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구인회

1907년 8월 27일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태어남

1921년 지수보통학교 2학년 편입학

1924년 중앙고보 입학

1929년 지수협동조합 이사장

1931년 구인회상점 개점

1942년 충칭 임시정부에 독립자금 지원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 창립

1958년 금성사 창립

1964년 한국경제인협회 부회장

1969년 12월 31일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별세,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하갈리에 안장

상남 구자경

1925년 4월 24일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태어남

1945년 진주사범학교 강습과 졸업

1950년 LG화학 이사

1970년 LG 회장

1979년 한국발명특허협회 회장

198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1995년 LG 명예회장

2019년 12월 14일 숙환으로 별세

연암(蓮庵) 구인회(具仁會)와 상남(上南) 구자경(具滋暻)은 LG그룹 창업주와 부자(父子) 경영인으로 산업국가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꼽힌다. 연암이란 아호는 LG그룹의 기초를 닦은 곳인 부산의 연지동(蓮池洞)에서 유래했다. 이곳 바로 아래에 있던 암자와 암자 아래 연못에서 따온 이름이다. 상남이란 아호는 구자경이 태어난 생가 앞 작은 다리인 상남교에서 따온 것이다. 연암은 일제 말 삼엄했던 감시망 속에서도 기업의 파멸 위험을 무릅쓰고 충칭 임시정부에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보내기도 했다.

아울러 연암과 상남은 한국 재계에서 바람직하게 받아들이는 ‘인화(人和) 경영’의 표본을 제시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창업 동인이었던 허씨가(현 GS그룹)와의 동업 관계를 슬기롭게 정리했는가 하면, 구씨가(家) 자체 내의 승계 과정도 장자 상속 위주로 줄기를 이어가 한국 재계에 안정된 표본을 제시한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1995년에 취임한 3대 구본무 회장에 이어 2018년에 취임한 구광모 회장이 4대째로 현재 그 뒤를 이어가고 있다.

구광모 회장이 이끄는 지주회사 ㈜LG는 전자·화학·통신 등 LG의 사업영역에서 자회사들과 함께 주력사업의 근본적 경쟁력을 강화하고 신사업을 발굴·육성해 미래 기업 가치를 높이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그는 취임 후 “지금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의 기본정신을 다시 깨우고 더욱 발전시킬 때라고 생각한다”면서 LG의 고객 가치는 곧 고객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이한 ‘1.5세의 창업경영인’

연암과 상남은 1947년 공산품 생산이 빈약했던 산업 불모지에 제조업을 향한 의지와 정열로 한국의 화학산업(락희화학)을 개척하고, 전자산업(금성사)을 일으킨 선구적인 기업인이다. 연암의 아들인 상남은 초기 경영 과정에서부터 함께 참여하여 ‘1.5세의 창업경영인’이라는 우리 재계사에 특이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연암에서 상남으로 이어지는 LG그룹의 반세기는 노동력에서 기술력으로, 수입에서 수출로, 한국이라는 좁은 울안에서 세계경영으로 도약하는 대혁신의 과정이기도 했다.

경남 진주 도심에서 1931년 연암이 문을 연 구인회상점 자리에는 현재 별다른 표지가 남아 있지 않다. 진주의 명동거리 패션가로 변모해 있는 상태다.

“진주시 대안3동 일대가 바로 구인회상점 자리였습니다. 처마 밑의 저 흰 벽돌은 아직 옛날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지요.”

구인회상점이 있던 곳을 안내하던 구본화(63·연암생가 관리인)씨의 말을 듣고 이곳에 입점해 있는 비키패션 점주 김수정(44)씨도 “그렇게 유서 깊은 곳인 줄 전혀 몰랐다”면서 “앞으로 더욱 자부심을 가지고 장사를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연암은 1907년 8월 27일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유생 구재서(具再書)와 진양 하(河)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승내리에 일찍이 터를 잡아 재산을 이룬 허씨네는 하촌에 살고, 뒤에 이곳에 온 구씨네는 상촌에 살았다.

