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원자력연구원 대전 본원 연구원들이 초고온 헬륨 루프 실험실에서 초고온가스로(VHTR) 모의실험을 하고 있다. ⓒphoto 한국원자력연구원
한국원자력연구원 대전 본원 연구원들이 초고온 헬륨 루프 실험실에서 초고온가스로(VHTR) 모의실험을 하고 있다. ⓒphoto 한국원자력연구원

지난 10월 15일 정부서울청사에 열린 제2차 수소경제위원회에서 정세균 국무총리는 “수소 분야는 아직 확실한 선두주자가 없어 우리도 충분히 ‘퍼스트 무버(First Mover·시장 선도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또 정 총리는 “수소경제 전환 가속화를 위해 수소 모빌리티, 수소 공급 인프라, 수소 핵심기술 개발, 수소 시범도시 등에 약 8000억원 규모의 예산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전폭적으로 나서 수소경제 활성화를 뒷받침하겠다는 것이었다. 수소경제위원회는 정부가 수소경제를 아우르는 지휘본부를 만들겠다며 지난 7월 출범한 심의·결정 기구로 국무총리가 위원장을 맡고 있다.

하지만 현 정부가 수소경제의 활성화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실질적으로 필요한 핵심기술 개발에는 소홀히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소경제’를 활성화하려면 대량의 수소를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한데, 이 기술개발 육성에는 뒷전이라는 것이다.

지난 8월 3일, 한국원자력연구원이 발표한 업무협약 체결 소식은 보도자료 형식으로 일부 언론에 소개가 됐을 뿐, 별다른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원자력연구원이 현대엔지니어링과 함께 미국의 원전기업 USNC(Ultra Safe Nuclear Corp)와 ‘소형모듈형원자로 개발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었다. 한·미 3개 기관이 공정열 및 전력공급용 고온가스로를 함께 건설하고, 향후 5년간 초소형모듈원자로(MMR)와 수소생산용 초고온가스로(VHTR) 기술개발 등을 위해 협력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업무협약 체결한 수소생산용 원전

초고온가스로 연구개발사업은 지난 2004년 노무현 정부가 ‘2차 원자력계획’을 발표하며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가 수소경제 구현을 위해 수소를 생산하겠다는 목적으로 시작한 프로젝트로, 2020년까지 17년간 총 1300억원이 넘는 연구비가 투입됐다.

초고온가스로는 세라믹 피복입자핵연료와 헬륨 냉각재를 사용하여 초고온열을 생산할 수 있는 제4세대 원자로다. 고온가스로의 원자로 냉각재 출구 온도를 850~950℃로 증가시킨 원자로로서 온실가스를 방출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수소 생산에 활용이 가능하다. 요약하면, 고온가스와 원자로를 활용해 수소를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미국, 일본, 중국 등이 미래의 핵심 원자로 기술 중 하나로 꼽으며 개발 중이다.

초고온가스로의 가장 큰 장점으로는 ‘안전성’이 꼽힌다. 핵연료 및 냉각재의 특성에 의한 고유한 안전성을 갖고 있으며 피동안전 시스템을 적용하여 전원상실 시에도 자연현상(중력, 열전도 등)만으로 안전한 상태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세라믹으로 3중 피복된 직경 1㎜의 알갱이 형태로 1800℃ 고온에서도 파손되지 않는다. 헬륨은 방사화되지 않으므로 외부로 누출되어도 방사능 오염의 염려가 적다.

기존 경수로에 비해 활용성이 다양하다는 점도 초고온가스로의 특징이다. 기존 경수로는 전력 공급에 국한되지만, 초고온가스로는 전력생산뿐만 아니라 고온열 생산으로 비전력 분야에서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초고온열 이용으로 효율이 높으며(50% 이상) 핵무기 전용 물질 확보가 어려워 핵 확산을 저지할 수 있다.

아직 상용화되지는 못한 초고온가스로의 단점은 기존 원자로에 비해 출력 밀도가 낮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자력 전문가들은 초고온가스로가 지닌 고유의 안전 특성으로 원전 부지 크기 대비 출력을 살펴보면 큰 차이가 없다고 분석한다.

현재 일본과 중국에서는 시험로를 건설해 운영 중이며, 미국은 국립연구소 주도로 핵심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이 초고온가스로 개발은 2004년 기초 개념 연구와 실증사업 타당성을 평가하며 시작됐다. 당시 정부는 2004년부터 2006년까지 210억원의 연구비를 투입하며 기초를 닦았다. 이후 2007년부터 2011년 528억원, 2012~2016년까지 510억원의 예산을 지원했다.

적지 않은 지원을 받던 사업이 난관을 만난 건 ‘탈원전’을 선포한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다. 초고온가스로 관련 연구비 예산은 2017~2019년 96억원으로 대폭 축소됐고, 2020년은 10억원밖에 편성되지 않았다. 2004년부터 올해까지 진행된 설계 및 해석 전산코드, 기기 재료 기술, 핵연료(TRISO) 제조기술, SI 열화학 수소 생산기술 등의 연구개발에 총 1354억원이 투입됐다. 이 중 2017년 이후 투입된 예산은 106억원에 불과하다.

온실가스 방출 없이 수소 생산 가능

국민의힘 정운천 의원실이 한국원자력연구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현재 유통되는 수소의 대부분은 천연가스 수증기 개질과 산업공정 부생가스를 통해 생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원자력연구원은 “향후 신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을 이용한 친환경 수소 생산 방법이 기술개발을 거쳐 상용화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네 가지의 수소발전 방식을 설명하며 초고온가스로가 가진 장점을 강조했다. 부생수소는 화학산업단지에서 부수적으로 생산되므로 생산량 증가에 한계가 있다. 추출수소는 천연가스를 고온에서 수증기와 반응시켜 수소를 생산하므로 온실가스 방출의 문제가 상존한다. 수전해는 물을 직접 전기분해해 수소를 생산하는데, 전기의 가격이 생산단가의 주요 관건이 된다.

반면 초고온가스로에서 생산해내는 수소는 고온의 열을 이용해 대량의 수소를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8월 25일 정운천 의원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대정부질의에서 정세균 국무총리에게 “문재인 정부가 꿈꾸는 그린뉴딜과 수소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탄소배출 없는 원전은 꼭 필요한 산업인데, 원전을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배격해 모순적인 상황들이 발생하고 있다”라고 했다. 무리한 탈원전 정책으로 인해 정작 수소경제를 실현하는 데 핵심적인 기술개발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주한규 교수는 “정부가 수소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데, 수소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가 중요하다”면서 “정부에선 태양광·풍력발전기 등 신재생에너지로 수소를 만들겠다고 하는데 거기엔 상당한 비용이 든다”고 했다. 주 교수는 “반면 초고온가스로는 이산화탄소 발생 없이 훨씬 저렴하게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고 했다.

키워드

#커버스토리
곽승한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