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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명가]  인촌과 수당 형제가 이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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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제
[2626호] 2020.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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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인촌과 수당 형제가 이룬 것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인촌 김성수
1891년 10월 11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에서 태어남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졸업
   1915년 중앙학교 인수
   1919년 경성방직회사 창립
   1920년 동아일보 창간
   1932년 보성전문학교 인수
   1946년 한국민주당 영도
   1951년 제2대 부통령에 피선
   1955년 2월 18일 별세. 국민장으로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경내에 안장
   

   

   수당 김연수
1896년 10월 1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에서 태어남

   
   1921년 일본 교토제대 경제학부 졸업
   1924년 삼수사(현 삼양그룹) 창업
   1935년 경성방직 사장에 취임
   1939년 한국 최초의 육영재단 양영회 설립, 봉천에 남만방적 창사
   1949년 반민특위에 구속, 무죄판결 받음
   1955년 삼양사 울산 제당공장 준공
   1961년 한국경제인협의회(현 전경련) 초대 회장 취임
   1979년 12월 4일 서울 방학동 자택에서 별세, 경기 여주 선영에 안장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와 수당(秀堂) 김연수(金秊洙) 형제는 일제 식민통치 강점기에 민족언론, 민족교육, 민족기업을 일궈온 구국선각자이다. 선친으로부터 유복한 재산을 물려받아 오늘의 동아일보와 중앙중·고교, 고려대학교, 경성방직과 삼양사 등에 그들의 입지를 아로새겼다. 스스로 자본의 선용(善用)을 실증한 주역들이다.
   
   인촌이 3·1독립만세운동 이듬해에 ‘민족의 대변지’로 창간한 동아일보는 일제하와 광복 후의 난세를 헤쳐가면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지켜온 교두보로서의 구실을 해왔다. 중앙중·고교와 고려대 역시 개교 100주년을 훌쩍 넘긴 대표적 민족사학으로 뿌리를 내려 숱한 인재를 배출해오고 있다.
   
   수당이 창사한 삼양그룹은 정도, 신뢰경영을 실천하며 꾸준히 발전해 ‘생활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하는 기업’이라는 비전을 펼치고 있다. 화학 및 식품 소재, 패키징, 의약·바이오 사업을 중심으로 글로벌 진출, 고부가가치의 스페셜티 제품 개발 등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고도화하는 전략을 짜고 있다.
   
   “이제는 변화 속도가 빨라져 미래 예측보다는 변화를 파악하고 대응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합니다. 사업 구조 고도화를 통해 성장하고, 기업 생존의 필수조건인 디지털 혁신을 추진해 글로벌 스페셜티 전략에 맞는 역량과 전문성을 키워나갈 것입니다.”(수당의 손자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
   
   인촌은 1891년 10월 11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현 봉암리)에서 울산 김씨 지산(芝山) 김경중(金暻中)과 부인 장흥 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며,수당은 1896년 10월 1일 차남으로 태어났다. 인촌은 3살 때 용담, 평택, 동복 등지의 군수를 지낸 백부 원파(圓坡) 김기중(金祺中)의 양자로 출계했다.
   
   
   200석을 1만5000석으로 ‘호남의 갑부’
   
   이들 형제의 13대 선조가 뛰어난 유학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이다. 지산은 진산 군수를 역임했는데 이재에 뛰어난 자질이 있었다. 물려받은 땅 200석지기를 1만5000석으로 불렸다. 이런 지산은 ‘호남의 갑부’라는 소리를 듣는 재산가로서보다는 오히려 학문을 즐기는 선비로서의 면모가 뚜렷했다.
   
   “증조부님께서는 서문에도 능했지만 우리 역사에도 조예가 깊으셨다고 합니다. 을사늑약 이후 망국의 기운을 실감하셔서 1907년 ‘조선사’ 편수작업에 착수하셨지요. 나라가 망할 지경이 되자 이 땅의 청소년이 우리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영영 민족혼을 잃게 될 것을 걱정하셨다고 합니다. 근 20년간 정성을 쏟아 17권 1질로 된 전집을 완간하고 각급 학교와 서원, 전국의 유지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셨지요.”(김윤 회장)
   
   지산은 1908년 원파와 함께 영신학교(현 줄포초등학교)를 세우며, 기호중학교를 인수하여 인촌이 관장토록 하였는데, 이 학교는 후일 중앙중학교로 맥을 잇는다.
   