당시 마을에는 학문을 숭상하는 집안의 가풍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여럿 있었다. 선비들이 교유하던 학문도장으로 허만회 공이 주축이 되어 세운 창강정(滄江亭)과 후손들이 공부하던 양정재(養正齋)가 한 울안에 있었다.

1전 동전을 나눈 이재에 밝은 아이

어린 시절부터 연암은 이재에 밝은 영특한 아이로 생가 동네에서 기억되고 있다. 연암 전기에 그 기록이 담겨 있다.

‘화창한 봄날, 마을 한복판 빈터에 모인 아이들이 떠들썩하게 놀고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한구석에서 두 소년이 1전짜리 동전 한 닢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댕기에 홀쭉한 중의적삼을 입은 키 큰 소년은 동전을 쥔 손을 흔들며 펴려고 하지 않는다.

“먼저 잡은 사람이 임자지. 이거 놔라. 빨리!”

그러나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무슨 소리야. 너나 나나 똑같은 임자 아니가!”

“1전을 어떻게 나눠 갖는단 말이가!”

“어쨌든 나누어 가져야지, 그냥은 못 준다.”

깐깐한 소년은 동전을 쥐고 있는 키 큰 소년을 달래면서 마을 어귀 개천가에 있는 잡화점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동전 한 닢으로 성냥 두 갑을 사서 서로 한 갑씩 나눠 가짐으로써 이 ‘작은 전쟁’은 평화적으로 끝난다.’

떡잎 시절부터 보여준 이 깐깐한 소년의 합리적인 이재 기질에 훗날 허씨네 사돈이 거액을 맡겨 동업자로 대성하고, 자손대에 모범적인 분재(分財)의 슬기로까지 이어진 ‘이재의 원형’으로 꽃피운 셈이다.

연암은 홍문관 시독관으로 있던 할아버지 만희 구연호(具然鎬) 공 밑에서 한학을 배운다. 그는 천자문을 잘 외웠을 뿐 아니라 장난질도 곧잘 했다. 군수가 가마를 타고 행차한 후에는, 마을 아이들을 불러 모아 지게를 들게 하고 자신이 그 위에 올라 군수 행차를 흉내 내곤 했다. 또 타관에서 온 서당 접장이 까다롭게 굴어 성이 차지 않으면 아이들과 짜고 포구총을 만들어 골려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난질에만 넋을 빼앗기지 않고 어른을 모시는 효심이나 동생들을 사랑하는 우애 또한 지극했다. 언젠가 작은누나가 화롯불을 엎질러 장판이 누렇게 탔다. 꾸중을 들을까봐 걱정이 태산 같던 누이에게 얼른 나서서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라. 할아버지 오시면 내가 했다고 말할게.”

연암은 1920년 같은 마을 허만식(許萬寔)의 딸 을수(乙壽)와 결혼한다. 그의 가계는 능성(綾城) 구씨. 유가의 엄격한 가풍 속에 4대 대가족의 장남으로 자란 덕분에 형제간의 우애와 화목, 근면, 성실을 뼛속까지 익혔다. 이러한 가풍이 인화를 중시하는 기업활동으로까지 이어진 셈이다.

이병철도 수학한 지수보통학교 편입

연암은 결혼 이듬해인 1921년 손위 처남이며 뒤에 중외일보 경영자가 된 허선구의 권유로 지수보통학교에 편입한다. 이 학교는 연암과 5형제(철회·정회·태회·평회·두회), 장남인 상남과 그 형제들까지 동문으로 배출했으며, 호암 이병철도 이곳에서 6개월간 수학한 명문이다. 지금도 학교 교정에는 ‘구인회 선생 불망탑’과 80년 수령의 반송(盤松) 두 기념물이 남아 있다. 연암 등 1회 졸업생이 심었다는 반송은 연륜만큼 큰 그늘을 드리우는 거목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오늘의 지수초등학교는 동네 젊은이들이 이웃 아파트촌으로 다수 옮겨가 거의 폐교 상태다. 현재는 진주시가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과 함께 이곳에 기업가정신교육센터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진주는 오래전부터 한국 경제를 일으킨 재계 인물들의 산실이었다. 창업 1세대 연암과 2세대인 상남과 허준구 회장, 3세대인 구본무와 허창수 양가 총수 모두 진주 태생이다. 강영중 대교그룹 회장도 진주 출신이다. 풍수지리학자 최창조씨(전 서울대 교수)는 “진주를 지나는 남강은 재와 부를 상징하는데 이 지역에서 성공한 창업자가 나오자 그들을 좇아 기업인이 된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연암의 셋째 동생 태회씨는 6선 국회의원으로 남강댐을 쌓는 데 기여하여 이 지역에 지리산 자락에서 흘러내리는 청정 상수도원을 마련하는가 하면 관광단지로 개발하기도 했다.

