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주간조선 로고

상단주메뉴

  • [한국의 명가]  ‘부유한 노동자’ 아산 정주영이 이룬 대역사들
  • facebook네이버 밴드youtubekakao 플러스친구
  • 검색
  1. 경제
[2633호] 2020.11.16
관련 연재물

[한국의 명가]‘부유한 노동자’ 아산 정주영이 이룬 대역사들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아산 정주영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태어남

   
   1930년 송전공립보통학교 졸업
   1946년 서울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
   1947년 현대토건사 설립
   1971년 현대그룹 회장 취임
   1976년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 수주
   197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취임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 취임
   1989년 북한 방문, 금강산 공동개발 의정서 제시
   2001년 3월 21일 서울에서 별세,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선영에 안장됨
   

   정주영(鄭周永)은 한국을 가장 빛낸 기업인으로 꼽힌다. 정부 수립 50주년을 맞아 전경련이 실시한 설문조사와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1위 기업인’으로 꼽혔고 ‘건국 후 큰 업적을 남긴 네 번째 인물’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막노동꾼, 쌀집 배달원을 거쳐 재계 1위 그룹 회장까지 오른 그는 스스로를 ‘부유한 노동자’라 칭했다.
   
   아산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에서 농사를 짓던 부친 정봉식과 모친 한성실의 6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호 ‘아산’은 고향의 지명을 차용한 것이다. 아산은 5세 때부터 조부에게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 ‘대학’ ‘맹자’ 등 한학을 배우다가 1930년 송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다. 이즈음 아산은 고된 농사일 틈틈이 고향을 떠나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하지만 첫 가출에서부터 두 번째, 세 번째 가출에 이르기까지 매번 부친에게 덜미가 잡혀 귀향해야만 했다.
   
   1933년 열아홉 살에 아산은 마지막 가출에 성공한다. 이후 인천부두, 보성전문학교 교사 신축공사장 등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풍전엿공장에 취업한다. 그는 생전에 인천에서 막노동을 할 때 노동자 합숙소에서 빈대에 물려 밤잠을 설치다가 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을 했다. 빈대를 피하기 위해 물을 담은 양재기를 밥상 네 다리에 하나씩 고여놓고 그 위에서 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빈대들이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 자신을 상대로 ‘공중전’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미물인 빈대로부터 절대 포기하지 않고 전력질주하는 인생을 배웠다는 것이다.
   
   
   빈대로부터 배운 인생 교훈
   
   이듬해 그는 쌀가게 복흥상회 배달원으로 자리를 옮겨 쌀 한 가마니를 월급으로 받는다. 취직한 이튿날부터 매일 새벽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 가게 앞을 깨끗이 쓸고 물까지 뿌려놓는 것으로 하루 일을 시작했다. 주인 아저씨는 열심히 되질과 말질을 배우면서 몸 안 사리고 쓸고 치우고 배달하며 손님 응대도 싹싹하게 하는 아산을 기특하다고 좋아했다. 6개월쯤 지나서는 게으른 난봉꾼 아들을 제치고 아산에게 장부정리를 맡겼다.
   
   ‘그날로 나는 쌀과 잡곡이 아무렇게나 뒤죽박죽으로 어지럽던 창고 정리를 말끔히 해버렸다. 쌀은 쌀대로 10가마씩 한 군데로 몰아 줄지어 쌓아놓고 잡곡은 잡곡대로 또 그렇게 정리해서, 한눈으로도 쌀은 몇 가마, 콩은 몇 가마, 팥은 몇 가마 하는 식으로 재고 파악이 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장부도 원장과 고객별 분개장으로 나누어 갖추었는데, 아버님이 소 판 돈을 들고 나와 두 달 다니다 만 부기학원에서 배운 공부를 요긴하게 써먹은 것이었다. 그랬더니 주인 아저씨가 좋아하면서 새 자전거 한 대를 사주셨다.’(‘이 땅에 태어나서’·정주영)
   