   “아버지의 생가가 그대로 남아 있어 현재 연고자가 관리하고 있는데 앞으로 대대적으로 보수할 예정입니다. 물 없는 골짜기를 지나 낮은 언덕바지에 위치해 있고 뒤로는 나지막한 동산이 둘러 있어 시원히 내려다보이면서 안온한 느낌을 줍니다.”
   
   인촌의 장남 상만씨가 1972년 동아일보 사장직을 맡고 있던 당시 필자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크지 않은 키에 겸허한 미소가 흐르는 그의 얼굴에서 인촌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인촌의 모습은 ‘수당 김연수’ 전기에 간간이 비친다.
   
   ‘인촌은 친구도 많았고 장난도 잘 하여 어머니의 걱정이 그칠 날이 없었다. 사실 인촌은 양반의 풍습에 얽매이기보다는 동리 개구쟁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더 좋았던 것이다. 한번은 밤이 깊도록 인촌이 집에 돌아오지 않아 집안이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다. 이런 일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때 인촌은 동리 아이들과 낮에 보아두었던 참새 둥우리를 털고 있었던 것이다. 참새 둥우리는 초가 처마 밑에 치기가 일쑤이다. 그날 낮에 동리 아이들과 놀다가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밤에 손을 넣어 참새를 잡는 재미에 밤이 깊어가는 것도 잊고 말았다.’
   
   
1 삼양사의 만주 봉천사무소 전경. 봉천사무소는 삼양사의 만주 개척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해 1937년 3월에는 ‘만주삼양사’로 확대·개편됐다.
2 삼양사 전주 폴리에스테르 공장 준공식(1969)에서 수당 김연수 회장(가운데)이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삼양사는 1969년 폴리에스테르 사업에 진출해 국가 산업화에 기여했다.
3 제당 사업 초창기(1950년대)의 삼양설탕 포장.

   전남 창평 영학숙에서 신학문을 접하다
   
   인촌이 신학문을 접한 것은 1906년 전남 창평의 영학숙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이 학교의 설립자는 인촌의 장인이 되는 고정주(고재욱 전 동아일보 회장의 조부). 인촌은 이곳에서 백년지기 고하 송진우를 만나며 뒤이어 그와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인촌은 1910년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여 최남선, 장덕수, 현상윤, 조만식, 신익희, 김준연, 조소앙 등과 교유하며 1914년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한다.
   
   
   유학생들과 만든 야구단
   
   한편 수당은 1910년 박하진과 혼례 후 이듬해 도쿄 아자브중학에 입학한다. 이때 만난 춘원 이광수의 오산학교 제자 서춘의 학비를 보태기 위해 싼 곳으로 하숙을 옮긴다. 서춘은 훗날 조선 유학생이 발표한 2·8독립선언의 대표 11명 중 한 사람으로 귀국해서는 언론 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한다.
   
   수당은 이즈음 오사카 철도변에 즐비한 공장들을 보면서 근대산업의 막강한 힘을 느끼고, 산업을 일으켜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 민족자존의 길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시절 수당이 좋아한 운동은 정구와 야구였다. 유학생 친구들과 ‘반도중학회’를 만들고 이 모임에서 야구단을 만들어 야구시합을 즐겼다. 1917년 7월 여름방학 때 서울과 개성에서 모국방문 야구단이 시합을 벌였는데 수당은 2루수를 맡는다. 수당의 야구 실력은 출중하여 친선경기를 마치고 나서는 인촌이 교장으로 있던 중앙중학의 야구부를 지도한다. 그의 열성 어린 지도로 중앙중학 야구부는 종로중앙청년회가 주최한 대회에서 결승에 진출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한다.
   
   
   ‘산업전쟁’ 선포
   
   1914년에 귀국한 인촌은 이듬해 중앙중학을 인수하며, 1917년 경성직뉴회사를 사들여 경영하다가 1919년 경성방직회사를 창립한다.
   
