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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제
[2646호] 2021.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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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문청’ 꿈꾸던 신격호가 소비자 마음 사로잡기까지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2021-02-22 오전 11:00:03



   상전 신격호
   
   1921년 10월 4일 경남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서 태어남
   1939년 울산농업보습학교 졸업
   1946년 일본 와세다대학 화학과 졸업
   1948년 일본 롯데 사장
   1967년 한국 롯데 회장
   2011년 한국 롯데 총괄회장
   2018년 한국 롯데 명예회장
   2020년 1월 19일 서울 아산병원에서 별세
   

   상전(象殿) 신격호(辛格浩)는 1941년 혈혈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단돈 83엔(830원)으로 재계 5위의 롯데그룹을 일군 ‘열정의 개척자’이다. 우유배달 고학생이 78년 만에 자산 115조원, 매출 90조원, 세계 20여개국에 18만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글로벌 기업을 키운 것이다. 그는 특히 1960년대 이후 우리 산업이 중화학공업과 전자, 자동차 등 대규모 장치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할 때 국민 실생활과 직결되는 유통과 식품, 관광 분야를 개척하고 발전시킨 생활경제를 꽃피운 기업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상전은 1921년 10월 4일 경남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의 농가에서 신진수와 김순필 사이의 5남5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그는 말수가 적은 소년이었으나 남다른 상상력을 지녀 머릿속에 새로운 세계를 그리기를 좋아했다. 특히 한 일본인 교사가 간간이 들려주는 일본의 신문물 이야기는 큰 자극을 준 것 같다. 한때 작가가 되는 꿈을 키우기도 했다니 어쩌면 소년 신격호의 상상력은 타고난 것인지도 모른다.
   
   언양보통학교와 1939년 울산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후 함경북도의 명천국립종양장에서 1년간의 연수과정을 마친 상전은 경남도립종축장에 취업한다. 그러나 그는 종축장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일본에 유학하여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열망을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고심 끝에 상전은 1941년 맨몸으로 가출하여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장남이자 가장이라는 중압감이 어깨를 짓눌렀지만, 보다 큰 세상을 그리며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뱃삯을 내고 나니 겨우 83엔이 남아 있었다. 어렵게 도쿄에 있는 동창생의 자취방을 찾아 여장을 푼 그는 이튿날부터 우유배달을 시작했다. 그리고 대학 진학을 위해 와세다중학 야간부에 편입했다.
   
   
   공부하고 싶어 맨몸으로 가출해 일본행
   
   천성적으로 책임감이 강한 그는 우유배달을 하는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어김없이 배달시간을 지켰다. 고객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첫 번째 신조였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신용 있는 청년이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그의 성실함을 알게 된 고객들로부터 주문이 급증했다. 혼자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배달 주문이 늘어나자 그는 직접 배달원을 모집해 ‘배달사업’으로 운영해 나갔다. 그렇게 혼자 힘으로 사업의 방법을 체득해갔다.
   
   6개월 뒤 그는 친구의 방에서 독립했다. 그리고 과감하게 인생의 진로를 바꿔 와세다고등공업학교 화학과(현 와세다대학 이학부) 야간부에 진학했다. 문학을 꿈꾸던 그가 문학과는 동떨어진 화학과를 선택한 것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대학생활도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운명적인 만남이 다가왔다. 어느 날 60대 노인이 찾아와 뜻밖의 제안을 내놓았다. 노인은 그가 고물상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알게 된 사람이었는데, 남다른 성실함과 근면함을 눈여겨보았다가 믿을 수 있는 청년이라는 확신이 들자 일종의 동업을 제안한 것이다.
   
   “지금은 전쟁으로 인해 군수용 커팅오일(금속을 갈고 자르는 선반용 기름)이 품귀 상태인데, 공장을 운영해 볼 생각이 없나? 자금은 내가 대고 수요처도 알선하겠네. 운영은 자네가 알아서 해 보게나.”(‘롯데 50년사’)
   
   
1 1976년 12월 롯데호텔 상량식.
2 1980년대 초 롯데제과 양산 초코파이 라인을 순시하는 신격호 회장.
3 1989년 7월 롯데월드 개관식.
4 2015년 5월 롯데월드타워 공사 현장을 방문한 신격호 회장.

