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 박태준은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의 창립자로 한국 경제 도약을 이끈 산업화 1세대의 대표주자다. 청암은 6·25전쟁 중에는 전선을 지킨 참전용사로, 환란(換亂)의 비상시국을 맞아서는 국무총리로 국가에 헌신했다. ‘짧은 인생을 영원한 조국에 바친다’는 자신의 염원대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아우르는 일생을 살았다. 세계가 인정하는 리더로 살아온 청암에게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1990년 11월 서울로 특사를 보내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를 수여했다.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이런 치사를 했다.
“한국이 군대를 필요로 할 때 당신은 장교로 투신했습니다. 한국이 기업을 찾을 땐 기업인이 되었습니다. 한국이 미래의 비전을 필요로 할 때 당신은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치사
중국의 개방경제를 주도한 덩샤오핑이 신일본제철을 방문하였을 때 이나야마 요시히로 회장에게 “중국에 한국의 포철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요청하자 이나야마 회장이 난색을 표하면서 건넨 말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제철소는 돈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짓는데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느냐고, 박태준 같은 인물이 없으면 포철 같은 제철소는 지을 수 없다고 명백히 말해 줬습니다. ‘포철은 기적’이라는 말과 함께요.”(‘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이대환·현암사 간)
청암이 모든 걸 바쳐 일궈낸 포철은 1973년 6월 용광로에서 처음 쇳물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후 청암의 탁월한 솔선수범 경영으로 가동 1년 만에 매출액 1억달러를 기록하며 흑자를 이룩하는 기적을 뽐냈다. 이후 건설과 조업을 병행하며 성장가도를 질주한 포철은 마침내 1992년 광양제철소 4기 설비를 종합 준공함으로써 2100만t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 제철소로 우뚝 섰다.
청암의 생애를 빛낸 단어는 청빈이다. 청암이라는 아호처럼 그는 정치인으로나 경제인으로 권력욕이나 물욕을 멀리한 선비의 삶을 살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후 자손들에게 유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기도 한다. 이와 관련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박태준 사상, 미래를 열다’라는 저서에서 “고 박태준 명예회장은 의지와 옳음, 청렴뿐 아니라 애정까지 갖고 있는 ‘현장의 선비’였다”고 평한 바 있다.
청암은 1927년 9월 29일(음력)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인랑리에서 박봉관과 김소순 사이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한 부친은 ‘장차 크게 잘되라’는 뜻으로 ‘태준’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청암은 1933년 백부의 권유와 일본에서 일자리를 얻은 부친의 부름으로 모친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다. 청암 일가는 처음에 아타미에 정착했지만 1936년 부친이 지쿠마가와(千曲川) 수력발전소로 직장을 옮기면서 나가노현 이야마로 이사한다.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식민지 아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실감한 청암은 공부든 운동이든 모든 걸 잘해서 일본인 학생들을 이겨야 한다는 다짐을 자주 했다. 아타미 시절 수영을 익힌 청암은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스키(할강·점프)대회에 참가하는 등 심신 단련에 힘을 쏟았다.
1940년 청암은 명문인 도쿄 아자브중학에 합격하지만 가족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이야마 북중학에 입학한다. 중학교 때 그는 교내 수영대회에 1학년 대표선수로 출전하여 2학년 대표선수와 경합을 벌여 이기지만 일본인 심판의 고의적인 편파 판정으로 우승을 빼앗기는 쓰라린 경험도 겪는다. 1944년 청암은 일본 육사 입교 권유를 거부하고 와세다대 공대로 진학을 결심했는데 이즈음 소결로공장에 노력봉사대원으로 배치받아 제철과 인연을 맺게 됐다. 소결이란 인공철광석을 의미한다.
이 무렵 일제는 학병제를 실시했다. 인문계 대학생은 모두 징집되고 이공계는 면제됐지만 조선인 학생은 여기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징집의 위기에서 청암은 일본 정착 시절부터 부친과 친하게 지낸 소메야 사장이 위장(僞裝) 양자 입양을 허용해 결국 이듬해 와세다대 공대에 입학했다. 하루 4시간씩 자면서 열심히 공부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