   아산은 가출한 지 3년쯤 지나 1년치 급여가 쌀 20가마 정도 되었을 때 부친에게 편지를 띄웠고, 부친은 아들의 ‘성공’을 기뻐하는 답장을 보낸다. 쌀가게에서 일한 지 3년 만에 아산은 주인의 신뢰를 받아 좋은 조건으로 쌀가게를 인수한다. 단골을 그대로 물려받고 월말 계산만 하면 쌀은 얼마든지 대준다는 정미소의 약속을 받아 1938년 1월 서울 신당동 길가에 사글세로 새로 가게를 얻어 ‘경일상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일제의 전시체제령이 내려지면서 1939년 12월부터 쌀 배급제가 실시됐다. 전국의 쌀가게가 일제히 문을 닫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아산도 가게를 정리하고 그동안 벌어 놓았던 돈 일부를 갖고 고향으로 돌아가 부친께 논 6600㎡(2000평)를 사드린다. 그참에 장가도 들었는데, 6살 아래인 신부 변중석(邊仲錫)은 변병권(邊炳權)의 9남매 중 맏딸이었다.
   
   이듬해 아산은 다시 상경하여 아현동 고개에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자 정비공장을 차린다. 수중에 있던 700〜800원의 밑천과 쌀가게를 운영할 때 쌓은 신용으로 3000원의 사채 빚을 내어 차린 공장이었다. 장사가 제법 잘되어 신바람이 날 때쯤 실수로 화재를 내 삽시간에 공장을 태우고 빚더미에 허덕이는 곤경에 빠졌지만 전주(錢主)를 찾아가 진지한 설득 끝에 3500원을 더 빌려 다시 신설동에 무허가 자동차 수리공장을 차린다. 관할 경찰서의 무허가 단속이 빗발쳤으나 일본인 보안계장 집을 끈질기게 다니며 사정을 거듭해 단속을 멈추게 하는 기지도 발휘했다.
   
   
1 1985년 포니 엑셀 신차발표회
2 청년 아산
3 1971년 영국 애플도어사와 조선소 건립에 관해 협의하는 아산.
4 1987년 현대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하는 아산.

   부산 피란지에서 피어난 ‘캔두이즘’
   
   당시 아산은 다른 정비공장에서 열흘 걸리는 수리 기간을 사흘 정도로 단축하는 대신 높은 수리비를 청구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빨리 고치는 게 반갑지 수리비가 문제가 아닌 고객들 덕분에 신설동의 무허가 공장으로 고장난 차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공장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면서 빚도 다 갚고 돈도 꽤 많이 벌어들였지만 전쟁 광풍에 휩싸인 일제는 1943년 아도서비스를 일진공작소와 강제 합병시켜 버린다. 혼신의 힘을 다해 굴리던 공장이 사실상 분해된 데다 동생 인영과 세영이 징용으로 끌려갈 판이었다. 군수광산에서 일하면 징용이 면제된다는 말을 듣고 아산은 보증금 3만원을 넣고 황해도 수안군 홀동광산에서 생산된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운반하는 하청 계약을 맺는다. 하지만 일본인 광산주는 징용 면제를 빌미로 엄청나게 괴롭혔다. 결국 그는 2년 남짓 버티다가 1945년 5월 계약보증금 3만원과 하청 계약을 넘기며 받은 2만원 등 5만원을 들고 홀동광산을 떠난다.
   