   경성방직은 개화파인 박영효가 초대 사장을 맡고, 발행주식 2만주의 주주가 모두 조선인들이었다. 창립총회도 3·1독립선언식이 있었던 서울 태화관에서 열 정도로 민족의식으로 다져진 기업이었다. 당시 근대적 시설을 갖춘 방직회사로서는 조선방직이 있었으나 조선인의 것으로는 경성방직이 처음이었다. 당시 조선인의 옷이 한복에서 양복으로 바뀌어가는 추세였는데 광목 수요는 일본산과 화상(華商)이 들여오던 미국산이 독점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실정에 맞서 ‘산업전쟁’을 선포한 셈이다.
   
   
▲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가운데)이 삼양이노베이션R&D페어에서 한 해의 연구성과를 둘러보며 현장에서 토론하고 있다. 삼양이노베이션R&D페어는 삼양그룹 연구원들이 한 해 동안 축적한 R&D 성과를 전시, 공유하는 행사다. 삼양그룹은 2012년부터 매년 이 행사를 개최해 연구 의욕을 고취시키고 지식 공유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photo 이오봉

   삼수사와 장성농장
   
   한편 교토의 제3고교에 입학하여 수재 소리를 들었던 수당은 신경쇠약으로 자퇴하는 불운을 겪는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교토제대 경제학부에 진학했고 1921년 졸업 후 귀국한다.
   
   이듬해 경성직뉴 전무와 경성방직 상무에 취임하여 숙직실에 기거하면서 경방의 첫 제품인 광목 생산을 개시한다.
   
   수당은 1923년 전남 장성군 남면 일대의 농토를 농장화한다. 소작농들을 협동농업 형태로 결합해 근대영농법을 도입한다. 부락마다 농민대표를 두고 ‘검소와 근면으로 자력갱생을 꾀하면 부를 얻을 수 있다’는 신념을 심으며 모범농촌 만들기 운동을 벌인다. 이미 수십 년 전에 ‘새마을운동’을 선도한 셈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 이듬해 삼수사(三水社)를 설립하고 장성농장을 개설한다.
   
   일제의 농업자본 침투에 맞서는 민족농업자본 형성을 위해 장성농장에 이어 줄포, 고창, 명고, 신태인, 법성, 영광 등지의 농장을 차례로 개설하여 기업형 농장의 표본을 제시한다. 뒤이어 수당은 간척사업을 벌인다. 1930년대 나용균과 만난 후 “힘들긴 해도 좁은 국토를 넓히는 일은 보람된 사업”이라는 데 의기투합한다. 나용균은 전북 정읍 출신으로 와세다대 유학 중 독립운동에 참가했고,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도 활약한 애국지사로 광복 후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수당은 함평군 손불면 앞바다를 간척한 데 이어 모두 1070정보의 농토를 만든다.
   
   1931년 삼수사는 이름을 삼양사(三養社)로 바꾼다. 수당은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소동파의 ‘안분자족’ 철학에 착안해 ‘삼양훈(三養訓)’을 제정한다. ‘사람이 분수를 지키면 복과 건강, 재산을 얻을 수 있다(安分以養福, 寬胃以養氣, 省費以養財)’는 이 평범한 진리는 곧 수당정신으로 집약되어 삼양그룹의 정신적 지표로 정착된다.
   
   인촌은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면서 오랜 염원인 전문학교를 가지게 되며, 이 학교를 오늘의 고려대학교로 발전시킨다. 수당도 1929년 중앙학원 설립에 참여하여 명고농장을 기부한 데 이어 인촌의 보성전문 인수에도 참여하여 신태인농장을 기부한다. 항일 보도로 재정난을 겪는 동아일보도 적극 지원한다.
   
   일제 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일석 이희승은 “수당은 돈 쓰는 데도 일가견을 가진 사람으로 만금을 쓰면서도 한 푼을 아꼈다”고 그의 용전철학을 전하기도 했다.
   