   성실함이 이어준 한 노 투자자와의 만남
   
   기회는 이렇게 왔다. 그때 상황에서 군수용 커팅오일은 만들기만 하면 납품이 될 수 있는 수요가 보장된 사업이었다. 그러나 공장이 순조롭게 가동돼 납품을 시작할 무렵 갑작스럽게 종전이 되었다. 납품할 곳이 없어진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와 노인은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었다. 죄인이 된 심정으로 노인을 찾아갔다. 노인은 “자네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라며 오히려 그를 위로했지만, 그날 청년 신격호는 이 돈을 반드시 갚겠다고 다짐했다. 돈을 벌기 위해 일본에 유학온 것이 아니었지만 운명처럼 그에게 돈을 벌어야 할 당위성이 생긴 셈이었다.
   
   1946년 3월 와세다대학 화학과를 졸업한 상전은 그해 5월 폐허나 다름없는 도쿄 스기나미구(區)의 군수공장 기숙사 자리에 ‘히카리(光) 특수화학연구소’란 간판을 내걸고 비누와 포마드, 크림 등의 화장품을 만들었다. 패전의 잿더미 속에서도 미(美)를 추구하는 게 인간의 본성임을 직시하고 화장품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그가 만든 화장품은 공급이 달릴 정도로 팔려 나갔다. 공장 운영 1년 반 만에 노인의 투자금 6만엔을 모두 상환하고 집 한 채까지 선물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노인 내외는 몹시 기뻐하며 이 집으로 이사하여 여생을 보냈다. 이때부터 그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투자도 그 범위 안에서 구상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전의 인생에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될 만한 사건이 아주 우연하게 찾아왔다. 그것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껌이었다. 그는 난생처음 껌이라는 것을 입에 넣어 보고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세상에 이런 맛이 있다니.’ 혀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맛은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때 잠재해 있던 그의 상상력이 발동했다. 어른의 입이 이런 느낌을 받을 정도라면 아이들에게는 어떠할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내가 만든 제품이 아이들에게 행복한 웃음을 줄 수 있다면 큰 보람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전쟁으로 달콤함에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껌 제조사업을 하기로 했다. 그가 사업을 통해 사람들의 삶에 기여하겠다고 마음먹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그의 생각은 훗날 그가 모국에 투자하겠다고 나서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수백 개 업체 난립한 껌 시장에 뛰어들다
   
   당시 껌 시장은 무허가업자들을 포함하여 수백 개의 업체가 난립한 혼란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상전은 과감하게 나섰고, 1947년 시험생산에도 성공했다. 제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약제사까지 고용하며 원료의 정확성과 제품의 균일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소비자가 만나는 제품은 품질과 안전, 맛 등 다방면에서 최대한의 만족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아이들을 생각하며 만드는 제품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가 만든 껌은 시장에서 기대 이상의 반응을 얻었다. 시장에서는 그가 만든 껌이 맛과 품질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판이 돌았다. 입소문은 빠르게 번졌고 언제부터인가 상점 주인들이 제품을 받으려고 공장 앞에 줄을 설 만큼 인기가 높아졌다.
   
   이듬해 6월 상전은 정식으로 껌을 주력 제품으로 하는 회사를 설립하기로 하고 ㈜롯데를 창립했다. 이는 그가 문학청년의 꿈을 키우던 시절에 읽은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이 소설은 독일의 문호 괴테가 지은 작품으로 여주인공인 샤롯테의 애칭이 바로 롯테였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주목은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 했는데, 샤롯테란 이름도 문학이 존재하는 한 사랑을 나누는 상징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주인공 샤롯테의 이미지는 자유, 사랑,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자신의 이상과도 상통하는 것으로 판단했다.”(‘롯데 50년사’)
   
   이를 계기로 상전은 본격적인 기업 경영체제를 갖추고 롯데껌의 판로를 일본 전역으로 확대한다. 서구문명의 상징인 껌에 대해 일본 성인들은 비난을 퍼부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일본에서 껌의 핵심 타깃은 바로 어린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롯데는 풍선껌 사업을 강화해 아예 풍선껌을 작은 대나무 대롱 끝에 대고 불 수 있도록 풍선껌과 대나무 대롱을 함께 포장했다. 당시에는 변변한 장난감이 없던 터라 풍선껌은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껌이라는 상품 자체가 식품이라기보다는 심심한 입을 즐겁게 해주는 장난감이라는 제품의 핵심가치를 간파한 것이다.
   
   상전은 문학청년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살려 마케팅에서도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입속의 연인’이라는 감성적인 카피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미스롯데 선발대회를 열거나 동화적인 분위기의 환상적인 광고차를 운영하여 관심을 끌기도 했다. 모든 것이 그의 아이디어였다. 때마침 일본에 컬러TV 방영이 시작되자 가요 프로그램 광고시간을 통째로 사들여 ‘롯데가요앨범’이라는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껌포장 안에 추첨권을 넣고 당첨되면 1000만엔을 준다는 광고를 내놓기도 했다. 결과는 롯데껌을 사기 위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상점 앞에 길게 줄을 서게 만들었다.
   