   ‘그런데 그것이 천우신조였다. 우리가 광산을 뜬 지 딱 석 달 만에 일본이 패망했다. 홀동광산은 그날로 폐광됐고, 그곳에 있던 일본인은 모두 소련군 포로로 끌려갔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뭉그적거리며 그냥 일을 계속하고 있었더라면 그동안 만들어졌던 5만원의 재산은 그대로 물거품이 됐을 것이고, 운수 불길했으면 일본인들과 도매금으로 시베리아로 끌려갔을지도 모른다.’(‘이 땅에 태어나서’)
   
   광복 이듬해 아산은 서울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세운다. 초창기에는 미군 병기창에서 엔진을 바꿔 다는 일 등을 하다가 1년쯤 뒤부터 낡아빠진 일제 고물차를 용도에 따라 개조하는 일도 시작했다. 사업이 날로 번창하던 중 관청과 미군 부대를 드나들던 어느날, 아산은 건설업자들이 공사비를 받아가는 것을 보았다. 자신이 받는 수금액은 고작 30만〜40만원 정도인데 건설업자들은 한 번에 무려 1000만원씩 받아가는 것이 아닌가. 기왕이면 큰돈 받아내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당장 초동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에 현대토건사 간판을 더 달았다. 이후 1950년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해서 서울 중구 필동 1가 41번지에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지만 6개월 만에 6·25전쟁이 터진다.
   
   아산은 전쟁의 시련을 사업 도약의 틀로 활용한다. ‘안 되면 되게 한다’라는 아산의 ‘캔두이즘(Can Doism)’이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동아일보 외신부 기자였던 아우 신영이 부산으로 함께 피란 와서 서면에 있던 미군사령부에 통역으로 취직한 것이 아산의 사업 수주에 날개를 달았다. 두 달 만에 서울이 수복되자 일거리가 더 늘어 현대건설은 미 8군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했다. 1957년에는 한강인도교 공사를 맡아 8개월이란 단기간에 완공시켜 6대 건설업체의 반열에 오른다.
   
   ‘현대건설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정주영의 중장비에 대한 지식과 미군부대에서 불하받은 중장비의 보유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오랜 경험의 축적으로 건설장비를 갖추는 데 주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건설인력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도 지도력을 발휘하였다.’(‘한국자본주의의 개척자들’·정대용 숭실대 교수·월간조선 간)
   
   
▲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이 현대자동차 미국 앨라배마공장을 방문하여 차량을 점검하는 모습.

   430억원으로 428㎞, 경부고속도로의 기적
   
   아산은 1967년 소양강댐 공사에서도 주변에 널려 있는 자갈과 모래를 이용한 사력(砂礫)댐 공법을 창안해 공사비를 20% 이상 절감한다. 번뜩이는 그의 창조 공법은 1974년 부산항만 공사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됐다. 부산항만 공사는 미국의 기술 회사가 설계했는데 설계자가 일본인 2세였다. 그의 설계는 바다 밑의 진흙을 퍼올려 부지를 조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반이 약해서 부두로 쓸 수가 없으니 일본에서 기자재를 사다가 물을 뽑아서 지반 강화 시설을 하자고 했다. 세계은행에서 돈을 빌려 진행하는 공사에서 꽤 많은 돈을 아깝게 일본에 바치는 셈이었다. 아산은 대안을 제시한다.
   
   “배가 정박할 수 있게 파낸 흙은 적당한 위치에 부려놨다가 나중에 부지 조성에 쓰기로 하고, 대신 낙동강 하구에서 모래를 파다가 항만 부지 조성을 해도 일본에서 기자재 사다가 지반 강화 시설을 하는 돈이면 충분하니까 그렇게 하자.”
   
   1965년 현대건설은 해외 건설 시장의 첫 번째 일거리로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한다. 이 공사 금액은 당시 현대건설 전체 연간 공사 금액보다 많은 액수였다. 그해 국내 건설업체의 건설 수출 실적(1522만달러)의 33.4%에 이르는 액수로, 그때까지의 단일 공사로는 최대 계약 금액이었다.
   
   그러나 최초의 해외 건설은 기술의 낙후성과 경험부족에다 엄청난 열대 폭우와 나쁜 토질 등으로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공사를 중단해야 한다는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아산은 또다시 특유의 뚝심을 발휘하여 기어이 완공한다.
   
