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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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서 들어오는 그린백(green -back)을 막아라.”

달러에는 ‘그린백’이란 또 다른 이름이 있다. 미국 사회에 지폐가 처음 등장한 게 1861년이다. 남북전쟁을 치르느라 돈이 궁했던 링컨 정부는 지폐를 찍을 수 있는 권리를 얻어 재정난을 타개하려 했다. 그간 금화와 은화, 동전만 만들던 조폐국은 처음으로 만든 지폐 뒷면에 녹색을 입혔다. 이 때문에 그린백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달러의 모습은 세월이 흘러가며 변했지만 녹색을 넣는 전통만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2020년 2월 말, 그린백 중 일부가 마치 아시아에서 오는 관광객처럼 격리됐다. 미 연방제도이사회(FRB)는 달러를 풀거나 회수하는 역할을 하는데, 일부 해외 은행들은 거두어들인 달러 지폐를 항공편으로 미국으로 보낸다. 이렇게 들어온 달러는 미국 금융시스템 속에서 다시 순환한다. 그런데 코로나19 문제가 커지자 연준이 새로운 조치를 내놨다. 아시아에서 보낸 달러를 격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이터는 “관계자에 따르면 이 정책이 처음 시행된 건 2월 21일이다”라고 전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사람 간의 접촉이 주요 루트지만 바이러스와 접촉한 물체를 통해서도 가능할 순 있다”고 했다. 아시아에서 온 지폐가 전염병의 매개체가 될 수 있으니 격리 처리하겠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코로나19는 우리 삶 속에 많은 걸 바꿨고 그 범주에는 화폐도 포함됐다. 팬데믹 상황에서 물리적 지폐는 전염 우려 때문에 만지기 꺼리는 존재가 됐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소비자들이 가능하면 비대면 혹은 비접촉 결제를 사용하라고 권고했다. 사회적으로 손으로 무언가 만지는 걸 꺼리는 분위기는 현금을 주로 사용하던 유럽의 지폐 수요마저 줄게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우체국 ATM(현금자동입출금기) 중 약 3분의 1을 2022년 3월까지 폐기한다는 계획이 등장했다. 이용률이 전년 동기 대비 80%나 감소해서다. 온라인 쇼핑과 카드 사용이 증가한 건 전 세계적 현상이었다. 마스터카드의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2020년 1분기 비접촉 결제가 전년 동기 대비 40%나 증가했는데 결제 건수 중 80%가 25달러(2만7600원) 이하였다. 평소라면 현금으로 냈을 법한 액수도 이제는 카드가 사용됐다.

80%의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연구 중”

팬데믹은 디지털화폐에 대한 논의를 가열시켰다. 우리는 이미 디지털화폐 중 일부를 알고 있다. 암호화폐가 그중 하나다. 최근 1비트코인 시세는 2000만원을 넘어서며 2017년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디지털화폐가 대체재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건 최근 상승 요인 중 하나다. JP모건은 지난 8월 투자자들에게 보낸 메모에서 밀레니얼 세대가 비트코인을 선호한다고 했다. “미국 밀레니얼 세대들이 비트코인을 달러화에 대한 ‘대체재’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비트코인과 금의 상관관계도 긍정적이지만 비트코인과 달러 사이에도 변화가 생겼다.”

또 다른 디지털화폐의 한 축은 기업이 발행한다. 글로벌 투자은행인 JP모건은 디지털화폐 ‘JPM코인’을 만들어 전 세계 320여개 은행의 결제용으로 10월 말부터 활용 중이다. 하루 6조달러 이상의 돈이 세계 100여개국을 넘나든다는 점을 고려할 때 JPM코인은 사건, 그 이상의 일이다. JP모건 측이 내세운 JPM 코인의 이점은 이랬다. 국가 간 지불에서 계좌 정보 오류 등으로 생길 수 있는 지불 거절의 문제를 빠른 시간 내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수표 발행 문제를 디지털화폐로 전환하면서 거래 당사자들의 비용이 75%나 절약된다는 점, 며칠씩 걸리던 수표 결제가 단 몇 분 만에 끝나는 점이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민간의 암호화폐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고 세계적 투자은행도 디지털화폐 제작에 나선 상황이다. 게빈 브라운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대학 교수는 “우리가 좋든 싫든 기술은 돈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활용법을 결정한다. 결국 돈의 미래는 민간의 암호화폐와 기업 발행 코인, 국가의 3파전으로 벌어질 것이다. 특히 정부가 화폐에 대한 위협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진 않을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지난해 국제결제은행(BIS)이 실시한 조사를 보면 전 세계 66개국 중앙은행 중 80%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entral Bank Digital Currency·CBDC)를 연구하고 있다고 답했다.