지수보통학교 시절 연암은 일본인 교장의 조선 학생 차별에 항의하여 동맹휴학을 주도하며 동네 젊은이들을 일깨우는 장근회(槳勤會) 활동에 앞장섰다.

‘새벽에 나팔수는 동산에 올라가 아직도 단잠에 빠져 있는 마을을 향해 나팔을 불어댄다. 이불 속에서 꿈을 꾸고 있던 청소년들은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옷을 걸쳐 입으며 뛰어나와 아침 체조를 한다.… 놀고 있는 황무지를 갈아엎어 채소를 심고, 그것을 가꾸기 위해 인분을 푸는 일도 땀 흘리며 해냈다.”(‘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연암 전기)

1924년 중앙고보에 입학하여 신학문과 신문물을 접한 연암은 실업가로서의 꿈을 다지기 위해 1926년 귀향하여 지수협동조합 전무를 거쳐 1929년 이사장이 된다. 이 무렵 광목, 비단 등 각종 일용잡화를 매매하면서 상거래에 눈떴고, 1927년 동아일보 지수지국장이 된다.

포목상 첫 사업서 500원 손해

연암은 1931년 진주에서 동생 철회와 함께 구인회상점을 설립하여 포목상으로 첫 사업을 시작한다. 조부와 부친을 설득하여 2000원의 밑천을 얻어냈고, 큰집 양자로 들어간 철회에게도 1800원을 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사업 첫해 연암은 당시 쌀 100가마에 해당하는 500원의 손해를 봤다. 하지만 문중의 땅을 저당 잡히고 8000원을 융자받아 재기에 나서는 등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축재의 길을 계속 걸었다.

1940년 구인회상점을 주식회사 구인상회로 발전시킨 연암은 1942년 여름, 변장을 하고 찾아온 거물급 독립운동가 백산(白山) 안희제를 맞아 1만원이라는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내어 임시정부에 전달토록 한다. 연암의 부친 춘강 공이 1930년경 독립운동가 구여순을 통해 5000원을 김구 선생에게 기탁한 사실을 떠올리며 풍비박산, 패가망신의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를 낸 것이다. 광복 후 연암은 사업지를 부산으로 옮겨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가 미 군정청이 승인한 무역허가 제1호 업체였다.

이즈음 고향 승산마을에서 만석꾼 허만정이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아들 허준구(許準九)를 데리고 연암을 찾았다.

“사돈의 역량을 익히 알고 찾아온 것이니 내 아들 준구를 밑에 두고 사람을 만들어주소. 나도 사돈 사업에 출자 좀 할 생각이오.”(‘한국 자본주의의 개척자들’·조동성·월간조선사)

이것이 인화(人和) 문화로 꽃피운 구·허가(家) 동업의 시발점이었다. 연암은 아우 정회의 제의를 받아들여 화장품 제조를 첫 사업으로 결정하고,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하여 수지(樹脂) 치약 등을 생산하면서 기업을 키워나갔다. 특히 럭키표 크림은 생산하기 무섭게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물자가 귀한 시대에 원료를 제대로 쓴 덕에 타사 제품의 2배 값으로도 불티나게 팔렸다. ‘럭키’ 상표는 동생 정회의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판매량이 증가하면서 크림통 뚜껑이 파손되어 반환되는 양이 많았다. 고심하던 연암은 마침 플라스틱 뚜껑이 좋다는 정보를 얻고 그후 피란지 부산 범일동에 아예 플라스틱공장을 설립하여 1952년 9월부터 플라스틱 빗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예상대로 대박이었다. 그해 11월에는 공장을 부전동으로 옮겨 5대의 사출기로 칫솔, 세숫대야, 식기 등을 생산하여 대성황을 맞았다.