   아산은 1968년 2월 각계의 반대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하는 단군 이래 최대의 역사(役事)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시작한다. 하지만 430억원이라는 돈으로 428㎞의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것은 거의 무모한 일이었다. 아산은 공사 기간을 단축하는 것만이 현대를 살리고 국가를 살리는 길이라 생각했다. 지프를 타고 매일 전국 고속도로 공사현장을 돌아다니며 일꾼들에게 사명감을 심어주며 공사를 독려한 끝에 마침내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의 테이프를 끊게 된다.
   
   아산은 이어 자동차산업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1966년 단양시멘트 1차 확장공사를 위한 차관 교섭을 하러 미국에 가 있던 아우 인영에게 당장 포드사와 자동차 조립 기술 계약을 맺으라고 지시한다. 당황한 아우가 난색을 표하자 아산은 “해보기나 했어?”라고 밀어붙인다. 1967년 말 마침내 포드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현대자동차를 설립한다.
   
   아산은 100% 국산 자동차라는 자신의 목표에 반대하는 포드사와 결별한 후 1976년 최초의 국산 고유모델인 포니자동차를 생산한다. 1986년에는 자동차의 본고장 미국에도 진출한다. 아산의 ‘국산 자동차 세계화 전략’은 한국을 아시아에서 2번째, 세계에서 16번째로 고유 브랜드를 가진 자동차 생산국으로 밀어올린다. 그 여세를 몰아 미국과 캐나다, 유럽 시장에까지 ‘한국 차’를 수출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아산이 국산 고유모델을 통한 자동차산업의 기틀을 다진 데 이어 1998년 현대기아차 대표이사 회장으로 취임한 아산의 차남 정몽구는 한국 자동차산업을 세계적 반열에 올려 놓은 주역으로 꼽힌다. 2000년 국내 최초의 자동차 전문그룹으로 출범시킨 현대자동차그룹은 세계 5위 수준의 자동차 메이커로 올라섰다.
   
   건설과 자동차에서 성공한 아산은 이어 선박산업에도 도전한다. 1970년 3월 회사에 조선사업부를 설치하고 차관 도입에 몰두한다. 당시 영국의 은행장들이 선박 수주 주문서를 요구하자 거북선이 새겨진 지폐와 울산 미포만 사진 한 장만 들고 그리스로 날아가 리바노스 회장에게 26만톤급 2척을 수주받는 ‘기적’을 일궈낸다. 1972년 3월 기공식을 한 현대조선소는 1974년 6월 조선소를 완공한다. 이후 200년 조선 역사를 지닌 유럽은 물론, 100년 역사의 일본 조선소 등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자리를 굳힌다.
   
   아산은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20세기 최대 건설공사라는 평가를 받던 주베일 산업항 건설공사를 9억3114만달러에 따낸다. 그해 한국 총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아산은 이 대역사에서도 공사기간을 줄이기 위해 모든 기자재를 울산조선소에서 제작하여 89개 바지선에 싣고 태그보트(tag boat)로 현장까지 끌고 오는 모험을 감행한다. 한 번에 35일이 걸리는 수송 작전을 19번이나 감행했다.
   
   
▲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현대자동차 러시아공장을 방문하여 설명을 듣고 있다.

   서산방조제에 새겨진 ‘정주영공법’
   
   이어 아산은 1982년 바다를 메워 옥토를 만드는 대규모 서산방조제 간척사업을 시작한다. 6470억원이 투입된 이 공사에서도 그의 창의력이 발휘됐다. 고물 대형 유조선을 가라앉혀 조류를 차단하고 둑을 완성함으로써 세계 토목공사 역사에 ‘정주영공법’을 남겼다. 이 간척사업으로 여의도 면적의 33배에 이르는 1억5537만㎡(4700만평)의 바다를 농지로 바꿔 연 50만 가마니의 쌀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1981년에는 기업인으로는 최초로 올림픽 유치위원장직을 맡아 라이벌인 일본을 제치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성사시킨다. 선거를 앞두고 IOC위원들에게 일본 측이 고급시계를 선물하는 것에 맞서 매일 호텔 숙소에 정성이 가득 담긴 꽃바구니를 돌려 한국의 정감 어린 마음을 선물했다. 1977년부터 전경련 회장을 5번이나 연임하면서 ‘경제 대통령’의 칭호를 얻은 아산은 1992년 대통령선거에 도전했지만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 이은 3위로 낙선한다.
   
