고 친환경에너지 분야에서 새로운 도전의 날개를 펼치고 있다.
300냥 밑천으로 시작한 면포 장사
매헌은 1864년 6월 22일(음력) 경기도 광주군 탄벌리에서 박문회와 김해 김씨 사이의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8세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나 신학문을 접하지 못한 듯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향리에서 20여리 떨어진 송파장을 왕래하며 장터 상거래를 눈여겨봤다. 남의 땅에서 소작으로 농사짓는 것은 발전이 없다고 보고 1880년대 초에는 이미 상인으로 나선다. 처음 취급한 물품은 등잔용 석유와 가죽물품이었다.
17세 때 매헌은 전남 해남 군수로 부임한 민영완을 따라 해남으로 내려간다. 약 3년간 해남에서 상업의 묘리를 터득하며, 격랑의 세월을 보내면서 상인으로서의 꿈을 키운다. 1883년 고향으로 돌아와 모은 돈 300냥을 밑천으로 제물포(인천)에서 면포를 사서 경기도 산간지방과 강원도 일대까지 가서 팔았다. 1886년 무렵 강원도 산길을 다닐 때 두 달 동안 오직 감자만 먹으며, 상도의 기본인 근검절약 정신을 골수 깊이 체득하기도 한다.
세계로 뻗어가는 중공업 기업그룹으로 뿌리를 내린 두산의 밑바탕은 매헌이 다진 바로 이 보부상 정신이다. 보부상은 전국을 발로 뛰며 조선시대 경제활동을 촉진했던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를 말한다. 그들은 윤리경영을 강조하며 시장의 상도의를 수호했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유통망을 국민 구호의 그물망으로 활용한 민간 사회복지기구 역할도 했다.
행상으로 다져진 매헌의 근검절약 정신은 밥상머리교육으로 면면히 집안에 이어 내려오고 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검소하게 식생활을 하셨던 이유는 보부상 시절 두 달 동안 감자만 씹으며 강원도 산골을 헤매던 때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옛날 산골에서는 어딜 가나 주민들이 감자로 끼니를 때웠습니다. 쌀밥을 먹어본 지가 하도 오래되어, 어느 날 아버지께서 형편이 좋아 보이는 여관에 들어가자마자 주인에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돈을 낼 테니 쌀밥을 좀 해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주인이 주방에 대고 소리쳤지요.
“서울에서 온 손님이 쌀밥을 원하시니 쌀로 지어드려라.”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상 위에 오른 것은 노란 좁쌀밥이었습니다. 워낙 쌀이 귀한 곳이라 그들은 좁쌀을 쌀이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좁쌀도 쌀이지.”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않고 좁쌀밥을 드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과 어려운 주변 사람들의 사정을 잊지 않기 위해서 평생토록 혼식을 실천하셨지요. 우리 가족은 옷도 늘 검소하게 입었습니다. 집에서는 늘 바지저고리 차림이었는데, 그것도 광목으로 된 옷이었습니다. 상점에는 비단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지만 그것으로 옷을 지어 입는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겨울이 되어도 솜을 넣어 입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박두병처럼' FKI미디어)
1896년 종로4가에 연 ‘박승직상점’
매헌은 1896년 8월 1일 서울 종로4가 15번지에 ‘박승직상점’을 연다. ‘배오개 거상’이라는 별칭을 얻은 매헌이 한인 상계의 대표적 본보기로 성장함에 따라, 정부는 1900년 12월 성진 감리서 주사라는 벼슬을 내린다. 1905년에는 육품에 승서되고, 이듬해에는 중추원 의관에 선임, 정삼품에 승서된다.
매헌은 1906년 1월부터 1911년까지 한성상업회의소(대한상공회의소의 전신) 상의원으로 재임하면서 면포업계 상인들의 권익옹호와 사업신장에 힘쓴다.
이듬해 매헌은 일본으로부터 얻은 1300만환의 차관을 갚기 위해 거족적 국민운동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동참, 70여환을 모금해 당시 이 운동을 주도했던 대구 광문사에 기부한다.
이때의 기부로 두산그룹은 2001년 ‘서상돈상’을 받는다. 국채보상운동을 벌이던 서상돈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으로, 박용성 회장이 수상했다. 당시 변형윤 심사위원장은 “IMF 금융위기에 앞서 구조조정에 솔선수범을 보였을 뿐 아니라 기업 발전, 수입 대체 및 외자 유치를 통한 외화 획득, 체육 발전 등에 공이 큰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 겸 두산중공업 회장을 본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1919년 1월 고종 황제가 승하하자 당시 경성포목상조합장이던 매헌은 이 단체를 중심으로 ‘조선상민봉도단’을 결성해 국장의 여사군(輿士軍)으로 참여한다. 이어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각 상인단체들은 경성포목조합에 모여 매헌을 단장으로 하는 봉도단을 결성한다.
면포를 주로 취급하던 박승직 상점에는 ‘박가분’이라는 이색적인 제품이 등장한다. 박가분은 1915년 4월부터 매헌의 부인 정정숙이 사업 내조의 일환으로 집안에서 수공으로 제조한 것이었다.
1915년, 박두병 가족이 아직 종로 4가에 살고 있던 어느 날 정정숙은 입정동에 살고 있던 친척 할머니 댁에 놀러갔다. 할머니는 방안에서 쭈그리고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가만 보니 벽지에다가 흰 가루를 놓고 조그만 봉지로 열심히 싸고 있었다. 신기해서 한동안 보고 있던 정정숙이 물었다.
“할머니, 그 가루가 뭐예요?”
“분가루라는 거야.”
가족이 없이 홀로 살던 친척 할머니는 분가루를 만들어 생계를 꾸렸다.
“찾는 사람이 많은가요?”
“애그, 예뻐지기 싫어하는 여인도 있나?”
“할머니, 저도 좀 가르쳐주세요.”
정씨는 노인의 말을 꼼꼼이 받아 적었다.(‘박두병처럼' FKI미디어)
처음에는 이 박가분을 면포 상품 고객에게 사은품으로 주었으나 뜻밖에 여성들의 반응이 좋아 상품으로 본격 시판했다. 박가분 제조본포는 1918년 8월 특허국으로부터 상표등록증을 교부받았으며, 1923년부터는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광고를 내기도 했다.
1926년에서 1930년까지 전성기를 누리던 박가분은 분에 포함된 납 성분의 유해성이 발견되어 생산을 중단했다.
매헌은 상점에서나 집안에서나 늘 청결하고 단정할 것을 몸소 실천했다. 근검절약을 생명으로 여기돼 베품에는 인색하지 않으며,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관용과 화목을 우선했다.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 밥 얻으러 온 사람이 대문 간에 나타나면 그는 “밖에 손님 오셨다!” 하고 안채를 향해 소리쳤다. 나중에는 아예 아침마다 행랑채에 한두 개의 밥상이 차려졌고, 겨울에는 검정물들인 광목에 솜을 두툼하게 누빈 바지저고리가 수십 벌씩 준비되었다.(‘한국자본주의의 개척자들’ 2003년 월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