<strong></div>1</strong> 1999년 10월 14일 여천 LG석유화학을 방문해 시설 현황을 살피고 있는 구자경 명예회장.<br/><strong>2</strong> 구본무 회장은 20년이 넘는 연구개발 끝에 2차전지를 주력사업으로 성장시켰다. 2002년 10월 구 회장이 전기차 배터리 개발을 위해 만든 시제품을 테스트하는 모습.<br/><strong>3</strong> 구광모 LG 대표(가운데)가 2019년 8월 29일 대전 LG화학 기술연구원을 방문, 차세대 OLED 시장 선도를 위한 핵심 공정 기술인 ‘솔루블 OLED’ 개발 현황에 대해 연구개발 책임자들과 논의하는 장면. ⓒphoto lg그룹
1 1999년 10월 14일 여천 LG석유화학을 방문해 시설 현황을 살피고 있는 구자경 명예회장.
2 구본무 회장은 20년이 넘는 연구개발 끝에 2차전지를 주력사업으로 성장시켰다. 2002년 10월 구 회장이 전기차 배터리 개발을 위해 만든 시제품을 테스트하는 모습.
3 구광모 LG 대표(가운데)가 2019년 8월 29일 대전 LG화학 기술연구원을 방문, 차세대 OLED 시장 선도를 위한 핵심 공정 기술인 ‘솔루블 OLED’ 개발 현황에 대해 연구개발 책임자들과 논의하는 장면. ⓒphoto lg그룹

대박난 플라스틱 공장

당시 이승만 대통령도 상공부 장관이 건네준 럭키표 머리빗을 들고 “이 빗이 우리나라에서 만든 국산이란 말이지” 하며 대견해 했다고 한다.

1954년에는 연지동에 공장을 세워 비닐 원단 및 플라스틱 제품 제조시설을 대폭 확장했고, 이듬해에는 럭키표 치약도 생산하였다. 이어 1958년에 금성사(현 LG전자)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설립 초기부터 국산 라디오 생산 준비에 착수하여 1959년부터 생산을 시작하였으나 소비자의 외국산 선호 경향 탓에 초기에는 난항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1961년 5·16군사정변 후 밀수품 단속이 강화되고, 특히 정부의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전개되면서 동날 정도로 많이 팔렸다.

그해 12월 KBS가 TV방송을 시작하자 TV 수상기 제작에도 열을 올렸다. 1966년에는 금성사가 국내 최초로 흑백TV를 조립·생산하여 1974년 160만대를 초과 생산하는 큰 수확을 거뒀다.

이처럼 LG그룹 창업자로서의 입지를 다져온 연암은 1960년대를 마감하는 1969년 12월 31일 별세했다. 당시 그가 일군 럭키그룹은 락희화학, 금성사, 반도상사, 호남정유, 금성판매, 한국콘티넨탈카본, 호남정유, 금성통신, 금성전선, 국제신보, 경남일보 등의 다각적인 대기업군으로 성장한 상태였다.

럭키금성의 2대 총수가 결정되는 순간

연암의 장례를 치른 지 사흘 후인 1월 7일 럭키그룹의 시무식이 있었다. 시무식이 시작되자 구철회 락희화학 사장(당시 61세)은 “자경이 오늘부터 자네가 저 자리에 앉게”라며 단상 중앙의 회장석을 가리켰다. 럭키금성의 2대 총수를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구자경 회장의 취임은 그룹 내에 새바람을 일으키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경영진의 세대교체가 잇따르면서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조선일보는 경제면 톱기사(1970년 1월 10일자)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락희그룹의 창업자이며 총수였던 구인회씨가 작년 연말에 작고한 후… 구자경의 등장은 재벌 2세가 처음으로 표면에 나선 첫 케이스로서 다른 재벌에도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상남 구자경은 1950년 LG그룹 초기 부산 시절부터 부친 연암을 도와 경영에 참여했기 때문에 ‘경영 1.5세’로도 불린다. 회장 재임 4반세기 동안 그는 그룹의 안정과 성장에 주력하였다. 그 덕분에 그룹 내에서 ‘혁신의 전도사’라는 별호를 얻기도 했다.