   그의 도전은 이후에도 그치질 않았다. 1998년 6월 16일 서산농장에서 기르던 소 500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거쳐 북한을 방문하는 감동을 연출한다. ‘북한을 개발시키는 일이 한반도의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라고 생각한 아산은 이해 10월 다시 501마리의 소 떼를 몰고 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금강산관광사업을 성사시킨다.
   
   아산은 2001년 3월 21일 노환으로 별세하여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선영에 안장된다.
   

   아산 정주영의 가계
   
   아산은 8남1녀를 두었다. 장남 몽필(작고)씨는 적자 국영기업인 인천제철을 인수하여 정상화에 힘쓰던 중 교통사고로 작고했다. 이양자(작고)씨와 사이에 두 딸을 뒀으며, 맏딸 은희(50)씨는 주현(54·현대IHL 대표)씨와 결혼하였고, 차녀 유희(48)씨가 있다.
   
   장남의 별세로 차남인 정몽구(83·한양대 공대 졸업)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이 사실상 장남 역할을 맡아왔다. 부인 이정화(작고)씨는 새벽 3시면 일어나 아침식사를 챙겼고, 19년간 시어머니(변중석)의 병 수발을 도맡았다. 몽구씨는 정화씨와 사이에 1남3녀를 뒀다. 맏딸 성이(59·이노tus 고문)씨는 영훈의료재단을 설립한 선호영 박사의 아들 두훈(64·영훈의료재단선병원 이사장)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녀 명이(57·현대커미셜 총괄대표)씨는 정경진 종로학원 설립자의 아들 태영(61·현대카드, 현대캐피탈 부회장)씨와 결혼했다. 3녀로 윤이(53·해비치호텔 사장)씨가 있다. 몽구씨의 아들 의선(51)씨는 현대그룹 회장으로 정도원 삼표그룹 회장의 딸 지선(48)씨와 결혼하여 1남2녀를 뒀다. 정몽구씨와 정도원씨는 경복고 선후배 사이로 교분을 쌓아왔다.
   
   아산의 3남 몽근(79·경복고, 한양대 졸업)씨는 현대백화점 명예회장으로, 우경숙(70)씨와 사이에 두 아들을 뒀다. 지선(49·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하버드대 스페셜스튜던트과정 수료)씨는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으로 황산덕 전 법무부 장관의 손녀 황서림(49·서울대 미대 졸업, 서울대대학원 시각디자인 전공)씨와 결혼했다. 교선(47·한국외국어대 무역학과 졸업)씨는 현대백화점그룹 부회장으로 대원강업 허재철 회장의 장녀 허승원(56·이화여대, 미 컬럼비아대 치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아산의 4남 몽우(전 현대알미늄 회장, 작고)씨는 이행자(76·숙명여대 졸업)씨와 사이에 3남1녀를 두었다. 장남 일선(51·BNG스틸 사장)씨는 LS전선 사장의 딸 은희(46)씨와 결혼했고, 차남 문선(47·BNG스틸 부사장)씨는 김영무 김&장법무법인 대표의 딸인 선희(47)씨와 결혼했고, 3남 대선(44·현대B&C 사장)씨는 노현정 전 KBS 아나운서와 결혼했다.
   
   아산의 5남 몽헌씨는 1998년 현대그룹 공동회장으로 취임했지만 ‘대북송금사건’에 연루돼 검찰조사를 받던 중 2003년 8월 작고했다. 몽헌씨는 신한해운 현영원 회장의 딸인 7살 아래 정은(66)씨와 결혼하여 1남2녀를 뒀다. 맏딸 지이(44·서울대 고고미술학과, 연세대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졸업)씨는 현대무백스 전무로, 신현우 국제종합기계 대표의 차남 두식(47·맥쿼리투자은행 전무)씨와 결혼했다. 몽헌씨의 차녀 영이(37·펜실베이니아대 경영학과, 와튼스쿨 졸업)씨는 현대상선 대리이며, 몽헌씨의 아들 영선(37)씨는 미국 유학 중이다.
   