   1933년 보성전문의 본관 석조건물을 짓던 무렵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과 인촌이 맺은 일화가 전해진다. 정 회장이 18살 때 강원도 통천 고향에서 가출해 이곳 공사판에서 두어 달 일하던 시기였다. 그를 눈여겨보던 인촌은 점심을 따로 먹여주고 격려해 주었다.
   
   “그때 청년 정주영은 마음속으로 ‘훗날 언젠가 돈을 벌면 나도 학교를 세워서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한 이들을 공부할 수 있게 해주어야지’ 하고 결심했다고 한다.”(‘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김상홍)
   
   
   한국 최초 해외 생산법인 남만방적 설립
   
   젊은 시절부터 대륙 진출을 꿈꿔오던 수당은 1939년 봉천에 남만방적을 설립하면서 만주 진출의 절정을 맞게 된다. 33만㎡(10만평)의 방대한 부지 위에 세운 한국 기업 최초의 해외 생산법인으로, 오늘날 글로벌 기업들의 선두주자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호사다마랄까. 1939년 만주에서 돌아온 수당에게 조선총독부는 만주국 경성 주재 명예총영사직을 떠맡긴다. 이어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로 임명한다. 이것이 후일 정부 수립 후 친일 부역 혐의의 단초로 작용한다.
   
   한편 1951년 제2대 부통령에 선출된 인촌은 이듬해 5월 29일 격렬한 내용의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하면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독재의 포문을 연다. 그 후 병세가 악화되어 1955년 2월 18일 별세, 국민장으로 생전에 그가 아껴 다듬던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경내에 안장된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반민특위가 수당을 구속한다. 수당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지만 법정은 무죄판결을 내린다.
   
   수당은 6·25전쟁으로 빈사상태에 놓인 삼양사를 재건하기 위해 식품과 섬유로 눈을 돌린다. 울산 바닷가에 야산을 헐어 메운 땅에 제당공장과 인공한천공장을 건설하여 외화획득과 외화절약이란 국민적 과제를 함께 해결한다. 오늘날 이 일대가 한국을 대표하는 대규모 중화학공업 단지로 성장한 것을 보면 그의 탁월한 선견지명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1961년 수당은 한국경제협의회(전경련 전신) 회장에 취임, 경제계의 리더로 부상한다.
   
   과묵함 속에서 나오는 그의 유머 감각도 멋졌다. 한 영업직원이 낮술을 하고 들어와 사장실 앞에서 “거기 코보 있나?” 하고 별명을 부르자 “누군가? 코보 여기 있네” 하며 화답할 정도로 유머도 즐겼다. 수당은 1979년 12월 4일 서울 방학동 자택에서 별세, 여주 선영에 안장된다.
   
   수당은 1939년 한국 최초의 민간 육영재단인 양영회를 설립하여 학비조달이 어려운 수많은 학생과 자금이 부족한 연구재단을 지원했다. 34만원을 출자해 설립한 양영회는 1948년까지 활발하게 사업을 펼쳤으나 6·25전쟁으로 재원이 없어져 1950년부터 사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수당은 1962년 양영회의 기본자산을 6억원으로 늘려 장학사업을 재개하고 사업범위도 교육기관에 대한 보조와 부대사업까지 확대한다. 또 장학금 지급대상을 자연과학 분야에 더해 인문계까지 넓힌다. 수당은 독립운동가 자제나 항일운동 학생도 지원한다. 저명한 사학자 전해종 교수가 일본 제3고교 재학 시절, 그의 조부와 부친이 만주 용정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된 사실을 알게 된 수당은 졸업 때까지 2년 남짓 학비를 지원했다. 항일 의학도 조규찬도 수당의 학비지원을 받아 후일 전남대 의대 초대학장과 대한약리학회 회장까지 지냈다. 일제하 미국 유학 시절 학비와 생활비를 받은 이태규는 노벨 물리학상 후보에까지 올랐는가 하면, 역시 학비지원을 받은 이승기는 비날론을 발명한 후 북한에 가서 과학계를 이끈 화학자가 되었고, 박철재는 초대 원자력원장을 지낸 원자력 개발 권위자로 입신했다.
   