1950년 사업에 참여하라는 부친의 부름이 있기까지 상남은 진주사범을 졸업하고 교직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의 초등학교 제자인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은 “별호가 호랑이 선생님이셨던 원칙주의자”로 젊은 날의 상남을 회상했다.

상남은 입사 후 락희화학과 금성사를 오가며 18년간을 부산공장에서 보냈다. 초기 3년은 공장에서 먹고 자는 생활이었다. 먼지와 기름을 뒤집어쓴 모습 때문에 종종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오해받기도 했다.

교직자에서 혁신의 전도사로

이렇듯 야전에서 기초를 다진 상남은 1960년대 후반까지 부산에 머물며 부사장직까지 오른다. 오늘날 LG그룹의 경영 문화로 상징되는 자율경영과 컨센서스 문화는 그가 회장에 취임하며 싹틔운 것들로 평가받는다. ‘LG에는 연말을 앞두고 그룹회장과 각사의 사장이 새해를 설계하기 위해 독대하는 컨센서스 미팅이라는 제도가 운영되는데, 이러한 문화에서는 회장이라고 군림할 수가 없다. 회장이 권위주의적이 되면 컨센서스 문화는 쇠락하기 때문이다.’(‘한국 자본주의의 개척자들’)

상남은 1987년부터 2년간 노조 분규로 극심한 진통을 겪는 시기에 전경련 회장을 맡았다. 그는 우리 경제의 성장 동기를 일으킨 창업 1세대의 명예를 되찾아주는 것이 2세 회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국민의 기업관을 바로잡는 데 힘썼다.

멀고도 험한 경영혁신을 주도하면서 상남은 스스로에게 “예순아홉까지 경영혁신을 궤도에 올리고 물러나겠다”고 다짐했다. 상남은 1995년 2월 근속 45년, 회장 재임 25년을 끝으로 그룹 원로들과 동반 퇴진을 단행했다. 상남은 ‘아름다운 승계’를 한 뒤 난(蘭)·버섯 재배 등 자연과 벗하며 지내다가 2019년 12월 14일 숙환으로 별세한다.

3대 회장에 오른 상남의 장남 구본무씨는 부친 엄명으로 연세대 경영학과 재학 중 육군 사병으로 입대하여 만기제대 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애슐랜드대학을 거쳐 클리블랜드대학원에서 6년간 경영이론을 익혔다. 럭키에 입사해서는 수출과 관련한 금융 판매 실무를 익히면서 바이어 접대 등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구 회장은 ‘집념의 사나이’란 평을 듣는다. 골프를 처음 배우면서 무려 8개월 동안 실내 골프장에 개근한 것으로 동료들은 기억하고 있다. 소탈한 성격이어서 동료, 부하들과 소줏잔을 기울이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술자리에서는 분위기에 맞는 농담을 즐겨 인기가 있었다. 유머를 즐기던 장인(김태동 전 보건사회부 장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동료들은 풀이하고 있다.

구본무 회장 시절 LG그룹은 선대로부터의 동업 관계를 슬기롭게 청산했다. LG(구씨)와 GS(허씨) 그룹의 분리가 마찰 없이 마무리된 것은 구자경 명예회장 덕분에 가능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GS그룹과는 처음에 합의한 대로 계열사를 나눴어요. 원칙에 따라 하니까 이의도 없었고 다 행복해 합디다.”(조선일보 2005년 9월 12일 자 인터뷰)

구본무 회장은 “열린 마음으로 사회를 돌아보고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동참하자”면서 글로벌 정도(正道) 경영에 힘써오다 2018년 5월 20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구본무 회장은 창업 때부터 동업 관계였던 GS그룹, 친척인 LS·LIG그룹 등과의 계열 분리를 단행하며 LG그룹을 전자와 디스플레이·화학·통신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5년부터는 LG의인상을 제정해 사회에 희생정신을 발휘한 의인에게 보답하는 등 복지·문화·환경 관련 일을 하는 재단 이사장을 맡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데도 열정적이었다.