   아산의 6남 몽준(69·서울대 경제학과, 존스홉킨스대학교 대학원 국제정치학 박사)씨는 현대중공업 사주로 정계에 진출해 7선 국회의원의 관록을 쌓았다. 대한축구협회장으로 2002년 한·일월드컵대회를 성사시키기도 했다.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의 딸 영명(65)씨와 결혼하여 기선(39·현대중공업 부사장), 남이(38·아산나눔재단 상임이사), 선이(35), 예선(25)씨 등 4남매를 두었다.
   
   아산의 7남 몽윤(66·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씨는 김진형 부국물산 회장의 딸 혜영(61)씨와 결혼하여 남매인 정이(37)·경선(35)씨를 뒀고, 8남 몽일(62·현대엠파트너스 회장)씨는 권영찬 현대파이낸스 회장의 딸 준희(59)씨와 결혼하여 현선(32)·문이(30)씨 남매를 뒀다.
   
   아산의 고명딸 경희(77)씨는 정희영(81·서울대 상대,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졸업) 전 선진종합 회장과 결혼하여 1남2녀를 뒀다. 아들 재윤(52)씨는 선진종합 대표이사이며, 장녀 윤미(50)씨는 박승준 이건산업 사장과 결혼하였고 차녀 윤선(46)씨는 전 남영비비안 남석우(49) 회장과 결혼했다.
   
   아산의 형제 자매는 아산의 동업자로 출발하여 각기 독자적 그룹을 이끈 범현대가의 주역들이다. 아산의 5살 아래 첫째 아우 인영씨는 한라그룹을 창설하였으며, 둘째 아우 순영(1922년생)씨는 성우그룹을 세웠다. 그 밑의 여동생 희영(1925년생)씨는 김영주씨와 결혼하여 한국후렌지공업을 세웠고, 넷째 아우 세영(1928년생)씨는 현대산업개발 회장이 되었다. 아산의 다섯째 아우 신영(1931년생)씨는 동아일보 기자로 독일 유학 중 작고했으며, 여섯째 아우 상영(1936년생)씨는 KCC그룹을 창설했다.
   

   

   내가 본 아산 정주영
   “배 만드는 게 별거야?”… 그는 창조경제의 선구자였다
   

박정웅 메이텍 대표

아산 정주영은 창조경제를 극적으로 실천한 선구자이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어려운 조선사업에 도전하겠느냐’는 주위의 우려에도 아산은 “배 만드는 게 별거야? 설계도대로 만들어서 조립하고 엔진은 못 만들면 외국 것 사다가 달면 된다”고 말했다.
   
   아산은 복잡한 일도 단순화하는 재주가 있어 상상력을 통해 무한한 힘을 발휘한 기업인이다. 아산이 지닌 불굴의 도전정신은 중동건설 진출 당시에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사막이 낮에 뜨겁다면 밤에 불 켜고 공사하면 되고, 물이 없다면 오아시스에서 길어 먹으면 된다”고 밀어붙여 끝내 성공했다.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항 공사를 따낸 현대건설은 당시 9억달러에 이르는 외화를 벌어들여 국가경제에 큰 힘을 보탰다.
   
   자동차·조선산업이나 중동건설 진출 등 아산의 업적을 조망해 보면 당시의 상식과 통념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상천외의 경지였음을 알게 된다. 나는 1974〜1988년 전경련에서 아산을 보필했다. 당시 경제인이나 전문가들은 아산이 그저 사업을 무작정 밀어붙이는 것으로 치부했으나, 아산은 획기적인 사업 실적으로 한국 경제를 급속하게 성장시키는 주역이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