   양영회는 현재 양영재단으로 맥을 이어 각종 장학금과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또 1968년에는 수당 자신의 주식을 비롯해 김상홍·김상하·김상응 세 아들의 주식 8만주를 기금으로 출연해 수당장학회(현 수당재단)를 만들어 장학사업과 함께 매년 우수학자를 선정하여 수당상을 주고 있다.


   

   인촌 가계도
   
   인촌은 고광석·이아주(후취)와 결혼하여 13남매를 두었다. 장남 상만(작고·와세다대 졸업)은 동아일보 회장을 지냈으며, 병관(작고·고려대 졸업·동아일보 회장 역임)과 병건(77·미 산타클라라대 졸업·동아꿈나무재단 이사장) 형제를 두었다. 병관의 장남 재호(56·보스턴대 졸업)는 동아일보-채널A 회장으로 이한동 전 국무총리 사위다. 차남 재열(52·스탠퍼드대 MBA)은 삼성경제연구소 스포츠부문 사장으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사위다. 인촌의 차남 상기(작고·와세다대 졸업)는 동아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아들 병국(61·하버드대 박사·고려대 교수)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지냈다. 인촌의 3남 상선(작고·니혼대 졸업)은 고려중앙학원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4남 상흠(작고·연희전문 졸업)은 5~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5남 상오(작고·보성전문 졸업)의 아들 병철(71·괴팅겐대 박사)은 고려대 총장을 지냈다. 인촌의 6남 상종(작고·고려대 졸업)은 우진토건 사장, 7남 남(작고·단국대 졸업)은 국회의원을 지냈다. 8남 상석(작고·오슬로대 졸업)은 동아일보 제네바특파원을 지냈으며, 아들 병기(58·러시아과학아카데미 박사)는 고려대 교수, 9남 상겸(작고·고려대 졸업)은 고려대 교수를 지냈다.
   

   

   수당 가계도
   
   수당은 박하진과 결혼하여 7남6녀를 두었다. 장남 상준(작고·보성전문 상학과 졸업·삼양염업 회장 역임)은 구연성(작고·이화여전 음악과 졸업)과 사이에 2남3녀를 두었다. 장남 병휘(75·한양대 수학과 교수)는 전용숙과 결혼했고, 밑으로 범(작고)이 있었다. 장녀 정원은 김선휘(83·삼양염업사 회장)와 결혼했으며, 차녀 정희(73)는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77·김진만 전 국회부의장 아들)과 결혼했고, 3녀 정림은 윤대근 동부CNI 회장(74·윤천주 전 문교부 장관 아들)과 결혼했다. 수당의 차남 상협(작고·도쿄대 정치학부 졸업)은 국무총리, 문교부 장관을 지냈으며 김인숙(작고·니혼여대 졸업, 한국여학사협회 고문 역임)과 사이에 1남3녀를 두었다. 아들 한(67·전 JB금융지주 회장)은 김영란과 결혼하였으며, 장녀 명신은 고하 송진우의 손자 송상현(80·미 코넬대 박사) 전 국제형사재판소장과 결혼하였다. 차녀 영신은 정성진과 결혼하였으며, 3녀 양순은 이양팔과 결혼하였다. 수당의 3남 상홍(작고·보성전문·와세다대 졸업)은 삼양그룹 명예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차부영(작고·이화여전 졸업)과 사이에 2남2녀를 두었다. 장남 윤(68·고려대 졸업)은 삼양홀딩스 회장을 맡고 있으며, 김종규 전 서울신문 사장의 딸 김유희(61)와 결혼했고, 차남 량(66·삼양사 부회장)은 장지량 전 공군참모 총장의 딸인 장영은과 결혼했다. 장녀 유주(71)는 윤영섭(74·고려대 명예교수)과 결혼하였으며, 밑으로 차녀 영주(63)가 있다. 수당의 4남 상돈(작고·서울대 농대 졸업·삼양염업사 회장 역임)은 김용옥과 사이에 2남1녀를 두었다. 장남 병진은 한혜승(한홍기 전 축구협회 부회장 딸)과 결혼하였으며, 차남 영로는 정은미와 결혼했다. 딸 희진은 오광희(오명석 전 대한항공 이사 아들)와 결혼했다. 수당의 5남 상하(95·서울대 정치학과 졸업·삼양그룹 그룹회장)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12년간 역임한 재계 원로로 박상례(90·이화여대 사회생활과 졸업)와 사이에 2남1녀를 두었다. 장남 원(63·삼양사 부회장)은 배주연과 결혼하였으며, 차남 정(61·삼양패키징 부회장)은 최윤아와 결혼했다. 딸 영난은 송하철(54·송삼석 모나미 회장 아들)과 결혼했다. 수당의 6남 상철(작고·고려대 상학과 졸업)은 우정명(78·이화여대 졸업)과 사이에 장남 의선과 차남 형석(장옥정과 결혼)을 두었다. 수당의 7남 상응(작고·미 유타대 경제학과 졸업·삼양사 회장 역임)은 권명자(68·이화여대 음대 졸업)와 사이에 훈·동현·승현 3형제와 유림·유정 자매를 두었다.
   