   
▲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값비싼 중남미산 천연치클 고집
   
   하지만 롯데껌의 성공이 단순히 마케팅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좋은 원료와 최고의 품질’을 사업의 기본으로 삼았다. 대부분의 경쟁자들이 껌 원료로 인공치클인 초산비닐을 사용했지만 롯데는 값비싼 중남미산 천연치클을 썼다.
   
   그 결과 롯데는 10년 만에 다른 경쟁사들을 모두 제치고 일본 최고의 껌 메이커가 되었다. 이어 1961년 상전은 일본 가정에서 손님 접대용 센베이가 초콜릿으로 대체될 기미가 보이자 초콜릿 생산을 결단한다. 초콜릿 산업은 과자 사업 중에서는 중공업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만큼 제조방법이 까다롭다는 얘기다.
   
   그는 유럽에서 최고의 기술자와 시설을 들여오면서 초콜릿 시장을 장악, 이것이 롯데가 과자 종합메이커로 부상하는 발판이 된다. 이후 롯데는 캔디, 비스킷, 아이스크림, 청량음료 부문에도 진출해 성공을 거듭한다. 이어 무역업을 하는 롯데상사와 롯데물산을 설립하고 해외에도 공장을 건설하는 등 글로벌 시장으로 범위를 넓혀 사업다각화를 추진한다.
   
   일본에서 사업을 일으킨 상전의 꿈은 조국에 기업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기업보국이라는 기치 아래 폐허의 조국 어린이들에게 풍요로운 꿈을 심어주기 위한 계획에 착수해 한·일 수교 이후 한국에 대한 투자의 길이 열리자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해 모국 투자를 시작한다. 롯데제과에 이어 롯데그룹은 1970년대에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삼강으로 국내 최대 식품기업으로 발전했으며, 이어 롯데호텔과 롯데쇼핑을 설립해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유통·관광산업의 현대화 토대를 구축했다. 또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과 롯데건설 등으로 국가 기간산업에도 본격 진출하였다.
   
   1973년 당시 동양 최대의 초특급 호텔로 장장 6년간의 공사 끝에 문을 연 롯데호텔에 붙여진 찬사는 ‘한국의 마천루’였다. 지하 3층, 지상 38층의 고층 빌딩으로 1000여개 객실을 갖춘 롯데호텔 건설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에 버금가는 1억5000만달러가 투자되었다.
   
   호텔 사업 구상은 상전과 롯데그룹에 대단한 모험이었다. 당시에는 국내 산업기반이 취약한 데다 외국 손님을 불러올 국제 수준의 관광상품도 개발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관광업 자체의 민간투자가 저조한 데다 산업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 지난해 8월 3일 첨단소재 의왕사업장을 방문한 신동빈 회장(가운데).

   ‘한국의 마천루’ 건설하며 관광입국 펼쳐
   
   그러나 부존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기필코 관광입국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 상전의 신념이었다. 그 결단으로 탄생한 롯데호텔은 201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 한국 호텔로는 처음으로 해외 체인을 오픈할 만큼 성장했다.
   
   197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 백화점은 대부분 영세하고 운영방식 또한 근대화돼 있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전은 국가 경제의 발전과 유통업의 근대화에 앞장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백화점 사업에 도전한다. 롯데쇼핑센터(현 롯데백화점 본점) 건립공사는 1976년 시작해 1979년 12월에 완공됐다. 규모는 연면적 2만7438㎡에 달하며 지하 1층 지상 7층으로, 기존 백화점에 비해 2〜3배의 크기로 아직껏 한국 1위의 백화점 위치를 지키고 있다.
   
   상전은 애초 기산산업에 투자해 모국의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특히 제철사업에 관심이 많았지만, 정부가 제철사업은 국영화한다는 방침을 정하면서 그 소망을 접어야 했다. 이후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하면서 그는 비로소 중화학공업에의 꿈을 이룬다. 1979년 호남석유화학은 여천단지 내 3개의 공장을 완공하고 고밀도 폴리에틸렌, 폴리프로필렌, 에틸렌옥사이드와 에틸렌글리콜의 상업 생산을 시작한다. 이어 케이퍼케미칼 등 국내 유화사와 말레이시아의 타이탄케미칼 등을 인수하며 롯데그룹 성장의 한 축으로 키웠다. 2012년 롯데케미칼로 사명을 바꾸고 글로벌 화학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이후 서울 잠실에 테마파크를 포함한 대규모 관광위락시설인 롯데월드를 건설하는 동안 상전은 또 하나의 원대한 계획을 품고 있었다. 석촌호수 서호를 중심으로 건설되는 롯데월드와 함께, 석촌 동호를 중심으로 종합관광단지(당시 명칭 제2롯데월드)를 건설해 잠실 지구를 한국의 랜드마크로서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복합 관광명소로 키워내겠다는 구상이었다.
   
