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구인회
1907년 8월 27일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태어남
1921년 지수보통학교 2학년 편입학
1924년 중앙고보 입학
1929년 지수협동조합 이사장
1931년 구인회상점 개점
1942년 충칭 임시정부에 독립자금 지원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 창립
1958년 금성사 창립
1964년 한국경제인협회 부회장
1969년 12월 31일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별세,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하갈리에 안장
상남 구자경
1925년 4월 24일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태어남
1945년 진주사범학교 강습과 졸업
1950년 LG화학 이사
1970년 LG 회장
1979년 한국발명특허협회 회장
198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1995년 LG 명예회장
2019년 12월 14일 숙환으로 별세
연암(蓮庵) 구인회(具仁會)와 상남(上南) 구자경(具滋暻)은 LG그룹 창업주와 부자(父子) 경영인으로 산업국가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꼽힌다. 연암이란 아호는 LG그룹의 기초를 닦은 곳인 부산의 연지동(蓮池洞)에서 유래했다. 이곳 바로 아래에 있던 암자와 암자 아래 연못에서 따온 이름이다. 상남이란 아호는 구자경이 태어난 생가 앞 작은 다리인 상남교에서 따온 것이다. 연암은 일제 말 삼엄했던 감시망 속에서도 기업의 파멸 위험을 무릅쓰고 충칭 임시정부에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보내기도 했다.
아울러 연암과 상남은 한국 재계에서 바람직하게 받아들이는 ‘인화(人和) 경영’의 표본을 제시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창업 동인이었던 허씨가(현 GS그룹)와의 동업 관계를 슬기롭게 정리했는가 하면, 구씨가(家) 자체 내의 승계 과정도 장자 상속 위주로 줄기를 이어가 한국 재계에 안정된 표본을 제시한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1995년에 취임한 3대 구본무 회장에 이어 2018년에 취임한 구광모 회장이 4대째로 현재 그 뒤를 이어가고 있다.
구광모 회장이 이끄는 지주회사 ㈜LG는 전자·화학·통신 등 LG의 사업영역에서 자회사들과 함께 주력사업의 근본적 경쟁력을 강화하고 신사업을 발굴·육성해 미래 기업 가치를 높이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그는 취임 후 “지금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의 기본정신을 다시 깨우고 더욱 발전시킬 때라고 생각한다”면서 LG의 고객 가치는 곧 고객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이한 ‘1.5세의 창업경영인’
연암과 상남은 1947년 공산품 생산이 빈약했던 산업 불모지에 제조업을 향한 의지와 정열로 한국의 화학산업(락희화학)을 개척하고, 전자산업(금성사)을 일으킨 선구적인 기업인이다. 연암의 아들인 상남은 초기 경영 과정에서부터 함께 참여하여 ‘1.5세의 창업경영인’이라는 우리 재계사에 특이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연암에서 상남으로 이어지는 LG그룹의 반세기는 노동력에서 기술력으로, 수입에서 수출로, 한국이라는 좁은 울안에서 세계경영으로 도약하는 대혁신의 과정이기도 했다.
경남 진주 도심에서 1931년 연암이 문을 연 구인회상점 자리에는 현재 별다른 표지가 남아 있지 않다. 진주의 명동거리 패션가로 변모해 있는 상태다.
“진주시 대안3동 일대가 바로 구인회상점 자리였습니다. 처마 밑의 저 흰 벽돌은 아직 옛날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지요.”
구인회상점이 있던 곳을 안내하던 구본화(63·연암생가 관리인)씨의 말을 듣고 이곳에 입점해 있는 비키패션 점주 김수정(44)씨도 “그렇게 유서 깊은 곳인 줄 전혀 몰랐다”면서 “앞으로 더욱 자부심을 가지고 장사를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연암은 1907년 8월 27일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유생 구재서(具再書)와 진양 하(河)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승내리에 일찍이 터를 잡아 재산을 이룬 허씨네는 하촌에 살고, 뒤에 이곳에 온 구씨네는 상촌에 살았다.
당시 마을에는 학문을 숭상하는 집안의 가풍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여럿 있었다. 선비들이 교유하던 학문도장으로 허만회 공이 주축이 되어 세운 창강정(滄江亭)과 후손들이 공부하던 양정재(養正齋)가 한 울안에 있었다.