   수당의 장녀 상경(작고·미 템플대 경영학과 졸업)은 조서봉·서만 형제를 두었으며, 차녀 상민(93·서울대 사범대학 가정과 졸업)은 이두종(작고·양영재단 이사장 역임)과 사이에 이규정·규화 형제와 딸 이정현을 두었다. 수당의 3녀 정애(90·이화여대 졸업)는 조석(작고·삼양제넥스 부회장 역임)과 사이에 조근·조원 형제와 딸 조경미(주춘희와 결혼)를 두었으며, 4녀 정유(작고·이화여대 음대 졸업)는 김영국(작고·서울대 부총장 역임)과 사이에 김주완(손현숙과 결혼)·창완 형제와 딸 김원경(한정수와 결혼)을 두었고, 5녀 영숙(87·미 두브크대 졸업)은 스테푸친과 사이에 페기·프랭크 형제를 두었으며, 6녀 희경(81·미 유타대 언어학석사)은 김성완(작고·미 유타대 화학박사)과 사이에 김석원·소연 남매를 두었다.
   

   

   홍일식 고려대 전 총장이 본 인촌·수당 형제
   
   인촌 선생과 수당 선생 형제의 각별한 우애는 세간에 잘 알려져 있다. 내가 어릴 때 선친께서는 “수당이 형님 인촌께 ‘나는 돈을 벌어 댈 테니 형님은 나라와 겨레를 위해 쓰십시오. 누가 못 당하나 해봅시다’라고 말했단다”라며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내가 알기에도 인촌은 이 나라의 교육과 언론, 정치, 문화, 사회 전반의 발전을 위해 거금을 썼지만 직접 돈을 번 적은 거의 없었으니 이것이 전설만은 아닌 듯하다.
   
   인촌과 수당 형제는 당시로는 드물게 외국에 유학해 대학까지 나왔다. 막대한 재산까지 있어 세속적 안락을 누릴 수 있었지만 험난한 구국의 길을 스스로 택했다. 또한 엄청난 사재를 쾌척하여 근대산업과 교육·언론·문화적 역량을 배양해 나라와 겨레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오늘의 경성방직, 삼양그룹, 동아일보, 중앙중·고등학교, 고려대학교 등이 모두 인촌과 수당이 그처럼 염원하던 근대국가 건설의 초석이었음은 이미 역사가 입증한다.
   
   우리는 정작 인촌이 떠난 뒤에야 큰 뜻을 깨닫고 우러르게 되었다. 더구나 요즘처럼 소위 지도자란 사람들의 국가철학과 역사의식의 빈곤을 볼 때마다 인촌의 심모원대한 도량이 그리워진다.
   
   수당은 평생을 도덕적 정당성과 논리적 합리성을 균형 있게 추구해온 사람이다. 암울하던 식민지 시대에도 기업의 윤리경영을 강조하고 부의 사회환원을 앞장서서 실천했다. 돈독했던 형제 우애는 후세에까지 드리워져 삼양그룹 경영진의 모범적인 경영과 돈독한 우애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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