   이를 위해 롯데는 1982년 제2롯데월드 사업 추진 및 운영 주체로 롯데물산을 설립하고, 1988년 1월에는 서울시로부터 사업 이행에 필요한 부지 8만6000여㎡를 매입했다. 그후 지난한 우여곡절을 거쳐 상전은 마침내 2011년 지상 123층 높이 555m의 초고층 빌딩을 포함하여 80만5000여㎡에 달하는 롯데월드타워 전체 단지의 건축허가를 받아냈다.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2017년 4월 3일 오픈하였다.
   
   현재 우리나라 최고층 건물이자 최대 규모의 쇼핑몰로 탄생한 롯데월드타워는 서울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는 관광 명물로 한국 관광산업 활성화에 이바지하고 있다.
   
   
   서울의 랜드마크 롯데월드타워 완성
   
   상전은 2020년 1월 19일 서울 아산병원에서 별세했다. 상전의 뒤를 이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새해 들어 ‘롯데 재도약’을 선언하고 “계열사 최고경영자들은 각자의 업에서 1위가 되기 위해 필요한 투자는 과감히 진행하라”고 주문했다. 특히 신 회장은 디지털 혁신을 위한 연구개발 투자와 ESG(환경·사회적 가치·지배구조)경영에 대한 전략적 집중을 당부했다. 그는 “사회적 가치는 기업 생존과 사업의 성패를 결정짓는 핵심사항”이라며 “규제에 대응하는 식의 접근보다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지, 어떤 사회적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지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본 상전 신격호
   세계 최초·최고를 고집한 파격의 경영인
   

오쿠노 쇼 일본건축연구소 소장·롯데월드타워 설계자

신격호 회장은 빼어난 선견지명을 가진 경영자여서 존경스럽다. 대표적 사례로 서울 잠실의 테마파크 롯데월드를 꼽고 싶다. 지금은 평범한 놀이공원 같지만 1980년대 도심 한복판 실내에 놀이공원을 짓는다는 것은 너무나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신 회장이 늘 강조한 것은 돈을 벌거나 수익을 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세계 최고·최초를 요구해서 자주 당황스러웠다.
   나는 과거 미국 뉴욕 한복판에 실내 테마파크와 호텔, 백화점 등을 세우려고 부동산 개발사업을 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협의한 일도 있다. 또 신격호 회장이 도쿄 디즈니랜드와 경쟁하기 위해 인근에 테마파크를 세우려고 했던 일도 내 책에 소개했다. 내가 출간한 책에 ‘무모하다거나 상식 밖이란 혹평을 들었던, 도전을 성공으로 이끈 신 회장의 결단의 순간과 인재를 끌어들이는 인간미’ 등을 많이 실으려 애썼다. 항상 세계 최초·최고를 고집한 신 회장의 파격적인 발상은 늘 나를 놀라게 했다.
   

   

   상전 신격호의 가계
   
   상전은 첫 부인 노순화(작고)씨와 사이에 장녀 신영자(79·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이화여대 가정학과 졸업)씨를 두었다. 신 이사장은 유통업계 라이벌인 이명희 신세계백화점 회장과는 대학 동창으로, 업계 1위 롯데백화점을 일구는 데 기여했으며 1남3녀를 두었다. 그중 장남 장재영(54)씨는 류주영(47)씨와 결혼하였다. 맏딸 장혜선(52)씨가 있고, 둘째 딸 선윤(50·롯데호텔 전무)씨는 양성욱(52)씨와, 셋째 딸 정안(47)씨는 이승환(53·국제변호사)씨와 결혼했다.
   
   상전은 둘째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93)씨와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인 동주(67·컬럼비아대학원 MBA)씨는 SDJ코퍼레이션 회장으로, 조은주(57)씨와 결혼하여 아들 정훈(28)씨를 두었다. 차남 동빈(66·컬럼비아대학원 MBA)씨는 롯데그룹 회장으로, 시게미쓰 마나미(62)씨와 결혼하여 아들 유열(35)씨와 규미(33)·승은(29)씨 자매를 슬하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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