은행 배제, 통화정책 효과 회복 기대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화폐는 암호화폐와 닮았다. 블록체인이나 분산원장기술 등을 활용해 저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가치가 널뛰는 암호화폐와 달리 우리가 쓰는 현금처럼 액면가가 정해져 있다는 것, 법정화폐로 효력을 발휘한다는 건 완전히 다르다. 이쯤 되면 의문이 생길 법하다. 지금도 우리는 통장의 돈을 현금 대신 디지털화된 숫자로 보고 있고 지폐 한 장 없이 하루를 거뜬히 보낼 수 있다. 스마트폰으로 결제하고 앱으로 잔액을 확인하거나 이체하는 건 일상적인 일이다. 굳이 중앙은행의 디지털화폐가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올 필요가 있는지를 묻는 건 그래서다.

디지털화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건 통화 정책, 특히 투자나 소비를 유도하기 위해 실행하는 마이너스 금리 때문이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디지털화폐로의 전환을 지지한다. “디지털화폐는 마이너스 금리를 더 쉽게 이행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내가 여러 해 동안 주장해온 것처럼 통화 정책의 힘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로고프 교수의 지적은 마이너스 금리가 현실에서 제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인식에서 시작한다. 보통 시중은행은 중앙은행에 돈을 맡기면서 이자를 받는다. 그런데 마이너스 금리가 적용되면 돈을 맡기더라도 거꾸로 수수료를 내야 한다. 중앙은행에 갖고 오지 말고 개인이나 기업에 빌려줘 소비나 투자를 진작시키라는 취지다. 이미 유럽중앙은행이나 일본은행은 2016년부터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고 있다. 미국은 제로금리고 한국도 0%대 금리다. 모두 경기 부양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이게 생각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았다.

정책 효과가 크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 지적된 게 중간에 거간꾼 노릇을 하는 은행이다. 수수료를 개인이나 기업에 전가시킬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됐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대안 중 하나가 중앙은행의 디지털화폐였다. 만약 중앙은행이 개인이나 기업이 갖고 있는 디지털화폐 계좌에 은행을 거치지 않고 직접 금리를 조절할 수 있다면? 로고프 교수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통화 정책의 힘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코로나19 탓에 돈을 찍어내는 정책은 더욱 필요해졌다. 세계 각국은 무제한으로 돈을 풀겠다며 경기 부양에 사활을 걸었다. 가장 상황이 심각했던 미국이 대표적이다. 블록체인 전문 투자사인 판테라캐피털의 댄 모어헤드 CEO는 투자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이 팬데믹으로 인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엄청난 액수의 돈을 찍어냈다고 했다. “미국 정부는 건국 후 맞은 2세기보다 2020년 6월에 더 많은 돈을 인쇄했다. 6월 미국의 재정적자(8640억달러)는 1776년부터 1979년 말까지 발생한 총 부채보다 많았다.” 이런 분위기 탓에 중앙은행이 디지털화폐를 검토하는 흐름은 한층 강해지는 추세다.

지난 10월 14일 중국국제텔레비전(CGTN) 기자가 선전시에서 직접 디지털 위안을 사용해보고 있다. ⓒphoto CGTN 유튜브 캡처
지난 10월 14일 중국국제텔레비전(CGTN) 기자가 선전시에서 직접 디지털 위안을 사용해보고 있다. ⓒphoto CGTN 유튜브 캡처

앞서 나가는 중국의 목적은 달러 패권 막기

독일 최대 상업은행인 도이체방크는 지난 11월 10일 ‘우리가 재건을 위해 해야 할 일’이라는 보고서를 펴내면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가 현금을 대체할 것으로 확신했다. 도이체방크는 “현재 진행 중인 코로나19 팬데믹이 ‘디지털화폐 혁명’을 가속화했다”면서 장기적으로는 대체할 수단으로 첫 손에 꼽은 게 중국의 디지털 위안이었다.

2014년부터 디지털화폐 연구를 시작한 중국 인민은행은 지난 10월 12~18일에 중국 남부 대도시인 선전에서 디지털 위안을 실제로 사용하는 실험을 마쳤다. 약 200만명의 지원자 중에 추첨을 통해 선정된 시민 4만7573명은 200위안씩 디지털 위안을 받아갔는데 총 6만2788건, 876만4000위안(14억7700만원)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현재 비공개 베타테스트가 진행 중인 도시도 여러 곳으로 전해진다. 베일에 싸여 있던 디지털 위안화 테스트의 전체 그림은 이강(易綱) 인민은행 총재가 지난 11월 2일 직접 밝히면서 공개됐다. 그는 “최근 몇 달간 디지털 위안화의 사용량이 급증했고 중국 4개 도시 시범 사업에서 약 400만건, 20억위안(3370억원)에 달하는 거래가 이뤄졌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모든 국가는 화폐의 통제권을 꽉 쥐려고 한다. 디지털화폐 역시 마찬가지다. 지폐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추적이 어려운 현금과 달리 디지털화폐는 소유자의 데이터베이스에 흔적을 남긴다. 정부는 그들의 어깨 너머로 돈의 행방을 훔쳐볼 수 있다. 저명한 금융 전문 저널리스트인 브렛 스콧은 이를 두고 ‘감시가 가능한 지불 감옥’이라고 표현했다. 특히 중국은 부를 나라 밖으로 옮기는 사람들에 민감하다. 시진핑 주석이 등장한 뒤 자본 통제가 강화됐는데 디지털화폐는 그런 면에서 효과적이다.