연암과 상남의 가계도

연암은 허을수씨와 결혼하여 10남매를 두었다. 장남 상남(작고·LG그룹 명예회장 역임)은 하정임(작고)씨와 결혼하여 6남매를 두었다. 상남의 장남 본무(작고·LG그룹 회장 역임)씨는 김영식(68)씨와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다. 본무씨의 아들 광모(42·LG그룹 회장·미국 로체스터인스티튜트공대 졸업)씨는 정효정(38·정기련 보락 대표 딸)씨와 결혼하였으며, 장녀 연경(42)씨는 윤관(45·블루런벤처스 사장·윤태수 대영알프스리조트 회장 아들)씨와 결혼하였고, 차녀 연수(24)씨가 있다. 자경씨의 차남 본능(71·희성그룹 회장)씨는 차경숙(54)씨와 결혼하였으며, 3남 본준(69·LG그룹 고문)씨는 김은미(63)씨와의 사이에 형모·연제씨를 두었으며, 4남 본식(63·희성그룹 부회장)씨는 조경아(60)씨와 결혼했다.

상남의 맏딸 훤미(73)씨는 김화중(작고·전 희성금속 사장)씨와 결혼하여 장녀 김선혜(49)씨, 차녀 김선정(46)씨를 두었다. 김선혜씨는 이해욱(52·대림산업 회장·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 아들)씨와 결혼하였다. 상남의 차녀 미정(65)씨는 최병민(68·깨끗한나라 회장·최화식 대한펄프 창업주 아들)씨와 결혼하였다.

연암의 차남 자승(작고·전 LG상사 사장)씨는 홍승해(86·홍재선 전 전경련 회장 딸)씨와 결혼하였고, 3남 자학(90·아워홈 회장)씨는 이숙희(85·이병철 전 삼성 회장 차녀)씨와 결혼하였으며, 4남 자두(88·LB인베스트먼트 회장)씨는 이의숙(82·이흥배 전 중앙TV 회장 딸)씨와 결혼하였다. 연암의 5남 자일(85·일양화학 회장)씨는 김청자(작고)씨와 결혼하였으며, 6남 자극(74·엑사이엔씨 회장)씨는 조아란(69·조필대 이화여대 교수 딸)씨와 결혼하였다.

연암의 맏딸 양세(작고)씨는 박진동(작고·박해주 전 남해군수 아들)씨와 결혼했고, 차녀 자혜(작고)씨는 이재연(89·아시안스타 회장·이재준 전 대림그룹 회장 아들)씨와 결혼하였다. 연암의 3녀 자영(81)씨는 이재원(83·전 일신제지 회장·이보형 전 제일은행장 아들)씨와 결혼하였으며, 4녀 순자(작고)씨는 류지민(작고·류헌열 전 대전지법원장 아들)씨와 결혼하였다.

내가 본 연암·상남 부자

불모지였던 화학·전자산업의 근간 마련

이건희 이화여대 교수·경영학

LG그룹의 창업자인 연암 구인회는 국내 1세대 경영자로서 개척 전략에 기초하여, 기술력이나 자본력에서 불모지에 가까웠던 화학산업과 전자산업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연암은 이들 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대형화 전략을 통해 대기업의 형태를 구축해 나갔다. 1947년 락희화학이 창설된 이래 LG그룹은 안전하고 점진적인 다각화의 길을 추구해왔다. 즉 인화단결, 개척정신을 골간으로 하는 연암의 경영이념을 바탕으로 LG그룹이 발전해왔다. 이러한 연암의 개척정신, 연구정신은 치약 개발, 최초의 국산 라디오의 생산 등 많은 부문에서 볼 수 있다.

연암의 뒤를 이어 LG그룹의 2대 회장이 된 상남 구자경은 창업자의 경영이념을 더욱 발전시켰다. 지속적인 연구개발과 함께 고객을 먼저 생각하는 고객 중심의 경영 전략과, 인간존중의 경영 전략을 통해 안정적인 성장을 꾀하였다. 그룹을 다각화하면서 동시에 시대 변화에 맞는 국제화 전략 및 대혁신 전략을 통해 세계 기업으로서 LG그룹의 도약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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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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