1전 동전을 나눈 이재에 밝은 아이
어린 시절부터 연암은 이재에 밝은 영특한 아이로 생가 동네에서 기억되고 있다. 연암 전기에 그 기록이 담겨 있다.
‘화창한 봄날, 마을 한복판 빈터에 모인 아이들이 떠들썩하게 놀고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한구석에서 두 소년이 1전짜리 동전 한 닢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댕기에 홀쭉한 중의적삼을 입은 키 큰 소년은 동전을 쥔 손을 흔들며 펴려고 하지 않는다.
“먼저 잡은 사람이 임자지. 이거 놔라. 빨리!”
그러나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무슨 소리야. 너나 나나 똑같은 임자 아니가!”
“1전을 어떻게 나눠 갖는단 말이가!”
“어쨌든 나누어 가져야지, 그냥은 못 준다.”
깐깐한 소년은 동전을 쥐고 있는 키 큰 소년을 달래면서 마을 어귀 개천가에 있는 잡화점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동전 한 닢으로 성냥 두 갑을 사서 서로 한 갑씩 나눠 가짐으로써 이 ‘작은 전쟁’은 평화적으로 끝난다.’
떡잎 시절부터 보여준 이 깐깐한 소년의 합리적인 이재 기질에 훗날 허씨네 사돈이 거액을 맡겨 동업자로 대성하고, 자손대에 모범적인 분재(分財)의 슬기로까지 이어진 ‘이재의 원형’으로 꽃피운 셈이다.
연암은 홍문관 시독관으로 있던 할아버지 만희 구연호(具然鎬) 공 밑에서 한학을 배운다. 그는 천자문을 잘 외웠을 뿐 아니라 장난질도 곧잘 했다. 군수가 가마를 타고 행차한 후에는, 마을 아이들을 불러 모아 지게를 들게 하고 자신이 그 위에 올라 군수 행차를 흉내 내곤 했다. 또 타관에서 온 서당 접장이 까다롭게 굴어 성이 차지 않으면 아이들과 짜고 포구총을 만들어 골려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난질에만 넋을 빼앗기지 않고 어른을 모시는 효심이나 동생들을 사랑하는 우애 또한 지극했다. 언젠가 작은누나가 화롯불을 엎질러 장판이 누렇게 탔다. 꾸중을 들을까봐 걱정이 태산 같던 누이에게 얼른 나서서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라. 할아버지 오시면 내가 했다고 말할게.”
연암은 1920년 같은 마을 허만식(許萬寔)의 딸 을수(乙壽)와 결혼한다. 그의 가계는 능성(綾城) 구씨. 유가의 엄격한 가풍 속에 4대 대가족의 장남으로 자란 덕분에 형제간의 우애와 화목, 근면, 성실을 뼛속까지 익혔다. 이러한 가풍이 인화를 중시하는 기업활동으로까지 이어진 셈이다.
이병철도 수학한 지수보통학교 편입
연암은 결혼 이듬해인 1921년 손위 처남이며 뒤에 중외일보 경영자가 된 허선구의 권유로 지수보통학교에 편입한다. 이 학교는 연암과 5형제(철회·정회·태회·평회·두회), 장남인 상남과 그 형제들까지 동문으로 배출했으며, 호암 이병철도 이곳에서 6개월간 수학한 명문이다. 지금도 학교 교정에는 ‘구인회 선생 불망탑’과 80년 수령의 반송(盤松) 두 기념물이 남아 있다. 연암 등 1회 졸업생이 심었다는 반송은 연륜만큼 큰 그늘을 드리우는 거목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오늘의 지수초등학교는 동네 젊은이들이 이웃 아파트촌으로 다수 옮겨가 거의 폐교 상태다. 현재는 진주시가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과 함께 이곳에 기업가정신교육센터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진주는 오래전부터 한국 경제를 일으킨 재계 인물들의 산실이었다. 창업 1세대 연암과 2세대인 상남과 허준구 회장, 3세대인 구본무와 허창수 양가 총수 모두 진주 태생이다. 강영중 대교그룹 회장도 진주 출신이다. 풍수지리학자 최창조씨(전 서울대 교수)는 “진주를 지나는 남강은 재와 부를 상징하는데 이 지역에서 성공한 창업자가 나오자 그들을 좇아 기업인이 된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연암의 셋째 동생 태회씨는 6선 국회의원으로 남강댐을 쌓는 데 기여하여 이 지역에 지리산 자락에서 흘러내리는 청정 상수도원을 마련하는가 하면 관광단지로 개발하기도 했다.