여기에 더해 중국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속도다. 주요국 중 첫 번째로 중앙은행이 디지털화폐를 발행하는 국가가 되길 원한다. 선점효과가 필요해서다. 도이체방크는 앞선 보고서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다른 국가가 따라잡지 못한다면 자국 기업이 다른 나라의 디지털화폐와 정책을 결제 수단으로 채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확산 대상국은 충분하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중국 모델은 신흥 시장과 덜 민주적인 국가들에 상당히 매력적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의 경제, 금융, 기술, 지정학적 힘이 확장되면 중국의 통화는 세계의 더 많은 지역에 진출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디지털화폐의 확장도 마찬가지다. 이를 통해 중국이 노리는 건 통화 패권을 일부분 가져오는 거다. 아날로그에서는 달러에 밀렸지만 디지털에서는 대등한 위상을 노린다. 당장 가능하지도 않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기동전을 통해 발 빠르게 선점하려고 한다. 저우샤오촨 전 인민은행 총재는 지난 10월 22일 헝가리에서 열린 유라시아 포럼에서 디지털 위안의 목표가 미국 달러 패권을 막는 것이라고 했다. “베이징의 디지털화폐 계획의 핵심 중 하나는 미국 달러가 현지 통화 대신 사용되는 ‘달러화’를 피하는 것이다”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유럽도 강한 달러, 약한 유로와 파운드가 불만이다. 지난해 8월 마크 카니 당시 영국중앙은행 총재는 연설에서 “내가 파악하기로는 달러 펀더멘털이 약한 게 아니라 너무 강한 게 문제다. 전 세계 국내총생산에서 미국의 비중이 꾸준히 줄어들어도 글로벌 거래에서 달러화 비중은 커진다”라고 불만을 표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곳 역시 중앙은행 차원의 디지털화폐를 추진 중이다.

“대응 안 하면 미국 소프트파워 사라진다”

블룸버그는 “국제통화 관련 각종 지표를 보면 유로화 비중은 2019년 평균 약 19%로 사상 최저치에 근접했다. 국제예금을 살펴보면 달러는 50% 이상이지만 유로는 20% 정도다”라고 전했다. 10월에 발간된 ECB의 ‘디지털 유로에 관한 보고서’는 “유로화의 국제적 역할을 지원하기 위해 디지털 유로화 발행을 고려한다면 외국인 투자자들의 유로화 수요를 자극할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혔다. 디지털 전환을 활용해 달러화의 오랜 지배를 끊을 수 있다고 보는 것도 중국과 닮았다.

반면 기축통화국인 미국 입장에서는 현재가 좋은데 굳이 건드릴 이유가 없다. 그래서 디지털 달러에 보수적이다. 반면 주변에서는 달러 패권이 위협을 받는다고 경고한다. 지난 5월 JP모건은 보고서를 통해 “디지털화폐의 잠재력에서 잃을 것이 가장 많은 나라가 미국”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스위프트(SWIFT·국제은행간통신협회)에서의 약화를 지적했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소프트파워는 달러 결제 솔루션에서 나온다. 미국이 이란에 금융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배경에도 스위프트가 있다. 그런데 디지털 위안처럼 스위프트를 거치지 않고 돈을 움직일 수 있다면 미국의 소프트파워는 크게 감소한다. “디지털화폐 주도권을 쥐는 게 지정학적 리스크 관리를 위한 최소한의 투자”(JP모건)란 지적이 계속 나오는 이유다.

헨리 폴슨 전 재무장관처럼 여전히 달러의 신뢰도를 믿으며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그런다고 디지털 달러를 마냥 외면할 순 없는 법. 지난 10월 19일 국제통화기금(IMF)이 주최한 심포지엄에 참석한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잠재적인 문제들이 해결될 때까지는 CBDC를 발행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하는 것보다는 제대로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속도보다는 방향을 강조한 셈이다. 물론 달러가 약해질 때마다 달러 종말론은 매번 제기됐지만 결국에는 달러의 승리로 끝났다. 다만 이번 도전자는 잠재력을 알 수 없는 처음 보는 상대란 게 차이점이다. 팬데믹이 가져온 녹색 지폐의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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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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