지수보통학교 시절 연암은 일본인 교장의 조선 학생 차별에 항의하여 동맹휴학을 주도하며 동네 젊은이들을 일깨우는 장근회(槳勤會) 활동에 앞장섰다.
‘새벽에 나팔수는 동산에 올라가 아직도 단잠에 빠져 있는 마을을 향해 나팔을 불어댄다. 이불 속에서 꿈을 꾸고 있던 청소년들은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옷을 걸쳐 입으며 뛰어나와 아침 체조를 한다.… 놀고 있는 황무지를 갈아엎어 채소를 심고, 그것을 가꾸기 위해 인분을 푸는 일도 땀 흘리며 해냈다.”(‘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연암 전기)
1924년 중앙고보에 입학하여 신학문과 신문물을 접한 연암은 실업가로서의 꿈을 다지기 위해 1926년 귀향하여 지수협동조합 전무를 거쳐 1929년 이사장이 된다. 이 무렵 광목, 비단 등 각종 일용잡화를 매매하면서 상거래에 눈떴고, 1927년 동아일보 지수지국장이 된다.
포목상 첫 사업서 500원 손해
연암은 1931년 진주에서 동생 철회와 함께 구인회상점을 설립하여 포목상으로 첫 사업을 시작한다. 조부와 부친을 설득하여 2000원의 밑천을 얻어냈고, 큰집 양자로 들어간 철회에게도 1800원을 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사업 첫해 연암은 당시 쌀 100가마에 해당하는 500원의 손해를 봤다. 하지만 문중의 땅을 저당 잡히고 8000원을 융자받아 재기에 나서는 등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축재의 길을 계속 걸었다.
1940년 구인회상점을 주식회사 구인상회로 발전시킨 연암은 1942년 여름, 변장을 하고 찾아온 거물급 독립운동가 백산(白山) 안희제를 맞아 1만원이라는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내어 임시정부에 전달토록 한다. 연암의 부친 춘강 공이 1930년경 독립운동가 구여순을 통해 5000원을 김구 선생에게 기탁한 사실을 떠올리며 풍비박산, 패가망신의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를 낸 것이다. 광복 후 연암은 사업지를 부산으로 옮겨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가 미 군정청이 승인한 무역허가 제1호 업체였다.
이즈음 고향 승산마을에서 만석꾼 허만정이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아들 허준구(許準九)를 데리고 연암을 찾았다.
“사돈의 역량을 익히 알고 찾아온 것이니 내 아들 준구를 밑에 두고 사람을 만들어주소. 나도 사돈 사업에 출자 좀 할 생각이오.”(‘한국 자본주의의 개척자들’·조동성·월간조선사)
이것이 인화(人和) 문화로 꽃피운 구·허가(家) 동업의 시발점이었다. 연암은 아우 정회의 제의를 받아들여 화장품 제조를 첫 사업으로 결정하고,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하여 수지(樹脂) 치약 등을 생산하면서 기업을 키워나갔다. 특히 럭키표 크림은 생산하기 무섭게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물자가 귀한 시대에 원료를 제대로 쓴 덕에 타사 제품의 2배 값으로도 불티나게 팔렸다. ‘럭키’ 상표는 동생 정회의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판매량이 증가하면서 크림통 뚜껑이 파손되어 반환되는 양이 많았다. 고심하던 연암은 마침 플라스틱 뚜껑이 좋다는 정보를 얻고 그후 피란지 부산 범일동에 아예 플라스틱공장을 설립하여 1952년 9월부터 플라스틱 빗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예상대로 대박이었다. 그해 11월에는 공장을 부전동으로 옮겨 5대의 사출기로 칫솔, 세숫대야, 식기 등을 생산하여 대성황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